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15일 오전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상임위 전체회의에 앞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날 오후 외무통일위는 한승주 외무부 장관의 보고에 이어 초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인 필자가 출석한 가운데 북핵 문제 공방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3)
1993년 3월15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는 이인모씨 북송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둘러싸고 여야 의원들의 뜨거운 공방이 오갔다.
이 가운데 박찬종 의원의 질문은 경청할 만했다. 91년 11월8일 노태우 정부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서 핵연료의 농축과 재처리 시설까지 포기함으로써 우리의 핵 주권이 없어졌다고 지적한 그는 앞으로 비핵화 선언을 수정할 기회가 있다면 남북한이 모두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데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주권만 강조하다 보면 ‘우리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받기 쉬우므로 나는 그런 주장이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이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데 필요한 확실한 장치를 마련한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만하다고 대답했다. 박 의원은 자기도 바로 그런 뜻에서 한 말이라고 했다.
이날 이만섭 의원은 왜 하필 이 시점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했는지 그 배경을 물었다. 나를 괴롭히는 뼈아픈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북한 내 강경노선의 선택이 아니겠느냐고 에둘러 대답했다.
그즈음의 상황을 토대로 추론해볼 때, 북한은 소련 체제가 와해된 뒤 국제적 고립의 심화로 경제사정도 나빠지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거부함으로써 핵개발 의혹이 불거졌다. 그런 와중에 92년 중단됐던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다시 실시되자 일종의 총체적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무엇보다 팀스피릿 훈련을 미국의 심각한 핵위협으로 인식했다. 지구상에서 북한 체제에 총체적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미국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한 지도층은 미국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미국하고만 핵문제를 논의하고 싶어 했다. 따라서 역으로 미국의 핵확산 금지 정책에 도전함으로써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꺼내든 전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결단이 새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한 이 시점에 나왔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김일성 주석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김정일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강경 군부가 김정일에게 기울었다고 보았다.
실제로 3월8일 김정일은 최고 군사령관으로서 ‘명령 제0034호’를 발령했다. 팀스피릿 훈련을 북한 침공을 위한 핵전쟁의 전초전이라고 규정하고 준전시 상태를 선포한 것이다. 8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11일 북송 발표와 12일 탈퇴 선언까지 김 주석이 상황을 조절할 시간이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김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정보와 첩보를 받았던 터였기에 더더욱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국회에서 공개하기가 조심스러워 에둘러 그렇게 답했던 것이다.
조순환 의원도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했다. “팀스피릿 훈련을 놓고 핵전쟁을 위한 한-미 군사훈련으로 보는 북한의 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는 팀스피릿 훈련이 원래 미국 군부가 예산을 더 확보하려는 전략에서 시작된 것인데 여기에 남북이 모두 말려드는 것 아니냐는 조 의원의 평소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나는 북한이 팀스피릿 훈련을 북한 체제 붕괴를 꾀하는 무시무시한 핵전쟁 연습으로 믿기에 엄청난 공포심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민족 공영의 기조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가 통일원의 현안이라고 답했다.
조 의원은 이어 “이런 핵위기 때 오히려 민족 복리와 공존공영의 실현을 위해서 남북 정상회담이 더욱 필요한 것 아니냐. 나아가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에 무력제재를 가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의 국민 정서로는 남북 정상회담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공격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그때 그 대목에서 ‘미국의 군사제재는 한반도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단호하게 대응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새 정부의 기본 정책이라고 천명했어야 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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