1993년 7월17일 미국 워싱턴에서 피터 타노프 정무차관을 만나 북핵을 비롯한 한-미 현안을 논의한 필자는 그날 저녁 ‘미주지역 한반도문제 정보교류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39
1993년 7월17일 미국 워싱턴 국무부에서 피터 타노프 정무차관과 나는 마주앉아 모처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난 4월 방한했을 때 타노프는 북-미 회담 대표로 내정됐느냐는 내 물음에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이 현단계에는 북한과 정치적 또는 정무적 차원의 대화는 이르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내심 짐작했다. 실제로 6월 뉴욕에서 열린 1차 북-미 회담에서 미국 수석대표는 타노프가 아닌 갈루치 차관보였다. 갈루치는 군사통제 전문가였다. 이날 타노프는 갈루치를 대표로 임명한 것은 미국이 핵문제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타노프는 내게 남북대화가 중단된 상태에서 북한 정세는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북한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을 주목하고 있다고 답했다. 권력세습을 앞두고 김정일은 강경군부의 지지를 받는 듯하고, 김일성 주석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나 남쪽과의 대화에 관심을 쏟고 있는 듯했다. 나는 북의 강경세력이 더 강경해지면, 그만큼 지난 4월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일어났던 신흥종교집단 다윗파에 대한 무력진압 참사와 같은 비극이 벌어질 위험도 증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북한은 종교화된 체제이기에, 외부의 강경책은 광신도와 같이 확신에 찬 강경세력으로 하여금 깜짝 놀랄 비이성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도쿄·워싱턴의 강경론자들이 손잡고 북한을 압살할 것처럼 밀어붙이면, 역설적으로 북쪽 강경파의 입지도 그만큼 강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미국의 냉전강경세력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경고이자 불행한 사건을 미리 막으려는 ‘평화 만들기’의 처방이기도 했다.
타노프는 이번 제네바 2차 회담에서 북한이 남북 비핵화 실천을 위한 대화를 계속 촉구하고 있다며 중국의 영향력에 대해 잠시 언급했다. 그는 중국이 북한 핵문제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북의 핵개발을 우려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이 여러 채널을 통해 중국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혹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유엔의 대북제재조처도 중국의 협조 없이는 어렵다고 언급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지만 북한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렛대는 중국보다 미국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줬다.
나는 이어 북핵 문제 해결이 계속 지연되면 일본의 핵민족주의자들이 자극을 받아 동북아 지역에서 위험한 군비경쟁을 촉발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핵민족주의 움직임이 머리를 드는 듯한데, 일본에서도 중국의 핵무기와 북한의 핵개발 의지에 자극받은 극우파들이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할 위험이 있었다. 타노프 차관도 나의 이런 판단에 동의했다. 그리고 지난 ‘G7 회의’ 때 핵확산금지조약의 무기한 연장에 대한 일본 정부의 확고한 찬성 입장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특히 3월12일 북의 조약 탈퇴 선언 이후 일본 국회에서 조약의 연장 문제를 제기하기가 한층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일본의 극우 핵민족주의자들은 조약에 묶여 핵 개발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늘 불만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95년에 이르면 일본 정부도 국제 여론에 따라 조약의 무기한 연장에 결국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이번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일본도 긍정적 호응을 할 테지만, 반대로 북한이 ‘노동 1호’ 개발을 가속시키면 일본의 여론도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을 듣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타노프는 며칠 전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 때 수행한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북한에 좀더 강력한 메시지를 주려고 계획한 것이라고 했다. 이를 빌미로 이번 제네바 2차 회담에서 북쪽이 반발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면담을 마치고 일어서는 내게 타노프는 제임스 레이니의 주한 미대사 임명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며 9월쯤엔 상원 인준이 가능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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