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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YS, 취임전 장관후보 수련회 제안에 ‘펄쩍’ / 한완상

등록 2012-05-15 20:24수정 2012-05-15 22:51

1993년 2월24일 ‘김신조 사건’ 이후 경호상의 이유로 25년간 출입이 통제됐던 청와대 앞길 개방을 위해 정리 작업이 한창이다. 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즉시 이뤄진 청와대 개방은 필자를 비롯한 취임사 작성팀의 ‘변화와 개혁’ 제안에 따른 첫 조처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2월24일 ‘김신조 사건’ 이후 경호상의 이유로 25년간 출입이 통제됐던 청와대 앞길 개방을 위해 정리 작업이 한창이다. 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즉시 이뤄진 청와대 개방은 필자를 비롯한 취임사 작성팀의 ‘변화와 개혁’ 제안에 따른 첫 조처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②
1993년 1월8일께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의 요청을 받고 취임 연설문 작성에 들어간 나는 신한국의 비전과 절차를 네가지로 압축해 담고자 했다.

첫째, ‘우리’의 깨어짐에 주목했다. 민족과 국가, 사회 안에서 공동체적 유대를 맺고 있는 ‘우리’라는 끈끈한 관계가 심각하게 약화되거나 와해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급갈등·지역갈등·세대갈등·이념갈등으로 ‘우리 됨’의 공동체적 유대가 깨지는 상황에서 새 정부는 이런 구조적 갈등을 극복할 정책적 의지와 비전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땀 흘린 만큼 보상받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실력 있는 사람은 출신 학교나 출생 지역에 관계없이 성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충해야 한다. 정의를 통한 번영을 이룩하겠다는 의지와 비전이 있어야 한다.

셋째, 누구나 올곧은 소리를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운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구현해야 한다. 신바람 나게 자유로운 사회라야 국민들이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유가 넘치는 통일조국을 실현해야 한다. 임진강 나룻배로 남녘과 북녘의 형제자매가 함께 노를 저으며 왕래하고, 대동강에서 서울과 평양의 어린이가 함께 어울려 놀고, 낙동강에서 함흥 할머니와 부산 할머니가 함께 뱃노래를 부르는 새 세상의 비전을 담아내야 한다.

나는 이런 비전을 이루기 위한 개혁의 방향도 제시했다.

무엇보다 지도층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나는 ‘윗물맑히기운동’이라고 표현했다. 앞으로 다시는 총구에서 권력이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고, 돈으로 권력을 사거나 유지할 수 없게 해야 한다. 국민 앞에 항상 자신을 투명하게 개방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정치지도자들이 집권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제도와 정치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 상층부의 편법주의라는 ‘한국병’ 치유가 시급하다.

청렴한 정부만이 강력한 민주정부가 될 수 있다. 대통령중심제에서 부정부패는 언제나 대통령 주변에서 일어나기 쉬운 만큼 청와대에서는 비상한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청와대를 개방하자.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는지 투명하게 보여준다는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군대식 명칭인 ‘청와대’ 이름도 바꾸자. 전신인 경무대나 청와대의 ‘대’(臺)는 모두 국민 위에 군림하고 감독하는 특권의 자리 또는 군대 사열대라는 의미가 강했다. 나는 백성을 편안하게 인도하는 목자의 정치를 뜻하는 ‘목민관’(牧民館)을 새 이름으로 제안했다.

대통령은 청와대 안방에서 나와 민생 현장에 있어야 한다. 국민이 당하는 고통을 항상 함께 아파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친구 같은 대통령, 사랑받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취임사 작성팀에는 내가 추천한 몇사람과 대선 때 김영삼 후보를 도운 이명현·김정남·오인환·이경제·차동세씨 등이 도와주었다. 당선인의 둘째아들 현철씨가 추천한 전병민씨는 첫 모임 이후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다소 냉랭하게 대한 것도 작용한 듯싶다. 김영삼 후보 비서실장으로 수고했던 최창윤 박사(훗날 총무처 장관)가 뒷바라지를 맡아주었다.

작성팀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 에프 케네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도 두루 참고했다. 초안을 잡고 나서는 당선인과 함께 여러번 독회를 했다.

한완상 전 통일·교육 부총리
한완상 전 통일·교육 부총리
2월 즈음 나는 당선인에게 ‘신한국 창조’를 위해 취임 전에 국무위원 후보들을 모아 오리엔테이션을 하자고 제안했다. 신한국의 비전이 무엇이고, 왜 그 비전이 국정의 기본원리가 되어야 하는지 함께 토론하자고 했다. ‘윗물맑히기운동’처럼 개혁이 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면, 국무위원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선인은 펄쩍 뛰며 반대했다. 조각 인선이 미리 알려지면 언론에서 흠집을 내어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깜짝쇼’를 벌이듯 각료를 임명해야만 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고 못마땅했다.

솔직히 이때만 해도 나는 한국 언론의 입방아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한완상 전 통일·교육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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