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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미·중 등거리 외교론’ 보도되자 떠들석 / 한완상

등록 2012-06-11 19:33

문민정부 초기 외교정책 개혁을 내건 황병태 주중대사의 이른바 ‘미-중 등거리 외교론’ 역시 친미·보수 세력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사진은 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 부부의 중국 방문 때 황 대사(가운데)가 수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민정부 초기 외교정책 개혁을 내건 황병태 주중대사의 이른바 ‘미-중 등거리 외교론’ 역시 친미·보수 세력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사진은 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 부부의 중국 방문 때 황 대사(가운데)가 수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21)
1993년 4월8일 오전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무회의는 국가 주요 현안을 놓고 국무위원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가 아니었다. 물론 진지한 토론도 없었다. 장관들마저도 국무위원이라는 자기인식은 없고 자기 부처의 이해만 대변하려고 했다. 그마저 장관들은 미리 차관회의에서 합의한 내용을 부하들이 작성한 시나리오대로 읽기만 했다. 사회를 보는 총리도 비서실에서 써준 각본대로 읽고 회의봉을 두드리기만 했다. 그래서 국무회의를 하고 나면 허무해질 때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부총리는 스케줄의 노예였다. 빡빡하게 짜인 일정에 따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쓸데없이 비싸기만 하고 맛도 별로 없는 호텔 음식을 먹어야 했다. 말꼬리 잡는 기술이 탁월한 기자들과 대화할 때는 교수 시절 자유롭게 생각하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던 때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때로는 관료들이 일부러 나를 개미 쳇바퀴 돌리듯 돌려놓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하튼 하루가 너무 벅차고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들었다. 국무위원은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는 수인(囚人) 같기도 했다.

4월9일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외공관장들이 청와대에 모여 대통령 주재 아래 회의를 했다. 김 대통령은 새 정부 들어서는 과거처럼 모국의 반민주적인 조처나 인권유린 정책 때문에 현지 정부 당국에 불려 다니며 해명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저녁 나는 시내 한 호텔에서 주미대사 한승수, 주중대사 황병태, 주러시아대사 김석규씨를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이날 나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강대국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대사들에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각별히 애써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러자 주중 황 대사가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는 서울과 워싱턴의 거리가 서울과 베이징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는데 앞으로는 이 두 거리가 같아져야 합니다.” 주미 한 대사에게는 듣기 고약한 말이었을지 몰라도 나는 내심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때만 해도 한-중 관계는 막 첫발을 뗀 어린아이 같았다. 더구나 한국전쟁 때 우리의 적성국이었기에 갓 수교한 중국을 미국과 같은 우방국으로 보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 역사의 흐름이 아시아·태평양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중국은 그 중심축으로 솟아오를 나라였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통일을 이루려면 중국의 협조가 앞으로 더 중요해지리라 확신했기에 황 대사의 이야기가 내심 반가웠다.

그런데 황 대사의 등거리 외교론은 곧바로 보수언론에 보도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적성국이었던 중국을 혈맹인 미국과 똑같이 중요한 이웃나라로 보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턱없이 경솔한 견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지금은 황 대사의 그 시각이 지극히 타당하고 적절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

당시 김 대통령도 앞으로 외교는 이념적 안보의 관점보다 실리외교적 관점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한승주 외무장관이나 한승수 주미대사는 이념지향적 인물이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대통령이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길 바랐다. 대통령의 주변에는 황 대사처럼 큰 틀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더 많아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안타까웠다.

4월17일 오전 나는 안기부를 방문했다. 사실 안기부는 통일원보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었고, 통일원의 자금줄을 조일 수도 있고 감사 기능을 발동시킬 수도 있었다. 이렇듯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다 보니 통일원이 남북관계, 특히 남북대화를 책임지고 관장하기가 어려웠다. 지난 3월 이인모씨 북송 임무를 내가 직접 지휘를 한 것도 두 부처 간에 힘의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이었다. 그러니 안기부 핵심 간부들로서는 나와 통일원을 오해하거나 불편해할 수도 있었다. 그 며칠 전 <한겨레>의 ‘통일원, 북한 정책 결정서 왜 밀리나’란 기사처럼 두 부처의 불협화음을 꼬집는 언론의 보도가 종종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찾아가 긴밀한 협조를 다지고 싶었다. 김덕 안기부장은 항상 그렇듯이 정중하고 진지했다. 남북대화 업무를 담당하는 엄익준 국장도 호의적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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