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26일 부산 사하구에 살고 있는 납북 동진호의 어로장 최종석씨의 가족을 방문한 필자(왼쪽)가 부인 김태주(오른쪽)씨와 함께 눈물짓고 있다. 필자는 이인모씨 북송을 계기로 또다른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애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5)
1993년 3월19일 이인모씨를 무사히 북송시킨 뒤 나는 이로 인해 허탈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씨 북송 논란 때마다 늘 함께 거론되던, 87년 납북된 동진호의 어로장 최종석씨의 가족들이었다.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싶었다.
3월26일 부산으로 내려갔다. 도착하니 오전 11시10분이었다. 사하구에 사는 최씨의 아내 김태주씨와 딸 우영씨 그리고 그의 형제들을 만났다. 아내 김씨는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막 대학을 졸업한 우영씨도 울었다. 따지고 보면 분단이 이들을 눈물 흘리게 하는 장본인이었다. 강대국들의 세력권 확장 욕심에 희생되어 분단에 이른 우리 민족이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 실상을 까맣게 잊고 있기에 눈물의 뿌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한으로 온 김만철씨 가족은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고향인 남해에서 잘 사는데, 정부가 우리 동진호 선원 가족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면서 최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친정아버지가 오신 것 같아 기쁩니다. 정부가 이렇게 큰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간 너무 서러웠습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동고의 소통 속에서 우리는 점심을 함께 나눴다. 그날은 내가 취임한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최씨 부부는 그날이 은혼식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 북에 있는 남편이 더 그립다고 했다. ‘이들의 아픔은 국가가 덜어주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가족의 재결합이고 민족에게는 평화통일이 절박한 꿈인데…, 꼭 이뤄져야 할 꿈인데…, 남북의 지도자들은 이런 꿈보다 서로 미워하고 대결하고 초전 박살을 내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욕심이 더 크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새삼 부끄러웠다.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힘내세요.” 나는 그 부인의 손을 잡고 위로를 건넸다. 그냥 한 말이 아니라 깊은 실존적 아픔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1980년의 지루했던 여름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나는 희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를 절감했던 일이 떠올랐다. 감옥 창살 밖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보며 부러워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감옥에 들어와 무엇이 좋다고 미소 짓고 있습니까. 무엇이 즐거워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라고 핀잔하면서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젊은 교도관도 생각났다. 자유인인 그가 갇혀 있는 나를 보고 부럽다고 했다. 갇혀 있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나의 희망이 부럽다는 뜻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우리 시대 성인과도 같은 장기려 박사를 찾아뵈었다. 그는 일찍이 예수님을 닮고 싶어 했던 의사였다. 평북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직후 평양도립병원장으로서 김일성의 맹장수술을 해준 적도 있다고 했다. 이광수 소설 <사랑>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내가 미국 망명 시절에 가까이 지낸 장혜원 컬럼비아 의대 교수의 삼촌이기도 하다. 70년대 초반 30대의 젊은 교수 시절 나는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장 박사는 그 교회 장로였다.
장 박사는 살아 있는 성자 같은 분이었다. 그가 가난한 환자에게 보여준 배려는 의학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갈릴리 예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연 그는 치료비를 낼 수 없어 고민하는 환자를 보면 밤에 몰래 찾아와 병원 문을 열어놓고 도망가게 했다. 가난이 주는 아픔과 병이 주는 고통을 모두 덜어주려 했기에 무상으로 치료를 하면서도 환자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 애를 썼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수를 닮았다.
그런데 장 박사는 이산가족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북쪽에 두고 남하한 그는 만월의 둥근 달을 보면서 ‘북쪽에 있는 아내도 저 달을 보고 있겠지’ 하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래서 동진호 가족을 만나러 부산에 가려고 작정했을 때 나는 장 박사도 꼭 뵙고 함께 아픔을 나누고 싶었다. 사실 일흔여섯의 이인모씨를 북송하기로 했을 때, 여든셋의 장 박사도 잠시나마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허락했어야 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고 실천할 수 없어 미안함만 더했다. 장 박사는 따뜻하게 내 손을 잡고 가만히 고맙다고 했다. 분단의 고통을 한 몸에 안고 산 그가 부디 장수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서울로 돌아왔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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