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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청와대 추천인사 대신 송영대씨 차관 발탁 / 한완상

등록 2012-05-31 19:47

1993년 2월26일 초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 취임한 필자가 임동원 당시 차관의 안내를 받으며 통일원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청와대의 추천을 물리고 송영대(뒷줄 오른쪽 셋째) 당시 남북대화사무국 전문위원을 새 차관으로 발탁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2월26일 초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 취임한 필자가 임동원 당시 차관의 안내를 받으며 통일원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청와대의 추천을 물리고 송영대(뒷줄 오른쪽 셋째) 당시 남북대화사무국 전문위원을 새 차관으로 발탁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4)
1993년 3월 들어 통일원은 다른 어떤 부서보다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인모씨 방북 허용을 계기로 탈냉전적 대북정책을 대담하게 제시하려 했던 나로서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문제로 정부 안팎에 잠복해 있던 냉전 기류가 활성화되면서 오히려 된서리를 맞지 않을까 염려가 컸다. 이 때문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3월15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냉전세력의 비판을 직접 받고 나니 더 불안해졌다. 중요한 건 대통령의 의지였다. 변화무쌍하게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서도 과연 그가 취임사에서 천명한 개혁 의지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지 걱정되었다. 특히 이씨를 북송하기로 결정했던 대담한 포용 의지를 계속 지켜나갈지 염려되었다.

한편으로는 통일원 간부들이 민족복리·공존공영·국민합의라는 새로운 통일정책 기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난날과 달리 남북관계 개선에 헌신할지도 내심 걱정되었다. 사실 그때까지 대학교수로서 바라본 통일원에 대한 인상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통일을 촉진하는 게 아니라 통일을 지연시키는 기관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편견이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청와대에서는 새 정부의 내각 인선 때 김영삼 후보의 통일외교분야 특보로 수고했던 정태동 박사를 통일원 차관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나는 기존의 임동원 차관을 유임시키고 싶었다. 그는 북한에 고향을 둔 군 장성 출신이었지만 외교관다운 세련됨도 갖춘 인물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대북정책을 선호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와 의욕이 강했다. 청와대에서는 임 차관에 대해 정부 안팎의 냉전수구세력이 강하게 반대한다는 이유를 들어 교체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내가 정 박사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나와 배경이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경북 태생, 서울대 출신에 통일원 밖에서 온 인물이었다. 정 박사는 외무부에서 타이 대사를 지냈다. 팔이 안으로 굽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청와대에 서울대·경상도 출신이 아닌 인물로 통일원 안에서 발탁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래서 비서실장에게 지시해 내부 후보로 올라온 3명 중에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연세대 정외과 출신에 호남 사람으로 통일원에서 20년 가까이 봉직한 인물이었다. 바로 송영대씨였다. 그때까지 서로 개인적인 교류는 전혀 없었다. 아마 그때 청와대에서 정한 차관을 거부한 국무위원은 나뿐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송 차관은 그때부터 장수 차관으로서 6명의 통일 부총리를 보좌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간과했다. 냉전근본주의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목적의식·비전·철학은 나와 비슷하거나 같아야 했다. 그 비전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내 생각과 달라도 좋다. 다를수록 서로 소통하며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목적과 비전이 다르면 통일 업무를 추진하는 데 지장이 올 수 있으니 더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다.

이른바 ‘티케이(TK) 인맥’을 피하겠다는 원칙에 매여 적절한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음을 나중에야 아프게 깨달았다. 정 박사에게는 미안하고 빚진 것 같은 느낌을 지금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3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통일원 직원들을 회의실로 모이게 했다. 통상 이런 때 장관의 훈시가 있기 마련인데, 나는 훈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새 정부의 정책 비전, 특히 통일정책의 방향을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세계사의 흐름이 이제는 아시아 쪽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었다. 서구인들이 동북아를 동쪽 구석, 즉 극동이라고 폄하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지금은 바야흐로 본동의 시대라 할 수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지역인 것이다. 그중에 한반도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본동의 중심부인 한반도가 억울하고 부당하게 분단되었다. 따라서 통일, 그것도 평화적 통일은 이 시대의 소명이다.”

나는 관료들에게 시대정신과 개혁의지를 함께 불어넣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군림하는 관료적 보스가 아니라 친근한 목민적 웃어른으로서 최선을 다해 직원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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