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12일 취임 첫 미국 방문 계획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필자는 8·15 광복절에 맞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추진하는 남북 인간띠 잇기 운동을 정부가 공식 후원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사진은 그해 8월14일 임진각에서 남북 인간띠 잇기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35)
1993년 7월10일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방한한 이틀 뒤인 7월12일 나는 예정대로 미국으로 향했다. 출발 닷새 전, 청와대에 들러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방미 계획을 보고했다. 나는 방문 기간에 2차 북-미 회담이 제네바에 열린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한-미 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국무부와 백악관 고위층을 만날 계획인데, 가능하면 상원 국방위원장 샘 넌 의원도 만나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샘 넌 의원은 나와 미국 에머리대학 동창으로, 내가 어려움에 처했던 81년 9월 에머리대학 교환교수로 갈 수 있도록 주선해준 인물이기도 하다. 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그해 11월 풀려나긴 했으나 그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시대 도저히 출국할 수 없는 처지였던 나를 미국으로 불러줄 정도로 그는 정계의 거물이었다.
나는 바로 며칠 전인 7월4일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제임스 레이니 박사도 만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레이니 박사와 인연은 70년대 초반부터 워낙 각별해 따로 얘기를 할 터이지만, 80년 5월 당시 에머리대 총장이었던 그는 여러 차례 직접 한국을 찾아오는 노력 끝에 나를 석방시키고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샘 넌 의원에게 부탁을 해준 은인이었다. 그는 문민정부의 초대 통일원 장관이자 부총리로서 미국을 공식 방문하는 나를 누구보다 반겨줄 것이었다. 김 대통령도 자신과 친분이 있는 레이니가 한국대사로 오는 것을 환영한다면서 이미 아그레망도 보냈다고 했다.
이날 김 대통령은 지난 ‘12·12 사태’와 ‘5·18’에 얽매여 미래지향적 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현실을 한탄했다. 그래서 나는 12·12 사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적 평가가 엄정히 이뤄질 테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 먼저 역사적 평가를 요청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빌라도의 잘못을 상기시켰다. 빌라도가 냄비 끓듯 하는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한 나머지 죄 없는 예수를 가장 잔인한 십자가에 처형하는 오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여론에 민감해야 하지만, 여론을 추종하다 포퓰리즘에 빠지면 결국 실패한 지도자로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북한 핵문제를 두고 날로 기세를 높이는 냉전적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여론에 끌려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 대통령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세밀한 움직임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도 말씀드렸다.
마침 이즈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축이 되어 그해 8·15 광복절에 맞춰 남북 인간띠 잇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정부를 따돌리거나 적대시하면서 재야에서 평화통일운동의 하나로 추진하던 인간띠 잇기 운동을 이번에는 통일원의 후원을 받아 당당하게 열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이야기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시민과 정부가 손을 잡고 이런 운동을 펼치면, 무엇보다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고 지난날 반정부 민주세력을 새 정부의 개혁 지지 세력으로 포용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교회협의회는 김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로 민주화 투쟁을 할 때 뜨거운 지지를 보냈고 지금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내친김에 대통령이 반기지 않을 말도 했다. 국내 개혁에는 진취적이고 과감한 대통령이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에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여기에 실망한 국민들, 특히 20~30대 젊은 세대들이 자연히 더 진보적인 대북정책을 제시하는 정치인에게 쏠리게 될 거라고 지적했다. 당시 영국 런던에 체류중인 김대중 전 총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우려에 대해 김 대통령은 너무 낙관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청와대를 나서면서 나는 김 대통령이 중심(中心)과 충심(衷心)을 잡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청와대가 대통령에게 정치적 심리적 감옥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잘못된 첩보나 정보를 주변에서 각색하거나 잘못 선별해서 대통령에게 전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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