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12일 뉴욕에 도착한 날 저녁 필자는 유종하 유엔주재 대사가 마련한 만찬에서 올브라이트 미국 대사를 비롯한 여러 유엔 대사들과 만나 북한 문제를 토론했다. 사진은 97년 7월 북한을 다녀온 레이니 주한 미대사와 샘 넌 미 상원의원이 유종하 외무장관을 예방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36)
1993년 7월12일 나는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미국 방문은 여러가지로 어렵고 미묘한 시점에 이뤄졌다. 7월14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2차 북-미 회담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1차 북-미 회담 결과를 놓고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점을 거울삼아 이번에는 더 깊고 넓게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피터 타노프 미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나서 대북정책에 대한 양국의 소통을 더 정확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백악관 안보책임자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제임스 레이니를 만나 한국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고마워하는 민주인사들을 대표해서 주한 미국대사 임명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에모리대학 총장 시절 나의 딸 셋을 친딸처럼 사랑해줬고 그 가운데 큰딸 미미와 막내 주리의 대학 입학과 장학금을 지원해주었다. 대학 교육에 관한 한 그가 내 딸들의 아버지 노릇을 한 셈이다. 그는 민주주의·인권·평화의 가치를 위해 함께 일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일할 동지이기도 했다. 그런 그와 만나 깊은 이야기를 오래 나누고 싶었다.
12일 맨 먼저 뉴욕에 도착하니 11년 전 망명객으로 왔을 때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 미국교회협의회와 유니언신학교, 미국 장로교가 내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뿌리뽑힌 나그네 신세였던 내게 삶의 보금자리를 제공해준 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칭 ‘475건물’이라고 부르는 미국교회협의회 본부 강당에서 환영회를 열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이승만 목사, 유니언신학교 슈라이버 총장 부부 등 여러 명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에게도 나의 귀환은 놀라운 일이었고 그만큼 반갑고 신나는 일이었다. 좀더 긴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모두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민주화를 위해 여러모로 헌신해온 분들이었다. 한반도가 탈냉전의 새 역사를 펼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온 분들이기에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빚진 자로 살게 될 것이다. 82년부터 84년까지 2년간 매주 만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인권 개선과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뉴욕 목요기도회 동지들도 잠시 만났다. 늘 형님처럼 돌봐주신 이승만 목사를 비롯해 임순만·장혜원·안중식 등 여러 동지들과도 감격 속에 재회했다.
12일 저녁에는 유종하 유엔주재 대사가 나를 위해 만찬을 마련했다. 올브라이트 미국 대사를 비롯해 독일 대사, 브라질 대사, 가레칸 유엔 사무총장 특별보좌관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을 설명했다. 남북관계를 현실적으로 개선해 나가려면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개발의 투명성은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뤄질 수 있었다. 첫째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둘째는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셋째로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남북간 상호사찰이 이뤄져야 했다.
유엔 대사들도 내 말에 동의하면서 북한 최고지도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쏟아냈다. 그래서 나는 북한 체제의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을 폄하하는 차원보다 북한 체제의 독특한 성격과 본질에 주목해야만 비정상으로 보이는 북한의 행동에 성숙하고 합리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북한 체제는 종교사회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종교국가’(컬티스트 스테이트)였다. 따라서 외부에서 강한 압력을 가하면 비이성적인 강경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미국이나 유럽의 보수적 지도자들은 대부분 북한을 강하게 옥죄면 쉽게 굴복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강경한 옥죔은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친김에 햇볕정책의 유효성과 효과에 대해 얘기하려 했으나 참석자들이 지나치게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쏟아놓기에 그만 접고 말았다. 짐작은 했지만 유 대사의 평소 견해가 유엔 대사들에게도 많이 주입된 것 같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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