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1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2차 북-미 회담의 북한 대표인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을 미국 대표부 관계자가 맞이하고 있다. 같은 기간 방미 순방에 나선 필자는 7월17일 워싱턴에서 타노프 정무차관을 만나 북-미 회담 진행 상황과 미국의 협상 전략을 확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38
1993년 7월17일 오전 워싱턴에서 나는 주미 한국대사관의 1등 서기관 김숙의 안내로 국무부를 방문해 피터 타노프 정무차관을 면담했다. 지난 4월 서울에 이어 두번째 만남이었다. 우리 쪽에서는 내 보좌역인 길정우 박사가 동행했고, 미국 쪽에서는 러스트 데밍 동아태 부차관보와 윌리엄 스탠턴 정무차관 아주문제담당 보좌관, 존 메실 한국과 담당관이 배석했다. 이날의 대화는 서울에서 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고 덜 관료적이었다.
타노프 차관에게 나는 우선 7월14일부터 제네바에서 진행중인 2차 북-미 회담과 관련해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이번 회담에서 북쪽이 뜻밖에 제안한 경수로 건설 기술 제공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북한과 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어느 정도 오래 끌 수 있는지도 잠깐 얘기했다. 북한 정세와 남북대화 전망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밝히는 과정에서 ‘핵 민족주의’로 번지는 흐름에 대한 경계심을 확인하기도 했다.
북-미 회담과 관련해 타노프는 갈루치 미 수석대표와 긴밀히 연락하고 있다며 전날(16일) 대화가 잠시 교착상태에 빠진 것 같다고 했다. 애초 이날 오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사찰에 관한 협상과 함께 남북한 비핵화 이행을 위한 대화를 개시하기로 약속했는데, 오후 들어 북쪽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고 했다. 북한은 새로운 원자로인 경수로 건설 지원을 미국이 확실히 약속해야만 특별사찰에 관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확산 금지 의무를 충족시켜야만, 다시 말해 특별사찰을 먼저 수용해야만 경수로 지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타노프는 만일 북한이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7월19일에는 어떠한 회담도, 공동 발표도 없을 것이라는 강경한 방침도 전달해놓은 상태라고 했다.
이에 나는 북한의 이러한 태도 돌변을 전형적인 벼랑끝 전술로 보느냐고 물었다. 타노프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했다. 하나는 북한이 미국의 양보를 끌어내려고 계획적으로 벼랑끝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전 회의 결과에 대한 평양의 새로운 강경훈령 탓일 수도 있다고 했다. 어떻든 미국으로서는 확고한 태도를 표명했기에 하루이틀 사이 북한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야만 이번 제네바 회담이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6월11일의 1차 북-미 회담을 놓고 한국과 일본의 일부 언론이 비판적으로 반응한 것을 이번에는 미국이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북-미 3차 접촉 시기를 언급하면서 지난 1차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영어로 ‘뉴클리어-프리 코리아’라고 표현했는데, ‘디뉴클리어리제이션 오브 코리안 페닌슐라’와 혼동하기 쉬우니 표현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타노프는 이번 발표문에는 그러한 혼란이 오지 않도록 용어를 세밀히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또 북한의 태도에 따라 3차 회담은 8월 초순께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당시 2차 북-미 회담에서 가장 놀라운 뉴스는 북한이 미국에 ‘경수로 기술 제공’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일찍이 지원을 약속했던 소련이 해체되는 바람에 경수로 건설이 무산됐다. 미국도 이 제의를 원천적으로 거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경수로만으로는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재료(플루토늄)를 생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노프도 일단 북한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다만, 경수로 제공은 엄청난 재정지원도 해야 하는 까닭에 선뜻 나설 의향이 없고, 핵 문제가 해결된 뒤에나 검토해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설사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엄청난 재정지원을 할 뜻은 없었다. 그 ‘공’은 결국 우리 정부로 넘어올 가능성이 컸다. 북한으로서는 경수로가 세워지면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심각한 전력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따라서 앞으로 이 문제에 더 매달릴 것이 분명했다.
북핵 해결 시한을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가 예정된 9월로 설정하는 게 어떠냐는 내 제안에 타노프도 동의했다. 그는 어쨌거나 미국은 북-미 회담을 무한정 계속할 생각은 없다고 못박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겨레 인기기사>
■ CNN “한국에서는 농담하다 감옥갈 수 있다”
■ 톰 크루즈, 할리우드 소득 1위…홈즈 위자료 액수는?
■ 경찰관에게 '짭새'로 불렀다 벌금 폭탄
■ 현병철 인권위원장 ‘두개의 문’ 보러갔다 쫓겨나
■ [화보] 미리내빙하·인수봉…순한글 남극지명
한완상 전 부총리
■ CNN “한국에서는 농담하다 감옥갈 수 있다”
■ 톰 크루즈, 할리우드 소득 1위…홈즈 위자료 액수는?
■ 경찰관에게 '짭새'로 불렀다 벌금 폭탄
■ 현병철 인권위원장 ‘두개의 문’ 보러갔다 쫓겨나
■ [화보] 미리내빙하·인수봉…순한글 남극지명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