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월22일 미국 국무부의 피터 타노프 차관(왼쪽)이 청와대를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그는 이때 북-미 일괄타결 해법을 처음 언급했으나 김 대통령과 참모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24
1993년 4월22일 오후 통일원을 예방한 피터 타노프 미 국무차관과의 대화는 약 한시간 동안 진지하게 이뤄졌다. 그는 “미국과 한국은 북한 문제에 관한 한 같은 배를 탄 운명이므로 말씀하신 점을 늘 유념하겠다”고 마무리를 했다. 나 역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었던 얘기를 했다.
“한국은 북한과 더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한국은 현재 민주적 정통성이 있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지난날과 달리 우리는 모든 점에서 떳떳하고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과거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때는 미국에 저자세를 취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한-미 동반자적 협력을 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집무실을 나서면서 타노프는 내게 지나가는 말처럼 ‘북한과의 일괄타결(패키지 딜) 해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무렵 미 국무부는 북한과 일괄타결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 안에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사람이나 부처가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 주변의 보수인사들은 일괄타결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듯했다. 북한은 채찍으로 당차게 옥죄어야 하는데, 북한과 주고받을 것을 협상 테이블에 한꺼번에 다 올려놓고 흥정한다는 것을 이념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김 대통령 역시 일괄타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만일 미국이 북한과 화끈하게 포괄적 협상을 하려 한다면, 그것도 한국 정부를 제쳐놓고 협상하려 한다면, 보수인사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며 분개할 것이고 이들이 대통령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만큼 염려가 되기도 했다. 이런 때일수록 김 대통령이 취임사의 초지와 초심으로 돌아가 북한을 껴안는 큰 마음으로 북-미 일괄타결을 미국보다 먼저 지지하면서 북-미 대화를 권고한다면 조금 더 쉽게 핵문제를 풀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대범한 제의를 한다면 북-미 모두 받아들일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북-미 대화를 펼쳐나갈 수 있고, 북한은 우리 새 정부의 대북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마음을 열 수도 있을 터였다. 새 정부는 권력 정통성을 갖춘 만큼 북-미 대화가 성공적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포용정책을 더 자신있게 펼쳐야 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는 듯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타노프 차관은 다음날 한국을 떠나며 기자회견을 했다. 하지만 북-미 일괄타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 보수세력의 정서를 의식했던 것 같다. 북-미 고위급 회담에 대해서는 언제 열릴지 모르지만, 열리게 된다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이 발효되는 시점이 6월12일이 될 것임을 북쪽에 강조하겠다고 했다. 북-미 관계 개선은 조약 탈퇴선언 철회와 함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용해야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북-미 회담은 어디까지나 유엔과 원자력기구에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보완적 성격을 갖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이 역시 한국의 보수세력을 의식한 발언으로 들렸다.
타노프가 다녀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미국 정보조사국 동북아과장인 로버트 칼린이 찾아왔다. 그는 북-미 협상이 진전되면, 남북간 상호사찰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한국 쪽에서 남북이 서로 타협할 만한 사찰 규정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의 얘기에서도 미국 정부가 북한과 좀더 포괄적인 협상을 할 것 같은 조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국무부의 한국과장인 찰스 카트먼도 남북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즈음 북한을 다녀온 국무부 북한담당관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도 미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당근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면서 팀스피릿 훈련 조정 문제를 거론했다. 나는 이처럼 대북 대응책을 놓고 여러모로 융통성 있게 고민하고 논의하는 미국의 속내를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남과 북이 민족 당사자의 원칙에 확고히 서서 한반도 평화 문제를 좀더 주도적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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