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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김영삼 독트린’ 보고하는데 YS ‘꾸벅꾸벅’ / 한완상

등록 2012-06-18 19:43

1993년 5월초 필자는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반도의 탈냉전 시대를 여는 ‘김영삼 독트린 구상’을 보고하던 중 대통령이 조는 듯한 모습을 보고 중단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때도 조는 모습이 텔레비전 중계 화면에 잡혀 입방아에 올랐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1993년 5월초 필자는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반도의 탈냉전 시대를 여는 ‘김영삼 독트린 구상’을 보고하던 중 대통령이 조는 듯한 모습을 보고 중단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때도 조는 모습이 텔레비전 중계 화면에 잡혀 입방아에 올랐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26)
1993년 5월초 나는 그동안 통일원 자문위원인 고려대 최상룡 교수(정치학)와 두어 차례 의논했던 문제를 나름대로 정리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새 정부가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과를 내려면 무엇보다 민족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데 확실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탈냉전을 이룩하는 일이기도 했다. 엄청난 과제였다.

그런데 크게 보면 세계 역사의 흐름은 우리 편인 것 같았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어 91년 12월25일 철의 장막, 소비에트연방도 무너졌다. 이로써 세계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했다. 89년 12월초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지중해의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역사적인 선언을 했다. 비록 그 선언이 합의문으로 서명되지는 않았지만, 12월2~3일 이틀간 회담을 끝낸 두 정상은 합동 기자회견에서 세계 차원에서 냉전체제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한민족에게 그날의 선언은 감동적이기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더 뼈저리게 실감시키는 자극이기도 했다. 특히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와 명령을 나의 일차적인 임무로 받아들였기에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과업이 너무나 벅찬 사명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그렇다면 부시-고르바초프 선언이 정말로 세계적 냉전체제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일 수 있는지 한반도의 상황에서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소 냉전체제는 유럽과 미국 차원에서는 해체되었으나, 한반도에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냉전적 대결과 증오와 불신이 여전하거니와 최근에는 북한의 핵문제로 더 악화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비극적 현실에서 세계 탈냉전 선언이 확실히 지난 시대의 종막을 확인시키는 보편타당한 선언이 되려면, 반드시 한반도에서도 냉전 종식 선언이 나와야 했다. 나는 ‘김영삼-김일성 선언’이 나와야만 부시-고르바초프 선언이 완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통일과 개혁에 대한 진언’이라는 제목 아래 ‘김영삼 독트린’이라고 이름 붙인 ‘한반도 탈냉전 및 평화선언’(가칭) 문건을 만들었다.

전문에 이은 구체적인 실천사항에서는 ‘남북이 함께 실행할 냉전 해체 조처’로 △법령 개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남북 핵통제 공동위원회 즉시 가동 △남-북-미-중의 4자 회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경제적 이용 논의 등을 제시했다. ‘남쪽에서 우선 실천할 수 있는 사안’으로는 냉전체제 정치적 희생자들에 대한 사면복권 및 귀환 조처를 들었다. 발표 시기는 휴전 40돌인 올해 7월27일 또는 8월15일을 설정했다.

이어 김영삼 독트린은 총괄적 선언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남북 특사 회담으로 한반도 긴장을 일거에 해소할 것과 워싱턴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북-미 관계의 일괄타결을 적극 권장할 것도 권했다.

이를 위해 북과 공식-비공식 대화 창구를 확보할 필요성도 제안했다. 비공식 창구로는 김 대통령과 북한 당국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재야의 문익환·김관석 목사를 추천했다. 만약 독일의 윤이상씨가 문민정부를 확실히 지지한다면 그를 활용하는 방안도 가능하다고 천거했다.

사실 ‘김영삼 독트린’ 문건을 작성하기에 앞서, 나는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와 그에 따른 평화정착을 위한 과감한 정책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김 대통령이 세계 어느 지도자보다 평화를 진작시킨 지도자로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핵문제 때문에 다시 세계의 화약고로 인식되고 있는 한반도의 불안한 상황이 오히려 김 대통령을 세계적인 평화지도자로 부상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남북관계 개선으로 핵문제 해소에 기여한다면, 오늘의 한반도 위기가 노벨평화상을 받을 만한 지도력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김영삼 독트린’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그런데 문건을 보고하러 청와대로 들어갔을 때 대통령은 다소 지쳐 보였다. 간단하게 요약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짧은 시간에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탈냉전 선언을 김 대통령의 독트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려는 순간, 얼핏 보니 대통령은 조는 듯했다. 그래서 다른 기회에 다시 하기로 마음먹고 보고를 중단한 채 씁쓸한 기분으로 되돌아 나왔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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