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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유쾌한 ‘민란’씨, 야당 묶어세울 ‘죽창’ 들다

등록 2010-10-18 09:46

영화배우 문성근씨는 ‘100만 민란’의 발상을 6·2 지방선거 개표 결과를 보며 떠올렸다고 한다.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한명숙 후보 개표 방송을 지켜본 뒤, 한없이 걸으며 “어떻게 하면 2012년 선거에서 시민들이 이길까, 야권 연대만으로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다, 순간적으로 “시민들이 모여서 정치권을 압박하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종찬 선임기자 <A href="mailto:rhee@hani.co.kr">rhee@hani.co.kr</A>
영화배우 문성근씨는 ‘100만 민란’의 발상을 6·2 지방선거 개표 결과를 보며 떠올렸다고 한다.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한명숙 후보 개표 방송을 지켜본 뒤, 한없이 걸으며 “어떻게 하면 2012년 선거에서 시민들이 이길까, 야권 연대만으로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다, 순간적으로 “시민들이 모여서 정치권을 압박하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야권단일정당’ 100만 민란 운동 문성근씨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 일가의 혈관에는 동학농민군의 피가 흐르는가 보다. 문 목사는 생전에 “통일은 동학전쟁 때 못 이룬 농민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절규하곤 했다. 큰아들 문호근은 가극 <금강>의 초연 연출자였다. <금강>은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그리면서 분단의 아픔을 짚은 작품이다.

셋째아들 문성근은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 지지를 호소하며 “동학농민혁명 이후 실패로 점철된 역사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이루자”고 가는 곳마다 외쳐댔다. 그러니 문성근씨가 총선과 대선이 있는 2012년까지 야권 단일정당을 만들자며 이 운동에 ‘100만 민란’이란 불온한 이름을 붙인 건 새삼스러울 게 없는 거다.

문성근은 내친김에 더 나아간다. 다음달 13일 회원 2만명 돌파 기념 콘서트를 여는데, 장소가 우금치다. 30만명의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500명만 살아남았다는 핏빛 땅이다. 거기서 2만명이 횃불을 들고 서울로 진격하는 집체극을 벌일 거란다. 그는 아예 횃불 대신 낫을 들고 나갈 참이란다. 원한 서린 곳에서 다시 꿈틀거리며 부활하자는 것이다. 120년 전 패배의 땅이 우금치였다면, 그에게 뼈저린 실패는 2007년 대선일 수도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떨어져 숨진 부엉이바위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가 지난 8월28일 서울 대한문 앞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나눠주는 ‘100만 민란’ 회원 가입서는 동학군에게 들려주었던 죽창인 셈이다.

문씨와의 인터뷰는 14일 서울시내 커피숍에서 했다.

- 왜 하필 ‘민란’이라는 표현을 썼나요?

“백낙청 선생인가한테 설명을 드리다가 어느 순간 ‘이 운동의 성격은 민란입니다’라고 얘기했죠. 말해 놓고 보니 ‘아! 민란이 핵심이구나’라는 느낌이 확 들어. 백성이 참고 기다리다가 못 견뎌서 들고일어나는 게 민란이잖아요. 그동안 우리는 정치권 상층부의 논의, 통합, 결렬, 이런 것들을 오래 봐왔죠. 높은 분들의 선처를 기다려온 역사지. 하지만 이제는 정치권의 내부 논리나 기득권 땜에 결렬되는 걸 속수무책 지켜보지 않겠다는 거죠. 민주주의는 시민혁명을 통해서 왕족·귀족이 독점하던 것을 ‘우리도 말 좀 하자’고 뒤집은 거잖아. 정치권이 스스로 하지 않으니까 시민이 압력을 넣자, 뒤집어버리자, 민주주의에 맞는 정당을 창출하자, 이런 거죠.”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향이 있었나?


“2008년 가을에 노 후보(문씨는 노 전 대통령을 이렇게 부른다)가 찾아서 봉하에 내려갔더니, 이렇게 말해. ‘내가 왜 봉하에 내려올 결심을 했겠느냐. 열린우리당이 전국정당화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려고 했는데 공중분해돼 버려서 허망하다’라고. 유서 마지막이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야. 죽어서 비석으로라도 지역대결 구도를 넘어서려 한 거죠. 아! 그 말에 미치겠더라고. 근데 너는 뭐 배우하려고 지랄이냐, 이런 생각이 들었죠.”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해 동영상을 따러 찾아뵈었는데, 걷지를 못하시더라구. 휠체어 타고 와서 의자로 옮겨 앉아서는 민주주의 위기를 이야기해. 말하시다가 ‘어이, 성근이, 나는 이제 늙어서 싸우는 데 한계가 있으니 네가 열심히 싸워라’고 하시더라고요.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하셨다는데, ‘그 사람 지금 뭐하냐’고 비서관에게 물어보시고는 ‘네, 외국에 여행 갔습니다’라는 답변이 오면 그렇게 낙담하시고…. 그 영향을 받았죠.”

문씨는 자신이 ‘친노’로만 불리는 걸 원치 않는다. 철들고 살아온 세월을 보면 ‘친동교동’이 더 정확하단다. 실제로 그는 1976년 민주구국선언 때부터 디제이와 함께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때는 공판정에 녹음기나 필기도구를 못 가져가게 하자, 김 전 대통령의 진술을 외워 나와선, 그걸로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그는 “그땐 내가 한 줄만 더 기억해내면 그분을 살릴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80년대 후반부터 디제이가 정치하자고 권유했고, 노 후보도 같이 하자고 했지만 사양하고 살아온 게 굉장히 잘한 거야. 한 자리 하지 않았으니, 내가 지금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잖아. 행복한 거죠”라고 말했다.

- 야권 단일정당을 만들려면 제일 큰 덩치가 민주당이다. 민주당, 뭐가 문제일까요?

“민주당은 당원이 지구당위원장 하나 못 뽑는 구조죠. 당 지도부와 지구당위원장이 대의원 뽑고, 그 대의원이 지구당위원장 뽑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방식이지. 이래서는 시민의 뜻이 당 의사 결정구조나 공직자 선출에 반영될 수 없어. 87년 평민당 이후 아마 최악의 당헌·당규가 아닐까?”

“DJ는 생전에 ‘네가 열심히 싸워라’ 하셔…
노 유서 보고 ‘왜 배우하려 지랄인가’ 생각
유시민, 창당보다 민주당 안에서 싸웠어야”

- 민주당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6·2 지방선거 어떻게 이겼어요? 노 후보가 머리 짓이겨가며 죽었고, 디제이가 땡볕에 세시간 앉아 있다 갔잖아요. 오죽하면 땡볕에 갔겠냐고. 두 양반 목숨 값이야. 두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라고 자임한다면 인간의 도리로 그러면 안 되죠. 만약 민주당이 거부하고 기득권을 주장하면 공개적으로 상욕을 할 겁니다. 너희들이 인간이냐, 김대중·노무현 사진 떼라고. 민주당 당헌·당규를 유지하면 의원 될 가능성 높고, 시민에게 넘기면 불안한 자는 50명 정도밖에 안 돼. 그 50명 때문에 역사발전 못한다? 붙어보자고, 시민들하고. 우리 국민이 모여서 안 된 게 뭐가 있어요. 정권을 바꿔봤는데, 정당 기득권 한 줌 못 바꿔? 왜 돼먹지 않게 책상에 앉아서 안 된다고 그러냐고. 민주주의 하자는데 힘도 싣지 않으면서.”

-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지금 진보 대통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일정당에 합류하라는 건 가혹하지 않나요?

“허허허. 저는 선거 때마다 후보는 될 사람 찍고 정당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찍었죠. 하지만 민노당 역사만 보면 20년 가까이 되는데, 애써온 건 존중하지만, 현실을 보면 어렵죠. 민주당을 자유주의자라고 공격하면 유권자가 민노당, 진보신당으로 올 거라 믿었는데, 역사적으로 그런 적이 없어요. 서구 정치학 교과서에서는 정책과 이념에 따라 결사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서구의 역사고, 우리 같은 유일한 분단국가에서는 대체 씨알이 안 먹히는데. 국민들 눈에는 박정희 가문이 있고, 다음에 김대중·노무현 ‘가문’이 있을 뿐이야. 김대중·노무현 가문 중에 좀 센 말을 하는 분들이 민노당, 진보신당이라고 보는 거죠. 그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거냐, 아니면 집권세력으로 갈 거냐,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성장하는 방안을 찾아보자, 제안을 드리는 거지, 강요는 아니죠.”

- 친한 유시민씨의 국민참여당도 부정적입니다.

“참여당의 경우, 민주당 세력이 개혁될 가능성이 없다고 봐서 창당으로 가야 한다고 본 분들이 상당수죠. 하지만 그때 창당 추진 세력에게 ‘너희가 민주당의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는 게 우선이다’고 얘기했죠. 열린우리당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하는데, 실패한 원인을 찾아서 다시 시도해야 마땅하지. 게다가 지금은 환경이 좋아졌잖아요. 지금이 적기인데 왜 미리 포기하느냐, 이게 역사를 사는 정치인의 자세냐,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 제안문을 보니,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반성이 있던데.

“민주정부 10년은 아이엠에프에 구조조정·노동유연성 수용하겠다고 각서 쓰고 시작했어요. 그 굴레 때문에 비정규직 늘어나고 양극화 심화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선전전 펼친 건데, 국민 입장에서는 박정희식 대기업 고속성장 모델인 이명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2년 만에 이런 삽질은 안 되는구나 하고 국민들이 판단한 거 아닌가. 국민은 미래의 새로운 모델을 기다리는 거고, 그걸 민주진보 진영이 할 거라고 막연히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죠. 미래비전 제시는 전문가가 할 일이고, 지금 우리는 비전을 제시할 틀거리조차 없는 거 아냐. 그 틀을 만들자는 거죠.”

“민주당, 기득권 주장하면 공개적 욕 할것
진보신당·민노당, 분단국가선 씨알 안먹혀
노사모는 팬클럽 머물러…‘민란’ 장기계획”

- 현재 ‘100만 민란’에 2만5000명 정도 참가했다고 들었습니다. 느린 거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일단 노사모가 2000년 7월에 만들어졌는데, 1년 반 지나 회원이 7000명이었어요. 선거국면 또는 촛불국면 제외하고는 인터넷에 홈페이지 열고 회원을 모아보자는 운동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이고 가장 큰 규모야. 출발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년 봄쯤 야권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 시점이라고 국민들이 생각할 때 임계점이 올 겁니다. 삼국지 식으로 보면 한나라당이 조중동에다 방송3사 깔고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거죠. 저 아래 벌판에 야당이라는 작은 성이 다섯 개 할거하고 있고. 자기들은 벽돌집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판잣집이지. 그 광야에 시민들이 모여서 ‘야, 다 나와, 다시 털어서 큰 성 만들자’고 외치는 거죠. 그런데 성문 안 열고 그냥 있으면 2012년 패배를 향해서 째깍째깍 시계는 가고, ‘이거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끼는 분들이 좀더 늘어날 거고. 그럴 때 시민들이 폭발하는 겁니다.”

- 그래도 야권 단일정당 성사 가능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럼 이거 말고 달리 이기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 질문 자체가 허망해. 기껏 하자는 게 연립정부 약속하고 연대하자는 건데. 지도부 사이에 타협해 쪼개서 나눠 갖든가, 아니면 경선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당간 타협이 되겠어? 또 정당법상 여러 정당이 경선 못 하도록 돼 있어요. 남는 건 여론조사인데, 그게 최선의 선거운동이 될까? 은평 재보궐선거가 그 결과를 설명해주잖아요.”

- 그러면 야당들에 어떤 방법으로 압박할 건가요?

“5만명이 넘으면 야당들 당사 앞에서 촛불시위를 하겠다고 했는데, 더 생각해 봐야죠. 10만이 넘으면 당사를 포위하고 맨손으로 벽을 두들겨볼까 해요. ‘나와라! 성문을 열고 나와라’고. 성 바깥에서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듯이.”

- 사실 정치의 최전선에 서 있는 거다. 그런데 왜 참여정부에서는 정치를 하지 않았습니까?

“문목(그는 아버지를 이렇게 부른다) 때문입니다. 문목 일생에 시비 대상이 없어요. 89년 방북을 놓고 ‘노망든 노인네’부터 별 참혹한 말들이 많았지만, 그런 평가에는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죠. 그런데 87년 분열만은 간단치 않아. 87년 재야단체 32개가 모여 양김 모셔다 정책 질의하고, 29 대 3으로 디제이에 대한 비판적 지지 결론을 내렸죠. 모든 단계는 적절하게 밟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가 쓰레기통으로 간 거고. 그 부분에 대해서 문목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거죠. 그분의 삶을 생각할 때 너무 아픈 거야. 문목도 대선 뒤 통탄했지. 수녀원 들어가서 눈물로 사죄의 글을 발표했지만, 결과는 되돌릴 수 없는 거니까…. 그 양반은 없지만, 나라도 한번 더 국민에게 사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노 후보로부터 어떤 덕을 본다면 사죄가 안 되는 거지….”

- 그럼 이번에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건가요?

“허허. 시민으로서 정치참여는 의무죠. 반면 직업을 정치로 바꾸느냐는 자유의 영역에 속하고. 현재 나는 자유인인데, 저의 의무와 책임을 방기할 만큼 뻔뻔하지도 않고, 제가 스스로 단정지어서 자유를 속박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100만 민란’은 목적이 달성되면 해체되는 겁니까?

“만약 야5당이 말을 듣지 않으면 책임을 추궁해야 하니까 할 일이 있죠. 그다음 성공해서 야권 단일정당 만들고 민주정부 세워졌을 때는…. 노사모는 팬클럽으로 멈춰섰던 거거든. 2002년에 뽑아놓고 그냥 방치했던 거 아냐. 민주진보세력이 집권은 할 수 있어. 그러나 국가공동체 안에서는 여전히 약세죠. 민주정부를 지켜내고 캠페인하고 무브온 같은 형태로 지속하는 게 맞다고 봐요. 상당히 긴 기간 지속되어야 할 운동이죠. 더 무거워진 거죠.”

인터뷰/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 인터뷰를 마치고…


문성근씨
문성근씨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를 봤다. 주인공 문성근은 돈과 권력을 밝히면서도 “더러운 세상 책밖에 믿을 게 없다”며 짐짓 위선을 떠는 인물이기도 하고, 사랑하던 여제자가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보고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쓸쓸하게 뒷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옴니버스 영화라 전혀 다른 인물인데도, 솔기 하나 없이 문성근한테서 합일됐다. 영화 끝날 때까지 같은 인물이라고 착각을 했다. 아니, 진짜 문성근도 때때로 일탈을 꿈꾸고, 가끔씩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닐까 건너짚어보기도 했다.

그 정도로 통속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실제 모습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처럼 빈틈없이 지적이며 똑부러지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목사 아들이 수없이 교회를 빼먹고, 대학 때는 구름에 달 가듯이 술집을 전전해 별명이 ‘나그네’였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인터뷰 때 차고 나온 시계는 노란색이었다. 한없는 진지함 뒷면에 자유인의 장난기 어린 분방함이 숨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이 여러차례 ‘민란’의 선봉에 선 것은 문익환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때문일 게다. 그는 인터뷰 내내 그런 아버지를 ‘문목’이라고 불렀다. 제3자가 가진 경외의 시선으로 부친을 대하는 것이다. 또 ‘범접할 수 없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등의 표현으로 아버지 ‘문목’을 표현하기도 했다. 1980년대 문 목사가 하는 연설을 몇차례 들은 적이 있다. 그 가운데 20년 옥바라지를 한 장기수 부부의 결혼 주례사에서 “하루하루를 금쪽같이 살아라”고 말할 때, 그 언어적 감각과 혼이 서린 목소리에 가슴이 서늘했다. 2002년에는 머리칼이 쭈뼛해지는 문성근의 연설을 들으며 어쩔 수 없이 ‘문목’을 떠올렸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버지 연설을 들은 적이 없단다. 그렇다면 그건 유전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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