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5월14일 서울 남산의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제25회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주한 외교사절 등 1200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그는 종교인들의 개혁운동 동참과 자성을 촉구했다. 왼쪽 둘째가 필자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28
1993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 5돌 기념 인터뷰에서 가장 집중했던 질문은 ‘북한은 흡수통일에 경계심을 갖고 있는데, 정부의 입장은 어떠한가’였다.
이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 통일 이후 북한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남쪽의 냉전 보수세력은 남쪽에서 북쪽을 흡수할 수 있고, 또 흡수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북한 당국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통일원의 햇볕정책은 흡수통일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뜻임을 밝히고자 했다.
“이 기회에 북한 당국에 명백히 밝히고 싶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흡수통일을 할 의사도 없고, 필요도 느끼지 않으며, 능력도 없습니다. 흡수통일은 우리도 염려합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력을 지녔던 서독도 물에 빠져 허덕이는 형제(동독)를 건지기는 했지만 지금 둘이 같이 허덕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마 물에 빠진 형제를 건지지도 못하고 함께 떠내려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닷새 뒤인 5월20일 내방한 독일의 전 총리 슈미트도 내 견해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독일이 흡수통일로 말미암아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도 주목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독일은 동독의 재산권 문제를 놓고 200만건의 법률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독보다 경제력이 약한 한국과 북한보다 경제력이 강했던 동독의 상황을 참고한다면, 한국 정부가 절대로 북한을 흡수통일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아쉽게도 그때 김영삼 대통령은 슈미트만큼 흡수통일의 위험과 피해를 절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대담에서 내가 한 말을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그대로 인용했다. ‘흡수통일의 의지도, 흡수통일의 필요성도, 흡수통일의 능력도 모두 없다’고 말이다. 92년 대선에서 패한 뒤 영국 런던에 칩거하던 때부터 이미 흡수통일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97년 대선에서 당선된 뒤 이듬해 4월3일 영국 방문길에 런던대에서 연설을 하며 ‘햇볕정책’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역설적인 일이었다. 문민정부의 통일부총리로서 내가 처음 제안한 햇볕정책을 다음 정권인 ‘국민의 정부’에서 대북정책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세계는 김대중 대통령이 제시하는 햇볕정책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인정해주었다.
아무튼 나의 단호한 반흡수통일론은 당시 청와대 내 보수인사들로 하여금 김영삼 대통령을 대북 강경론자로 유도하고 싶은 충동을 강화한 듯했다.
그해 5월14일 김 대통령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아침 일찍 남산의 하얏트호텔에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회 각계 인사들, 주한 외교사절 등 1200명이 모였다. 조찬기도회 연설에서 김 대통령은 적절한 메시지를 보냈다.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개혁 의지는 뚜렷했고 힘이 있었다. 특히 종교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좋았다. 정부와 정치인이 도덕성 회복에 나서기 전에 종교계가 먼저 나서야 했다고 강조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 바람이 국민의 의식개혁운동으로 승화되도록 기독교인들이 적극 나서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특히 한국 개신교가 양적으로는 놀라운 성장을 했으나 그에 따른 질적 성장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못하는 타락한 기독교가 아닌지 자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자리에서 개회 기도를 맡은 나는 ‘인간의 삶과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를 제목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문에는 너무나 억울하게 그리고 너무나 오랫동안 강대국의 탐욕에 의해 분단된 조국이 이제는 평화와 정의의 꽃동산이 되길 바라는 애타는 마음을 담았다. 부패와 탐욕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가 새 정부 아래서 새 질서를 이루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했던 내 마음이기도 했다. 김 대통령이 이 소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지혜, 결단력과 겸손의 미덕을 갖추기를 바랐다. 때로 용기를 갖춘 것 같으나 때로는 지혜가 모자라는 것 같았고, 때로 결단력은 있으나 겸손이 부족한 듯하여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평화의 사도여야 할 기독교 지도층이 이 땅에서 가장 냉전적임을 가슴 아파하며 기도를 드렸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냉전 종식을 위한 기도였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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