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4일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처음으로 미국처럼 오픈 방식으로 진행된 이날 회견에서 그는 “핵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 발언으로 남북관계를 한층 더 경색시켰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31)
1993년 6월에 접어들자 김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 내용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2월25일 취임식 때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라는 평화 선언은 북한 당국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6월4일 ‘100일 회견’ 때 김 대통령이 “핵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 방침을 천명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대학 후배이기도 한 청와대 이경재 대변인에게 사실을 확인한 나는 그런 발언이 나온다면 남북관계를 불필요하게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통령이 직접 극단적인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소신이었기에 더욱더 이 대변인에게 신신당부했다.
만약 강경 발언을 꼭 해야 한다면 국무위원 중 안보를 전담하는 장관을 시켜야 한다. 그래야 그 발언이 몰고 올 정치적 악영향에서 대통령을 보호할 수 있다. 한편 국민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대북 온건 발언을 해야 할 때에는 국무위원 중 평화와 통일 또는 외교를 담당하는 장관을 시켜야 한다. 그래야 역시 대통령을 보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대통령이 큰 틀에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대범한 메시지를 국민들과 세계에 던질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이 대변인에게 여러 번 전화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 대변인은 잘 안된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그 표현만큼은 바꾸도록 힘써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이토록 신경을 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이 나가는 순간 북한 당국은 더 강경한 대남전술을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간 대통령의 취임사에 고무되었던 북한 당국자들은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그만큼 이제 갓 출범한 문민정부에도 지난날 군사정부들에 했던 호전적 강경 전술을 동원할 것이다. 전통적인 ‘봉남’ 정책을 더 강화할 것이고 그만큼 남북관계는 악화될 것이다.
둘째, 취임사에서 천명한 민족 당사자 원칙과 민족 상호존중 원칙이 휴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스스로 폐기하겠다고 하는 꼴이었다. 이것은 원칙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며 국민과 세계에 던진 약속과 희망을 저버리는 것과 같다.
셋째, 대통령은 주변 냉전수구세력의 손에서 앞으로 더 벗어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새 정부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문민정부와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클린턴 정부는 비교적 진보적인 민주당 정부로서, 북한과 관계를 더 넓게 보면서 긴장완화 정책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미 핵무기를 엄청나게 많이 가진 강대국들에는 침묵하면서 유독 같은 민족인 북한의 핵에 대해서만 반대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시점에서,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속단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감정적이고 신중치 못한 경솔한 발언으로 오해받기 쉽다.
다섯째, 지난 반세기 남북관계의 악화는 곧 국내정치의 반민주적 성향 강화로 이어졌다. 비민주적 정치권력일수록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고, 이를 구실로 반민주적 인권탄압을 밀고 나갔다. 따라서 스스로 문민정부를 자임하는 현 정부가 반공의 강경 깃발을 내세운다면 심각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청와대 안에서 대통령으로 하여금 이처럼 설익고 유치하기까지 한 강경 발언을 하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6월4일 결국 김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문제의 강경 발언을 하고야 말았다.
그 며칠 뒤 황인성 총리를 비롯한 통일안보 관계 장관들이 오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안타까워하면서 박관용 비서실장에게 곧바로 물었다. “그 표현을 박 실장이 넣은 것 아닙니까?”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에게 “정 박사가 했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했다. 부디 그 발언으로 남북관계가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두 사람을 다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앞으로 더욱 더 냉전적인 대결 의지를 밝혀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각계각층을 계속 실망시킬 것 같아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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