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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평양에서 온 전언 “핵과 경협 연계말라” / 한완상

등록 2012-06-12 19:36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지역 총무로 여러 차례 북한을 다녀온 박경서 목사(오른쪽)가 92년 1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왼쪽)과 오찬을 나누며 건배를 하고 있다. 93년 4월초에도 북한을 방문한 그는 직후 필자를 찾아와 여러 정보를 전해주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지역 총무로 여러 차례 북한을 다녀온 박경서 목사(오른쪽)가 92년 1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왼쪽)과 오찬을 나누며 건배를 하고 있다. 93년 4월초에도 북한을 방문한 그는 직후 필자를 찾아와 여러 정보를 전해주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22)
1993년 4월20일 오전 9시 통일관계 장관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이제까지 해오던 대북 물자교역과 임가공 무역은 허용하되 북핵 문제가 풀릴 때까지 남북의 본격적인 경제협력과 이를 위한 기업인의 방북은 유보하기로 했다.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나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은 이미 북한 당국과 소통하면서 상당한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터라 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사실 남북의 불신과 대결을 극복하는 데는 정치적 교류보다 경제적 교류와 협력이 더 효과적이다. 핵문제 때문에 계속해서 경제협력 통로를 막는다는 것은 적게 얻고 크게 잃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이런 때일수록 경제적 차원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막힌 관계를 뚫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김영삼 정부의 통일 및 대북정책에서 새로움을 기대한 국민들이 실망할 것이 뻔했다.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데, 냉전 불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이 새 정부 핵심에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그날 점심 무렵에는 한국교회협의회 총무 권호경 목사가 세계교회협의회 박경서 박사와 함께 찾아왔다. 박 박사는 제네바에 근무하면서 북한 기독교 대표들을 자주 만났다. 그는 세계교회협의회 간부 자격으로 평양도 가끔 방문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4월2일부터 6일까지 북한을 방문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김철진씨를 만났는데 그 결과를 보고하겠다고 했다.

박 박사의 전언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가 있었다. 평양 당국은 “김 대통령이 취임 이후 냉전수구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했다. 새 정부가 군부와 보수세력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면서 정상회담은 김 대통령이 정국을 확실히 장악한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단다. 또 남한 당국이 북-미, 북-일 관계 개선에 힘써줄 것을 기대한다면서 새 정부는 핵문제를 남북 경제협력과 연계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해왔다. 한편 북에서는 이미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며 김정일 세력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을 들려주었다. 정무원 쪽에 포진한 김정일 계열은 대체로 실용주의적인 기술관료들인 데 비해 당 쪽은 대체로 강경파이며, 군부 내 세력은 확실한 강경파라고 했다.

북한 당국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솔직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말로 김 대통령이 수구냉전세력으로부터 공격받지 않길 바랐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인모씨 북송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강경한 군부와 당 간부들이 그날 탈퇴 선언을 하기로 오래전에 결정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우리가 조건 없는 북송을 발표하자마자 그런 강경 조처를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단 말인가. 특히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를 읽고 감동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탈퇴 선언이 김 대통령이나 통일 부총리인 내게 엄청난 족쇄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보고를 듣는 내내 이런 의문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사실 북의 그런 탈퇴 선언 같은 악재가 없었다면, 새 정부가 북-미나 북-일 관계 개선에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노태우 정부 때 북방외교를 추진하면서 모스크바·베이징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평양이 워싱턴·도쿄와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힘쓰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나는 노태우 정부보다 더 평화지향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새 정부의 사명이라 믿었기에, 미국과 관계 개선을 바라는 평양의 요구를 적극 수용했을 것이다. 김 대통령도 어떻게든 북한을 고립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당혹감과 분노가 함께 끓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언젠가 북한 고위층을 만난다면 꼭 이 문제를 따져보리라 다짐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여하튼 박 박사 일행의 수고를 나는 고맙게 생각했다. 기독교가 평화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기독교가 아니라고 확신하기에 나는 한국교회협의회나 세계교회협의회가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항상 경의를 표한다. 예수께서 평화를 만드는 자에게 가장 큰 축복을 내리신 것을 나는 기독교의 가장 큰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고 믿는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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