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 필자는 워싱턴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으로부터 영변 핵시설에 관한 특별 브리핑을 받고 국내 보수진영에서 주장해온 ‘북핵’ 정보의 허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은 92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 일행이 영변 원자로를 시찰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37)
1993년 7월16일 방미 다섯째날 오전, 나는 예정에 없던 미 중앙정보국의 특별 브리핑을 받았다. 1시간15분간 ‘북한 핵문제 관련 회의 동향과 북한의 의도 분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나는 이 기회에 북핵 관련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국내 보수진영에서 핵시설로 의심하는 영변의 시설이 과연 무엇인지, 북한이 추출해 보관중인 플루토늄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국내 일부 강경 냉전세력이 단언하는 것처럼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는지 나도 알고 싶었다.
93년 7월 중순을 기준으로 북한 영변에 있는 주요 핵 관련 시설은 30㎿와 25㎿짜리 원자로·재처리시설·핵연료공장, 이렇게 3가지였다. 미국은 위성사진으로 거의 매일 이 시설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했다. 2~3일 전까지 원자로가 정상 가동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단다. 이 시설을 폐쇄하려는 징후도 없고 핵연료를 재장전하려는 징후도 없다고 했다.
미국 쪽에서 가장 의심하는 시설로는 지난 3월12일 즈음 연변 지역에서 새 건물을 짓는 작업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바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한 날이다. 그러나 새 건물이 핵시설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탱크가 해당 구역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주며 북한이 군사기지라는 점을 일부러 과시하려 한다고 추측했다. 가장 의심이 가는 시설은 ‘사이트5’(Site5)로 명명해뒀는데, 92년 초 북한이 도랑을 파서 지하로 파이프를 매설한 곳이었다. 건물은 단층으로 지하실이 없고 벽은 두꺼운 콘크리트여서 옛소련의 핵시설과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당초 핵물질과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했으나 최근에는 출입문을 넓히고 군사 차량이 출입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건물 뒤쪽에는 군인들의 배구장도 마련했다. 미국은 이를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에 대비한 위장 작업일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하고 보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첩보 분석만으로 확언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대체로 8~12㎏의 플루토늄을 이미 추출해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 정도면 핵폭탄 한두 개를 제조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현재 원자로 속에 잠겨 있는 플루토늄의 양은 내년 봄까지 25~30㎏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냉전세력들이 확신하고 있는, 북한의 핵폭탄 제조 기술 보유에 대해서는 미국도 명확한 증거가 없어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일정한 기술 수준에는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폭탄 제조를 위한 설계와 개발 의지는 확실히 갖고 있다고 미국은 판단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92년 초 국제원자력기구와 협정을 체결하고 안전조처 규정을 수용했을까. 아마도 임시사찰을 통해 일정량의 플루토늄 생산을 시인한 북한은 이 정도의 핵물질은 동면 상태로 보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미국은 파악했다.
미 정보국은 흥미롭게도 핵조약 탈퇴 선언을 주도한 세력으로 김정일과 강경군부를 주목했다. 부자세습이 완결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군부가 핵개발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았다. 이번 핵위기로 말미암아 김정일은 점수를 별로 따지 못했고, 북한의 대외관계에 타격을 주었으며, 따라서 북한 경제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나는 그 대목에서 김일성 주석이 왜 아들의 강경한 모험심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했는가 하는 의구심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들은 끝으로 북핵문제를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차를 지적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핵 비확산 차원에서 그 저지에 관심을 쏟는 데 비해 한국은 북한의 핵무기 제조 여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했다. “남북대화는 미-북 접촉에 비해 더 정교하고 장기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미국의 견해는 앞으로 깊이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말이었다.
브리핑을 들은 뒤 나는 미국이 북한의 행동을 이해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언급했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서양사회의 ‘죄의식 문화’와 달리 ‘수치심 문화’에 의해 행동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체면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북한처럼 1인 지도자 숭배사상이 지배하는 특수한 사회와 협상할 때는 최고지도자의 체면과 명예라는 변수를 고려해야 하고 유연성과 인내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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