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월22일 필자가 통일원 장관 집무실에서 방한중인 미 국무부 정무차관 피터 타노프(왼쪽)를 만나 ‘북핵 문제 해법’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북-미 직접접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23
통일부총리로 취임한 지 한달 반이 지났다. 그 짧은 시간에 엄청난 일들이 한꺼번에 터졌다. 그사이 김영삼 대통령 주변에는 보수적 기운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악재는 물론 북한의 핵문제였다. 하지만 북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전에도 보수언론에서는 이미 나와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특히 <중앙일보>(3월6일치)에서는 북핵문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 당국이 ‘남북경협과 핵문제 분리’라는 내 견해에 불만을 갖고 있다며 당시 버거트 주한 미 대리대사가 공식적으로 외무부와 내게 이를 전달한 것처럼 보도했다. 더 나아가 나의 거침없는 진보적 발언으로 말미암아 외무부가 공로명 외교안보연구원장을 미국과 일본에 급파했다고 주장했다. 거기다 내 견해를 ‘민족주의적’이라고 덧칠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왜곡보도였다. 버거트 대리대사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불쾌한 언사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서로 정중히 대했다.
1993년 4월22일 오후, 전날 방한한 미 국무차관 피터 타노프 일행이 김 대통령을 예방한 뒤 나를 찾아왔다. 버거트 대리대사, 알렌 차관보좌관, 러셀 주한 미대사관 일등서기관이 동행했다. 나는 이 기회에 미국이 최근의 사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또 대응하려고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는 약 한 시간 동안 정중하고도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내용을 그날 일지에 그대로 적어두었다. 그 가운데 주요 대목을 보자.
“타노프: 미국은 핵문제 해결과 관련해 북한과 무한정 대화할 수 없는 입장인데, 한국 정부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필자: 현 상태에서 북한을 계속 고립시킬 경우 매우 비합리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크므로 우리 정부로서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게 원칙입니다. 평양 정권은 유엔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실세라고 보는 미국과 직접 협상을 희망해왔습니다. (나는 문제의 핵심을 첫 만남에서 확실하게 지적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북한과 교섭을 통해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협상의 수준은 높을수록 효과적이고, 5월말 유엔의 2차 대북결의가 채택될 때까지 횟수에 구애받지 않고 접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무엇보다 전제조건으로 대북 유인책을 제시하기보다는 함께 주고받는 형태가 바람직합니다.
타노프: 미-북간 일괄타결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필자: (나는 조금 당황해서 에둘러 얘기했다. 너무 앞서간다는 비판이 염려된 때문이었다.) 한두 가지 유인책을 먼저 제시할 수도 있고, 단계적으로 우리가 줄 수 있는 당근들을 제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북으로부터는 양보를 얻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노프: 주유엔 북한 차석대사 허종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철회를 위한 몇가지 조건을 제시했지요. (북한은 팀스피릿 훈련 영구중단, 핵 비보유국에 대한 핵무기 불사용 보장, 남한 내 군사기지 사찰 실시, 국제원자력기구의 엄정성과 중립성 회복을 요구했다.) 한·미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겠는지요?
필자: 미국에서 먼저 팀스피릿 훈련 중지는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겠으며, 핵 비보유국에 대한 핵무기 불사용 보장도 검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타노프: 왜 북한이 팀스피릿 훈련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요?
필자: 북한은 팀스피릿 훈련을 핵무기를 탑재한 비행기와 항공모함 등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으로 보고 대단한 위협을 느끼고 있지요. 이에 대응하려면 엄청난 군사동원을 해야 하고 많은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하니까요.
타노프: 그렇다면 팀스피릿 훈련 대신에 규모를 줄여 장기적인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어떤지요?
필자: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한-미 안보태세를 위해 정기적으로 적절한 규모의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필자: 원시 단계이긴 하지만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을 거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타노프: 우리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추가 사찰을 요구한 곳도 바로 플루토늄 재처리물 적재 장소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지요. 한국 정부도 이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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