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26일 정부 대변인 오인환 공보처 장관이 북한의 ‘특사교환 제의 무산’ 선언에 대한 비난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의 수준과 방식을 둘러싸고 13차례 수정 제의를 주고받았으나 남북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32)
1993년 5월25일 북한의 특사교환 제의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특사교환 대신 수정안을 다시 제의하기로 했다. 5월27일 오전 7시30분 총리공관에서 총리 주재로 전략회의를 했다. 우리는 북한의 제의 내용보다 회담 방식에 더 신경을 썼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통적인 총리회담 방식을 고수하기로 했다. 청와대·안기부·총리실 쪽에서 형식을 강조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청와대가 있다. 나로서는 회담 방식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기가 어려웠다. 북한이 부총리급으로 못을 박은 탓에 그 제의에 동의하기도 어려웠다. 청와대는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했다.
회담 의제로는 핵문제와 특사교환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북쪽이 제안한 6월8일에 차관급 접촉을 하자는 수정안을 제의했다. 그러자 북쪽은 이례적으로 하루 만에 회답을 보내왔다. 북쪽은 특사교환을 중시했다. 우리는 6월1일 아침 다시 총리공관에서 전략회의를 했다. 그래서 ‘북한의 특사교환 제의를 수용하되 의제는 핵문제 해결을 우선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전제 아래 6월8일 실무접촉을 하자고 답을 보냈다. 그런데 북쪽은 회답을 보내지 않았고 결국 6월8일 만남은 무산되었다.
애초 황인성 총리 이름으로 보낸 서신에서 우리는 “핵문제는 남북간에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며 이의 해결 없이는 남북간 신뢰회복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에 대해 북쪽이 냉소적이지 않을까 염려했다. 북쪽은 핵문제에 대해서는 미국과 직접 담판을 원해왔기 때문이다. 핵문제에 관한 한 남한이 실효성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북한 당국은 오히려 우리가 측면에서 북-미 접촉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더 정확히는 한국이 북-미 핵협상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북쪽은 핵문제에 관한 한 ‘통미봉남’ 전략을 견지해온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6월8일 강성산 총리 이름으로 황 총리에게 다시 전통문을 보내왔다. 10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강 총리의 전통문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핵문제와 특사교환 문제를 별개로 다뤄왔다. 그런데 강 총리는 “우리(북한)의 특사교환 제의가 실현되었더라면 이미 핵문제를 비롯한 다른 현안도 실질적인 해결을 보는 길이 열렸을 것”이라고 밝혀놓았다. 이어 “특사교환이 실현되면 조선반도의 비핵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놓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저울질하고 있는데, 북쪽은 두 문제를 한꺼번에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5월25일 제의 문안에도 이미 나와 있었다. 92년 남북이 합의했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남북 특사회담에서도 논의할 수 있다고 융통성 있게 밝혀놓은 것이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첫 제의에서 핵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단정지었던 것이다. 냉전적 불신에서 나온 단견과 속단이었다. 물론 이런 단정은 통일부나 외무부가 아니라 청와대에서 나왔다.
불과 100일 전 취임식에서 두 정상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핵문제를 비롯한 남북간 모든 현안을 해결하자고 천명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바로 그 정신을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괴이한 역설이 아닌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새 술을 새 부대가 아닌 헌 부대에 담았으니 술이 새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이야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 프로그램을 국민들이 뜨겁게 지지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의 새 술이 통일과 평화 분야에서 새게 되면 개혁 전반에 대해서도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청와대 근처에 있는 안가와 밀실을 헐 때 국민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물론 국민들은 집 한두 채를 헐었다고 흥분한 건 아니었다. 군부독재체제의 비정한 밀실정치, 불투명한 공포정치가 헐린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뜨겁게 박수를 쳤던 것이다. 그런데 남북관계에서는 유신 때나 군사권위주의 때와 다를 바 없는 냉전적 강경정책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물리적 안가는 헐렸지만 정신적 안가는 청와대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쏟아졌다. ‘대통령을 이렇게 보좌해도 되는 것인가? 통일 분야에서 개혁을 좌절시키고 나면 그 여세를 몰아 다른 분야에서도 개혁을 좌절시키려 할 텐데, 그렇게 되면 김영삼 정부는 실패한 정부로 기록될 텐데, 정말로 대통령을 이렇게 보좌해도 되는 것인가?’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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