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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버림받은 진보…강기갑 의원처럼 해야”

등록 2008-04-14 22:43수정 2008-09-11 16:32

이철용
이철용
한겨레가 만난 사람 - 이철용 전 국회의원이 말하는 ‘18대 국회’
한나라 총선잔치에 진보 들러리
개혁공천이니 공심위도 정치쇼
강기갑 의원 당선이 가장 큰 수확

미화원·장애인 의원들이 희망
혼자서라도 분신 각오로 일하고
여당에도 ‘입바른’ 의원 있어야

이철용씨를 1주일 간격으로 두 차례 만났다. 18대 총선 엿새 전인 3일과 선거 이튿날(10일) 오후 4시 같은 시각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 요새는 삭발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기자가 앉자마자 냉장고에서 뽕잎차를 꺼내 왔다. 위장 췌장 비장 등에 좋다며 ….

선거 얘기가 자연스레 첫 화제가 됐다.

“이번 총선에서 강기갑 의원의 당선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는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서 자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실제로 강 의원을 한 번도 만나거나 통화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제 말로 하는 시대는 끝내야죠. 투표율이 낮아서 ‘조직표’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개혁공천이니 전략공천이니 했지만 실패라고 봅니다. 공천심의위원회도 다 쇼였다고 봐요. 마치 군대처럼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하는 건 민주화를 퇴보시키는 거지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공천이 돼야 합니다.” 그는 선거 기간 유일하게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를 찾았다고 했다. 노 의원 부인(김지선-본명 김복자)이 70~80년대 빈민운동할 때 노동운동을 하던 후배라고 한다.

“서울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한 것은 재건축, 재개발 이후 유권자 자체가 통으로 바뀐 게 큰 이유지요. 재개발 지역에는 원주민 비율이 10%도 안 되죠. (노 후보더러) 마이크 잡고 하지 말고 시장을 누비며 한 명 한 명 만나라,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이야기 해줬어요.”


희망디자이너 이철용 “빈민운동했던 정신은 끝까지 가지고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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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거 이야기는 경험담과 실명이 실리면서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한나라판이었어요. 손학규(그는 사람들 이름을 거론하면서 몇몇-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을 제외하곤 거의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로는 한나라당에 각을 세우기에는 부족했죠. 한나라당 잔치에 통합민주당은 조연이었던 겁니다. 차라리 시민단체들과 한나라당과는 정말 대립되는 신진들을 내세웠으면 참패는 안 당했다고 봐요. 그동안 독재정권 물리치느라 얼마나 고생들 했는데, 이제 완전히 다 내어준 게 아닙니까? 자칫하면 다시 지역주의로 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친박이고 무소속이고 초록은 동색이고 …. 국민들이 이명박이라는 머리도 주고 팔 다리까지 다 붙여준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과연 18대 국회가 과연 소통을 잘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소통이라는 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항상 통해야죠. 성경에 너희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이 외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통하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나옵니다. 자기 지역구보다 전체적인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당, 지역이 아니라 양심과 국민의 기대에 따라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가 18대 국회에 거는 기대는 무얼까?

“글쎄 뭐, 사실 기대는 크게 안 합니다. 그나마 강기갑 의원이 뭔가 큰일을 해줬으면 합니다. 환경미화원 출신 의원이나 지역구 전국구에서 당선된 6~7명의 장애인 출신들이 희망이라고 봅니다. 진보도 노선에 따라 갈라졌는데 아까운 인재들이 조직관리가 안 되는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죠. 하려고만 하면 단 1명이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곳이 국회입니다. 본회의장에서 분신하겠다는 각오로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여당에도 무조건 편들어 휩쓸리는 게 아니라 입바른소리 하는 의원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국회는 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는 곳이 되어야 해요.”

당선자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국회의원 임무는 간단해요. 국가 이익과 국민의 안전과 인권보장,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거예요. 지금 그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아 참 걱정이죠. 휴전선 철조망을 당장 거두지는 못하지만 천천히라도 해야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보수 일색에 버림받은 진보가 붙어있는 양상이에요.”

13대 국회의원 시절 경험이 후배의원들한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을 꺼냈더니 그는 날짜 등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국회에 가니 심신장애자 복지법이라고 돼 있더라고요. 신체 장애가 왜 능력 장애랑 같이 있느냐, 그리고 왜 또 놈 ‘자’를 쓰느냐 야단쳤지요. 81년에 유엔에서 세계장애인의 해를 선포하면서 졸속으로 만든 거였거든요. 그래서 심신장애자 복지법을 장애인 복지법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내용도 ‘할 수 있다’를 ‘해야 한다’로 바꾸고, 말하자면 개정을 한 거죠.” 장애인 고용촉진법(상) 의무 고용제 도입도 그때 한 일 중 하나라고 한다. 그는 100인 이상 사업장에 5% 고용을 주장했는데, 당시 여당인 민자당에서 500명에 1%로 하자고 해 절충해서 300명에 2%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때 노무현 이상수 이해찬 등 노동위 3총사들 덕을 봤죠. 지금까지도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다시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저는 안 합니다. 그냥 이 일 할 거에요. ‘희망디자인’(그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꼭 이렇게 불렀다) 일하고 장애인 관련 일만 할 겁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장애인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인 그는 장애인 출신 국회의원을 두고 할말이 많았다.

“디제이 때 이성재 의원이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는 그냥 정치쇼, 당 이미지 관리용이 아닌가 합니다. 아직도 모양 갖추기, 마치 디스플레이 하듯이 하죠. 여성과 장애인을 묶어서 정치쇼를 하기도 하고요. 숫자면에서는 이제 정당마다 경쟁적으로 늘었지만 옷가게처럼,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시각장애인도 공천하는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장애인) 의원을 뽑아서 훈련을 시켰으면 그냥 일회용으로만 써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4년 동안 국회대학을 겨우 졸업해서 일할 만한데 또 바꾸고 그럼 뭐예요, 장애인이 1회용 반창고도 아니고. 그런 쇼는 집어치워야죠.”

장애인의 날(4월20일)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다.

“1989~90년 한국방송공사(KBS) 자문위원 할 때였어요. 어린이 장애우를 출연시키라고 했어요. 자연스럽게 (비장애우와) 똑같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안 되고 있어요. 이 시대는 바른 말이 먹히지 않는 시대예요.”

두 번째 만나던 날, 인터뷰가 두 시간 반을 넘길즈음 50대 아주머니가 ‘통’사무실을 찾았다. 지붕이 무너져 내렸는데, 구청에서 수리 허가를 안 내줘 집 밖에 나앉게 된 사연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끝내려는데 이씨가 외국에서 망명하다 귀국한 노동운동권 인사를 떠올리며 ‘먹물’ 얘기를 꺼냈다. “먹물들은 염치가 없어요.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은 모르는 것 같아요.”

그가 헌법재판소 인근 추어탕집에 예약해 놨다며 저녁을 함께 들잔다. 통미꾸라지 추탕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그에게 덕담이라고 던졌다. “아이큐가 140이 넘으시죠?” “재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기에 아이큐는 140 이상, 행동지수는 190 이상일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 그가 한바탕 웃음으로 답했다. “하, 하, 하!”

얘기할 땐 신랄하면서도 좀처럼 화낼 줄 모르는 ‘환갑 청년’ 이철용씨와의 두 주에 걸친 인터뷰는 한바탕 웃음으로 끝났다.

첫 장애인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
빈민운동가서 인생상담가 변신

빈민운동가 출신으로 13대(1988∼92년) 서울 도봉을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용(60)씨는 요즘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통(通)이란 인생상담소를 열고 있다. 그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제가 딱 하나 해놓은 게 없어요. 다만 빈민운동을 한 게 전부인데, 이거 하나 내세울 수 있겠죠” 했다. 첫돌 전에 결핵성 관절염을 앓아 장애 3급인 그는, 현재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과 장애인총연맹ㆍ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나더러 역술가라 하지만 저는 희망을 설계하는 ‘희망 디자이너’이고 싶다”고 했다. 국회의원 시절 동료 조홍규 의원이 자신에게 ‘평지’, 이해찬 전 총리에겐 ‘풍파’란 별명을 지어줬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는 ‘싸움닭’으로 더 통했다. 그는 첫 자전적 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낼 때 필명으로 썼던 ‘이동철’로 더 알려져 있다. 동녘 ‘동’ 철학 ‘철’. 누가 지어준 게 아니라 그냥 이게 좋겠다 해서 자연스럽게 쓰게됐다고 한다. 국회의원 출마 때 본명밖에 쓸 수 없다고 해 ‘이철용’을 다시 써 둘 다 세간에 통하게 됐다고.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들어라 먹물들아> <오과부> <목동 아줌마> <10시간> 등 그의 작품들은 “현장은 나의 거룩한 스승”이라는 인생관의 산물이란 자부심이 대단하다.

글 이상기 선임기자 amigo@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영상 이규호 피디 pd295@hani.co.kr

■인터뷰 전문

이철용 전 의원 첫번째 만남 : 4월3일

빈민운동가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용(60)씨는 요즘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通’(통)이란 인생상담소를 열고 있다.그는 “운을 점치는 곳이 아니라 희망을 설계하는 곳”이 통이라고 했다. 그를 1주일 새 두 차례 만났다. 18대 총선 엿새 전(3일)과 선거가 치러진 이튿날(10일) 오후 각각 만났다.

그는 90년대 중반부터 머리가 빠져 아예 삭발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기자한테 뽕잎차를 권했다. 위장 췌장 비장 등에 좋은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뭐 이렇게 하나 완벽한 게 없어요. (의외로 단문의 대답이었다. 다소 큰 목소리는 또렷하고 발음은 표준말 그대로였다. 포천이 부친 고향으로 그는 서울 중구 필동에서 낳은 탓인 듯했다.)

-그래도 이철용을 딱 한 단어로 규정한다면.

=그 질문이 참 애매한 게.. 제가 하나 해놓은 게 없어요. 다만 빈민운동한 그게 전부인데, 아직도 빈민운동을 한 사람이다 이거 하나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럼 현재는 어떻습니까?

=다른 이들은 나를 역술가라 부르기도 하지만 저는 희망을 설계하는 희망디자이너이고 싶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이름을 붙였어요.

(그는 여기서 다시 빈민운동 하던 때 얘기를 꺼냈다)

“빈민운동을 한 때는 현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대책을 세우고, 안될 때는 같이 조직해서 액션을 취해 투쟁도 하고, 빈민운동을 하는 사람은 뭐든지 한 가지 기술이 필요합니다. 기술 없이 입만 가지고 하면 백전백패한다, 요즘에야 간판 내놓고 하지만 그때만 해도 간첩접선 하듯이 했거든요. 그때는 빨갱이 좌경으로도 많이 몰렸죠. 신설동이랑 하월곡동 중랑천 뚝방 멤버들이 박형규 목사님, 그 밑에 손학규 안성기 이장호 감독 등과 함께 했습니다. 지금은 함양에서 대안학교 하시는 허병섭 목사님도 그중 한 분이시고요.

70, 80년대 빈민운동가들은 사실 그 대접보다도 존중을 받아 야해요. 그때 참 힘들었거든요. 제가 있던 팀이 주장하던 게 항상 현장운동이었거든요. 그때 큰일도 안 했는데 간첩으로 몰려서 40일이나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죠. 그때 제2의 인혁당을 만들려고 한 거죠. 76년입니다. 박형규 목사님을 고청간첩으로 하고 그 밑에 몇 사람을 하수인으로, 나를 행동대장으로…. 그때 제가 서른하나인데, 지금은 환갑입니다.

그 무렵 낳은 큰 아들은 정민인데, 박형규 목사님이 이름을 지어주셨지요. 바른 민족, 바른 민중이라는 뜻으로 정민이라 지었어요. 연년생 둘째는 문익환 목사님이 ‘바른 민중이 있으면 바른 국가도 있어야 한다’며 정국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민주화 보상은 받으셨는지요?

=처음엔 안했어요. 그러다가 뭐가 하나 편지가 와서 후에 했죠. 저는 사건이 다양하죠. 간첩으로 몰렸을 때 40일 산 거, 철거문제로 투쟁했던 거, 77년도 전태일기념관 사건 때 등 감옥에서 한 10개월 등 이런 거 3번 들어가 산 거 다 무죄가 됐죠. 민주화 보상은 75년 선거법 위반, 전태일기념관 사건 등이 민주화로 인정됐습니다. 보상은 아직도 심의중이라고 하더군요.

-희망디자인은 언제부터 생각하셨는지요?

=원래는 79년말 YWCA사건 때 잡혀갔거든요. 그때 대학생 하나를 군인들이 얼마나 패는지 그걸 말리질 못하더라고요. 내가 그 대학생을 잡아서 빼면서 왜 대한민국 군인이 학생을 죽이냐고 도와줬는데 그러다 내가 잡혀갔어요. 그러다가 서빙고에 끌려갔는데 11명이 왔더라고요. 하여튼 살아있는 게 기적일 만큼 엄청나게 맞았어요. 옷을 다 벗겨놓고 때리는 데 말도 못해요. 갔다 와서 몸이 아주 많이 망가졌어요. 문익환 목사님이 연락이 왔는데 캐나다 교민들이 돈을 모아서 웅담을 샀다고 내 몫을 하나 잘라 주더라구요. 그 효과를 좀 봤죠. 그전까지만 해도 한의학을 우습게 알았는데. 침을 개인지도를 2년 받고 독학을 했죠. 침 가지고 빈민운동에 많이 활용을 했죠. 체침 수지침 다. 처음에 지압도 하고. 목동 철거촌에 방 하나 얻어놓고 침 놔주면서 하나하나 이야기해 나가고 했죠. 목동아줌마라는 책을 제가 쓴 게 그 이야기입니다.

그전부터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 했는데, 그 당시에도 허리 아픈 사람들 침 놔주면서 설득해나가고 함께 같이 조직해서 투쟁도 하고 했죠. 빈민운동에서 철칙은 아니지만 그렇게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게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사항이었습니다.

(그는 이 대목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기술이 있어야 실질적으로 민중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 어머니가 서른에 혼자가 되셨는데, 왜 우리 어머니는 과부가 됐을까? 제 문제도 어렸을 때부터, 요즘은 안 그렇지만 예전엔 장애인들 비하발언을 많이 했어요. 저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결핵성관절염, 요새 같으면 약 먹으면 낫지만...결핵균이 제 관절을 다 파먹었죠. 그 시절엔 놀리는 아이들도 많고, 내가 걸어가면 흉내 내는 놈들도 있고, 어른들도 쉽게 절름발이라 얘기하고, 그렇게 뭐 어릴 때 주눅 든 삶을 살았었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장애인은 비장애인이랑 팔자가 다른가, 우리 어머니가 뭐가 팔자가 달라서 내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과부가 됐는가. 어머니가 과부니까 또 혼자 사시는 분들이 모여서 얘기를 많이 해요. 근데 다들 팔자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남편복 자식복에 관한 이야기들을요. 그러면서 의문이 들었어요. 정말 기운이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던 차에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체질에 관한, 당사주에 관한 이야기들을 공부를 좀 했죠. 공부라기보다도 호기심에서, 그런데 이게 안 맞아요. 사주라는 게. 내가 내 사주를 봐도 장애인이 된다 이런 것도 없고 어머니도 혼자 서른에 과부가 된다 이런 게 없어요. 많이 불분명하고 아니면 말고 식이더라고요. 그러나 분명히 기운, 흐름은 분명히 있죠.”

계속 되는 이씨 이야기는 청산유수다.

“그러고 나서 정치하면서 잊고 살다가, 저는 정치면에서는 억울한 부분이 있죠. 그러나 뭐 그게 내 한계다 라고는 생각하죠. 그래도 내가 13대 국회서 열심히 했어요. 들어가서 보니까 국회에 장애인 편의 시설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말로하는 게 아니라 휠체어를 하나 타고 갔더니 경비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본회의장 계단에 있었더니 그때 의원들도 모시겠다고들 했죠. 며칠 만에 백 몇십명 서명을 받았죠. 88년도죠. 그때 의원회관이 신축 중이었는데 설계변경을 다 했죠.”

(어느덧 얘기는 국회의원 시절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일부 날짜를 제외하고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보니까 심신장애자복지법이라고 돼 있더라고요. 신체장애가 왜 능력장애랑 같이 있느냐, 그리고 왜 또 놈 ‘자’를 쓰느냐. 그 법이 81년에 유엔에서 세계장애인의 해를 선포하면서 졸속으로 만든 거였죠. 의무조항도 하나 없이. 그래서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그 내용들도 바꿨죠. ‘할 수 있다’를 ‘해야 한다’로 바꾸고, 말하자면 개정을 한 거죠..

장애인 복지라는 것은 동정이나 시혜적인 게 아닙니다. 장애인 문제를 사회복지 개념으로 하면 항상 공무원들은 빠져나갑니다. 인력부족 예산 타령 그래서 문화복지개념으로 가야합니다. 장애인 복지는 당연히 퍼주고 기생계층을 위한다는 게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기생계층도 아니고, 당당히 일자리를 주고 사회구성원으로서 또 문화주체자로 쓰는 것이 복지지 예산타령이냐 하고 이러냐고 맨날 싸웠죠. 당시 보건사회환경위원회에서 일했거든요. 그렇게 싸우면서 만든 게 장애인고용촉진법(상) 의무고용제이지요. 그때 제가 100인 이상 사업장에 5%를 주장했는데 민자당에서는 500명에 1%로 하자고 해요. 고용 비율을 갖고 막 싸웠죠. 지금 아직은 그 중간정도가 되죠. 그때 겨우 만든 게 300명에 2% 의무고용이지요.

그때 복지부장관도 저한테 멱살 잡히고 회의하면 뒤집어 엎어버리고, 그래서 싸움닭이란 별명을 얻었죠.

하여튼 별수를 다 쓰고 압박을 해서 그나마 그렇게 됐죠.

노동위에 가서 제안설명도 하고, 그때 노무현 이상수 이해찬 노동위 3총사들 덕을 봤죠. 참 그거 통과된 것이 지금까지도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디제이, 노무현 다 개혁 개혁 하면서 다들 그걸 안 지켰어요. 청와대는 물론이고 법무부 등 행정부처가 그 장애인 비율을 지키는 데가 없어요. 그래놓고 민간기업보고 자꾸 하라니까 말을 안 듣죠. 그냥 벌금 내고 마는 거죠. 그래서 한 때는 고용촉진공단에 몇 천억이 모인 적도 있었어요. 힘들게 장애인고용촉진법을 만들어놨는데 자꾸만 벌과금만 쌓이고 고용은 저조하고, 그게 참 안타까웠죠.”

-공천은 디제이가 주었나요?

=저는 공천이 참 이상하게 됐어요. (고려대 행정학과) 이문영 교수가 “자네 국회 한번 들어가지?” 그래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아닙니까? 아는 것도 없고, 어쿠 나는 꿈도 안 꾼다” 했죠. 문익환 목사님이 “당신 같은 사람이 국회에 가야 한다”고 해서 웃고 넘겼었죠. 그렇게 우연찮게 선거 20일 전에 공천을 받고 국회에 들어가게 됐죠. 아마 어른들이 빈민운동을 하고 이런 걸 예쁘게 봐주셨나봐요. 이문영 교수랑 문 목사가 디제이한테 찾아갔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다음 국회에서 공천이 안됐지요.

=그때 지방선거를 처음 할 때 아닙니까. 그때 공천과정 중에 제게 온 외압에 대해 무시하고 반기를 든 게 미움을 산 것 같습니다. 아마 괘씸죄였다고 봐요. 지금도 의문이 안 풀리는데 이게 아마 디제이가 해명을 해야 하는데 5공 청문회를 하는데 뭐가 이상하게 면죄부 주는 식의 청문회가 되지 않겠느냐 했는데, 아니 양민을 죽이고 피 칠을 한 저놈(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 그는 매번 적나라한 표현을 썼다)한테 면죄부를 주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첨에 (국회본회의 단상에) 나갈 때는 저놈을 때려야겠다 했는데 그래도 우리나라 정서에 전직 대통령을 때려, 하면 또 그쪽으로 동정심이 갈 것 같더라구요. 그래도 내가 국민의 대표로 국회에 왔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살인마!” 그랬죠.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990년 1월1일자로 호외가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부터 디제이가 날 며칠 찾더라구요. 들리는 소문이 안 좋더라구요. 그래서 만났는데, 디제이가 그렇게 화내는 걸 처음 봤어요. 왜 시키지 않은 짓을 하냐고. 그래서 살인마한테 살인마라고 한 게 뭔 잘못이내고 했죠. 그때 왜 그렇게 디제이가 화를 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디제이 총애가 그 한방으로 날아간 게 아닌가 합니다. 그 뒤 안 만났다가 91년도에 탈당했죠. 곧 이해찬 의원도 다다음날 탈당해 같이 기자회견했지요.

지나와서 보니 다들 불찰이 있었고, 다 애들 같은 이야기더라구요. 지금도 디제이한테 궁금한 건 내가 한 그 일이 그렇게 잘못한 것인가, 그건 아직도 모르겠어요. 지금도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왜 나한테 그렇게 야단을 쳤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렇게 정치적으로 억울한 부분이 있어요.

-정치해보니까 어떻던 가요?

=이게요, 한번하고 탈당했을 때 그만했어야 하는데 그때는 분노였죠. 내가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왜 나를 왕따를 시키나 막 오기가 생겼던 거죠. 그래서 오기가 그렇게 만든 건대. 지금 와서는 후회도 많이 돼요. 그때 오기 부리지 말고 정치를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죠. 정대철씨가 안됐어요.

로맨티스트랄까 모질지 못해서 당한 거죠. 조순형씨도 괜찮은데 막판에 나처럼 망가졌어. (그는 말 떨어지기 무섭게 박장대소했다)

-이번 총선 어떻게 될 거라고 보세요.

=한나라당이 과반수 이상은 쉽게 될 거예요. 그리고 (친박연대도) 되고 나면 합쳐질 것이고요. 종로는 박진이 될 것 같아요. 박근혜한테도 쏠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잡은 권력보다 다음 권력에 줄 대려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죠. 지금 인물이 없지 않습니까. 막상 인지도 지지도랑은 다르고 조직표라는 게 있으니까 문국현보다도 이재오, 노회찬이가 뭐 잘된다 그래도 막상 뚜껑 열어보면 한나라당이 이길 것이라 봐요.(그의 예측과 달리 문국현 후보가 이재오 후보를 눌렀다. 이에 대해 이철용씨는 이재오 후보가 친박연대, 무소속 등 적을 많이 만들어 이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니냐고 두 번째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인터뷰 시작 한 시간이 지날 즈음 그러니까 오후 다섯께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려댄다. 지지를 부탁하는 사람들 전화라고 했다. 인터뷰가 종종 끊어지자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치라는 게 나도 해보니까 참 허망한 거고, 결국은 그게 한 발자국 물러서 보면 뭐가 잘못이고 잘 된 걸 아는데, 마구 붙다보면 이성을 잃어요. 계속 타이트하게 붙고 싸우다 보면 안 보이게 되는 거죠.

기자가 슬며시 물었다.

-다시 정치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는 안합니다. 저는 그냥 이 일 할 거에요. ‘희망디자인’(그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꼭 이렇게 불렀다) 이랑 장애인 일만 할 겁니다.

-선생님 이후 장애인 출신들 가운데 국회의원이 제법 나왔지요. 누가 잘 했지요?

=이성재라고 그 사람이 잘 했어요. 디제이가 대통령출마를 했는데, 내가 (장애인 단체 등에) 떡 앉아있으니 부담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디제이가 이성재를 데려간 거죠. 어쨌거나 그 친구가 참 잘 했어요.

그리고 그 이후는 그냥 정치쇼, 당 이미지 관리용이죠. 그래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정치저질이다, 아직도 모양 갖추기 마치 디스플레이 하듯이 하죠. 휠체어나 보여주고...여성과 장애인을 또 묶어서 정치쇼를 하는 거죠. 숫자면에서는 이제 각 당마다 경쟁적으로 늘었지만 옷가게처럼,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파격적으로 시각장애인도 공천했던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장애인)의원을 뽑아서 훈련을 시켰으면 이번에 또 지역구를 줘야죠. 그냥 1회용으로만 써버리고. 4년 동안 국회대학을 겨우 졸업해서 일할 만한데 또 바꾸고 그럼 뭐예요, 이게 그냥 장애인이 1회용 반창고도 아니고. 진심으로 해나가야지 아직은 장애인 복지를 쇼, 일회용 디스플레이용으로만 쓰는 게 가슴 아프죠. 장향숙씨도 한 번 더 해야죠. 일을 할 만하면 잘라버리고 또 보여주기 위한 사람들 세우고 진정한 일꾼들을 만들어야지. 이런 식으로 정치쇼만 하고 있으니...그런 쇼는 집어치워야죠.

기자가 끼어들었다. “20일만 더 일찍 선생님을 만났어도 그분들 연임가능하였을 텐데, 아쉽네요.”

“89, 90년 KBS 자문위원을 할 때 제가 어린이 프로에 왜 장애인을 출연 안 시키느냐? 같이 출연시키고 해야 된다고 했죠. 장애인을 도움 받는 사람, 동정해야 하는 존재로만 보는 건 더 슬픈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거죠.

자연스럽게 똑같다는 것을 보여줘야죠. 똑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라. 그런데 아직도 안 돼요. 이 시대는 지금 바른 말이 먹히지 않는 시대예요.

노무현 정권도 그래요. 빈민운동했던 입장에서 판교정책 보고 참... 차라리 판교를 100% 임대로 하고 화장터 같은 혐오시설을 같이 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부동산 그렇게 난리도 안 났을 텐데, 농사짓는 사람들 쫓아내고 자기들이 앉아서 땅장사를 하고 있죠. 개혁이라는 게 뭡니까? 과거 조선시대 성호 이익도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며 토지 상한제를 주장하고 박지원, 정약용도 토지개혁을 주장했어요. 이승만 정권 초기에도 그러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후퇴해 있어요. 그러면서 개혁이라 하고 있죠. 적어도 주거문제만큼은 국민들에게 보장해야죠. 판교가 참 좋은 찬스였는데 그걸 놓친 게 참 아쉽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개혁하겠다는 놈들이, 저게 무슨 개혁을 하는가 싶어요. 장애인 문제도 그래요. 80년대 초에는 장애인해방구를 만들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어요. 정몽준씨가 울산에서 한 것처럼 그런 꿈같은 꿈을 꿔봤어요. 노무현 정권 얼치기 혁명가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진보, 개혁적인 사람들 지지로 당선됐으면 그걸 했어야죠. 핸드폰 요금인하 문제도 이명박 대통령이 하자고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때 했어야죠. 그거 하나 못 하고 이명박이 생색내니…. 말이 앞서는 정치가 문제인거죠. 노무현이 그래도 업적 하나는 있죠. 그게 뭐나면 대통령 씹어도 괜찮은 거. 대통령 비방해도 무죄인 것 말이죠.

디제이는 쇼든 아니든 어쨌든 재임기간에 금강산과 개성은 뚫었잖아요. 그게 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지금 이명박 정부, 걱정도 보통 걱정이 아니에요. 전쟁 나도 괜찮은 사람들이니까 그렇죠. 조건이 의식을 만든다고 자신의 삶의 조건이 자기의식을 만드는 거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죠. 전략적으로 해야죠. 좋은 쪽으로 흐르도록 말입니다.”

-총선 후 당선자들이 가장 먼저해야 할 것은 무얼까요?

=국회의원들의 임무는 간단해요.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과 국민의 안전과 인권 보장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는거예요. 지금 그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사람들이 참 걱정이죠. 휴전선 철조망을 당장 거두지는 못하지만 천천히라도 해야죠. 우리가 길게 보고 평화통일을 달성하려면 감정적으로 하면 안 되죠. 우리 사회는 보수 일색에 버림받은 진보가 붙는 양상이에요. 여야 모두 제정신이 아닙니다. 코메디인 것이 이상득이 되면 다 사퇴하겠다던 사람들 다 어디갔어요? 허깨비장난도 아니고. 적어도 50명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 이거 정말 희망이 없다. 누가 국회의원 말을 믿겠어요.

-정치평론 하셔도 참 잘 하시겠습니다.

=정치도 정치지만 언론이 정신차려야 해요. 보수언론이고 진보언론이고 다 마찬가지예요. 정말 이게, 아주 진실만을 제공해줘야하는 데 편향되고 왜곡된 그런 기사들 정말 문제입니다.

저는 정치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도 않지만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별로 큰 관심은 없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제일 관심 갖는 것은 무엇이지요.

=여기서 사람 만나는 거죠.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절박한 사람들이에요. 그들 말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또 같이 맞장구 쳐주는 것도 큰 일이죠. 하고자 하는 자는 방법을 찾지만 게으른 사람들은 구실만 찾죠. 내 팔자가 이렇게 더러운데 하고 빠져나갈 구실을 찾으려 하죠. 그런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점점 천민자본주의화하는 가운데서 살아남도록 해주는 게 저의 일이에요. 정치노선이 어떻고 이런 건 의미가 없죠. 배고픈 놈이 싸우는 게 무섭다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펌프질을 해주는 거죠. 동학혁명 때 넌 죽지 않을 거다 하고 부적을 등에 붙여줬던 것처럼 악착같이 살아가도록 지혜와 방법을 함께 찾고 의논해 나가는 거죠.

-선생님 사주 방식이 좀 특이하다고 들었습니다.

=칼라테라피라고 5색을 이용한 건대, 과거 사주보는 원리하고 달라요. 내가 공부 해보니까 과거 농경시대 사주시스템을 가지고 현대인들에게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어요. 집단별로 통계적으로 모아놓은 자료들을 가지고 색들을 연결시켜보는 거죠. 생년월일과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모은 결과데이터입니다. 생년월일을 보는 건 그 당시 우주의 기운을 보는 거죠. 천문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알듯이 그런 기운이죠. 근데 그걸 다 그대로 갖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죠. 거기에 행동과학처럼 이런 여러 조건들을 함께 놓고 보는 거죠. 거기에 개인 문제를 개인병리만으로가 아니라 사회병리로 함께 보는 겁니다. 존재론이 아니라 불교의 연기처럼 관계론으로 봐야죠. 살인자가 사주가 나빠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 기운은 같지만 절대적으로 가정교육이다, 사회가 썩으면 가정도 썩고, 가정이 썩으면 사회도 썩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개인의 잘못으로만 푸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유, 구실을 찾는 게 아니라 같이 넋두리를 찾는 거죠.

매춘여성들이 하루에 손님을 20명씩 받는다는데 그 친구들이 처음엔 죄인처럼 와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러면 저는 농담도 하고 그래요. 몸을 팔다 걸려 경찰 조사를 받는데 “내 아랫구멍이 아니라 내 목구멍은 어쩔 것이냐? 국가가 내 목구멍이나 신경 쓰라”고 했대요. 자본주의가 천민화가 되면 모든 사람이 장사꾼이 되는 거죠. 정치인이 국민의 행복 팔고, 목사가 예수 팔고, 중이 부처 팔고. 근데 할 게 없는 사람은 몸을 판다. 그런 사람들이랑도 기운을 가지고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러면 나갈 때 조금이라도 얼굴이 편해져서 나가죠.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양하지요? 유명인들도 오고요.

=그럼요. 정치인들은 나 당선되겠냐, 공천 받겠느냐 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리고 아흔아홉 섬 가진 놈들도 와요. 한 섬 더 가져가 백 섬 가지려고. 한 됫박도 못 가진 사람도 있고. 정권 바뀌니까 내가 이걸 계속 해야 하겠느냐, 요새는 땅이 안 팔린다는 사람들이 많이 와요. 뭐 이것저것 만물박사가 돼야죠. 사주에는 그게 언제 팔린다 어쩌고 그런 게 안나와요. 사주에 그런 게 나오면 그게 요술이죠. 사주에는 기운이 있는 거죠. 당신이 올해 기운이 좋다 하면 뭘 해도 잘 되는 거고. 기운이 상승이냐 정체냐 이런 걸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요새 또 이걸 혹세무민으로, 앉아서 허튼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죠. 삼재가 꼈다 아홉수가 있다 어쩌고 해서 그러죠. 그게 다 예전에 배고플 때 자연재해 있을 때나 사람한테 썼던 방식이죠. 부적팔고 굿하고 그런 거 자체에 현혹되면 안됩니다.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의지가 약해요.

-선생님은 기독교시죠, 모태신앙입니까?

=아니 저희 집은 원래 불교인데 74년 허병섭 목사님을 만나고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82년에 허 목사와 같이 설립한 동월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았습니다.(그의 휴대폰 번호를 누르면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원곡은 ‘어매이징 그레이스’)가 들려온다)

-어떤 인물로 기억되길 바라시니요?

=(이 물음에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이 어땠으면 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 다소 엉뚱한 답을 했다)

아들들이 무병장수하는 거 하고 남한테 손 안 벌리고 비굴하게 안 살길 바라는 거죠. 자기 앞가림 하고 살길 바랍니다. 한번도 공부하라 어쩌라 한 적은 없어요.

-인간 이철용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저는 뭐 정해놓은 것도 없구요. 오늘이 그날이다. 내가 오늘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두리라. 이 두 가지가 제가 즐겨하는 이야기죠. 우리가 착각하는 게 나는 안 죽는다는 착각들을 많이 하거든요.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악한 짓을 못하죠. 관상을 즐겨보기도 하는데 요새 애들이 관상이 좋더라고요. 느낌이 좋아요. 우리나라가 잘 될 것같은 느낌도 들어요. 저는 현장을 다니면서 많이 공부를 해요. 지금도 많이 돌아다녀요. 내가 아직 덜 성숙해서 참 나대고 했는데, 지금은 조금 철이 든 것 같아요

저는 여기 앉아서 사람을 기다리기보다는 다니면서 만나고 싶어요. 힘들어 하는 사람들한테 그냥 무턱대고 잘 될 거야 하면 잘 안 먹혀요. 근데 사주를 같이 놓고 보면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죠. 저는 좀 다른 게 막연하게 생년월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태어난 그때 우리나라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또 그 사람 부모의 생활환경 등을 같이 읽어보죠. 그걸 읽어보면 대충 그 사람의 과거가 나타나죠. 막연하게 당신 팔자가 어떻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기운을 보는 거죠.

(그는 기자를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이끌어 자신이 수집해온 자료를 보여주며 기자 생년월일을 물었다. 잠시 후 기자가 낳은 날 주변의 주요사건들이 화면에 떴다. 그는 자신의 사주 풀이방식이 이렇게 사회적 사건과 연결시켜 보는 게 특징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신내림을 받으신 건가요?

=보통 신기를 얘기 많이 하는데 그것처럼 황당한 건 없어요. 그걸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도 글을 쓸 때 교육을 받았냐 질문 받으면 나는 ‘강신문학’이라 해요. 세습문학은 교육을 받은 걸 말한다면 편지 한통 안 써본 내가 글을 쓰는 거니 이것도 약간의 강신기가 있어야 하긴 해요, 약간 엉뚱한 생각같은 거 말이죠.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람을 끝없이 사랑해야해요. 그러다 보면 뭔가 알게 되거든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과거에는 빈민운동을 하고 정치를 하다가 이제는 내가 뭐를 해야 하느냐, 길을 찾다보니까 어려운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 길에 온 거죠. 끝없는 빈민운동의 정신이랄까 목표는 하나, 사랑하는 제자를 한 명이라도 만난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그거죠. 허병섭 목사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개판으로 살았죠. 74년 그 이전 인생은 나 혼자 잘 살면 된다, 돈이 있으면 된다, 그러면서 돈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죠.

처음 허 목사님을 만났을 때 인상 깊었던 게 목사라는 말을 안 하더라고요. 그분 만나고부터는 혼자 잘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예수의 삶이 뒷골목 어느 조폭보다도 뜨겁고 활기차게 살았던 거라는 걸 깨달았죠. 저는 지금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팔자가 왔다갔다 한다, 더러운 팔자를 좋은 팔자로 만드는 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거다 라고 얘기하죠. 내가 잘 웃어도 팔자를 바꿀 수 있고, 잠만 잘 자도 팔자를 바꿀 수 있어요. 절제를 해도 팔자를 고칠 수 있고, 남들에게 많이 베풀어도 팔자를 바꿀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삼대 부자 없고 삼대 가난한 사람 없어요.

사주를 왜 보느냐, 좋은 운은 받아먹고 나쁜 운은 피해가자, 아무리 좋은 운이라도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못 먹는 거죠. 코메디언 서영춘씨가 그랬잖아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있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시듯이 아무리 좋은 운이 있어도 받을 준비가 안 돼있으면 소용없는 거죠.

운을 잡는 게 기회인데, 기회는 준비하는 자의 몫입니다. 성경의 열 처녀의 비유처럼 말이죠. 모든 길흉화복은 내가 어떻게 내 몸을 관리하느냐에 따른 겁니다. 심청이 예를 들어볼까요. 심청이는 자신의 팔자가 아니라 그 사회가 심청이를 죽였던 겁니다.

-오늘 기운이란 말씀을 꽤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기운은 바로 에너지 같은 거죠. 기독교의 성령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기진맥진, 기가 죽었다 무슨무슨 '끼'라고 하는 것들이 다 기운이죠. 기독교에서도 성령이 으뜸이듯이 기운이 정말 중요합니다.

-부흥회나 간증도 이따금 하시나요?

=국회의원 시절 교회에서 러브콜이 많았죠. 그런데 싫더라구요. 내 나이 된 사람치고 고생 안 한 사람 어디 있겠어요. 나 혼자 돋보이게 고생했다고 하는 게 별로였어요. 목사 하라는 사람도 많았는데 뭐 졸업장도 없이... 저는 책을 잘 안 읽어요. 세상이 책이에요. 성경과, 책 속의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책은 책뿐이죠. 밖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많이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책 쓰는 것도 그냥 보고서 쓰듯이 내가 다닌 이야기, 내가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쓰는 거죠.

이철용 전 의원 두번째 만남 : 4월10일

지난 10일 오후 4시, 인터뷰를 위해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전날 치러진 선거얘기가 자연스레 처음 화제로 떠올랐다.

“저는 강기갑 의원의 당선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는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라 역시 현장에서 자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강 의원을 단 한번 만나거나 전화 통화한 적도 없다고 했다) 논쟁의 달인이다 하는 사람들(그러면서 그는 손학규 대표와 김근태 의원 이름을 댔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 말로만 하는 시대는 끝내야죠. 이번 선거에선 투표율이 낮아서 ‘조직표’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특히나 개혁공천이니 전략공천이니 했지만 저는 요번 공천은 실패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천심의회도 다 쇼였다고 봐요. 마치 군대처럼 위에서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하는 건 민주화를 퇴보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공천이 돼야 합니다.” 그는 선거 기간 중 유일하게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 노원병 선거구를 찾았다고 했다. 노 의원의 부인(김지선-본명 김복자)이 70~80년대 빈민운동 할 때 그는 노동운동을 한 운동권 후배라고 했다. “서울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한 것은 재건축, 재개발 이후 유권자 자체가 통으로 바뀐 게 큰 이유라고 봅니다. 재개발 지역에는 원주민 비율이 10%도 안 되죠. 그래서 (노 후보더러) 마이크 잡고 하지 말고 시장을 누비며 한 명 한명 만나라,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이야기 해줬어요.”

그의 선거 이야기는 경험담과 실명이 실리면서 TV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느낌이 담겨있었다. “처음부터 한나라판이라서 별로 선거가 재미없었어요. 손학규(그는 사람들 이름을 거론하면서 몇몇-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을 제외하곤 거의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로는 한나라당에 각을 세우기에는 부족했죠. 한나라당 잔치에 통합민주당은 조연이었죠. 바람 분다는 게 손학규, 정동영이 나와서 부는 게 아니거든요. 차라리 시민단체들과 함께 한나라당과는 정말 대립되는 신진들을 내세웠으면 차라리 참패는 안 당했다고 봐요. 이인제 더러는 그렇게 비판들 하더니 이번에는 왜 ‘철새’ 논쟁이 없는지 이건 완전 코메디에요. 공천 떨어지고 탈당한 사람이 수십명 아닙니까. 그들이 많이 붙으니 이인제 뭐 나무랄 것도 없는 거죠. 그동안 독재정권 물리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들 했는데, 이제 완전히 다 내어준 게 아닙니까? 자칫하면 다시 지역주의로 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이제 고생길로 접어든 게 아닌가, 또 이게 왠지 오래 갈 것 같아요. 그러다 진짜 제2의 디제이가 나올 법하죠. 다시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대목에서 무척 조심스러운 듯, 달변이다 싶은 그의 말은 이내 느릿해졌다) 이제까지 과정들을 보면 이제 또 새로운 정권을 만드는 데는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나올 사람이 없잖아요. 친박이고 무소속이고 초록은 동색이고...국민들이 이명박이라는 머리도 주고 팔 다리까지 다 부쳐준 거 아닙니까.”

기자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18대 국회가 과연 소통을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소통이라는 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항상 통해야죠. 성경에 너희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이 외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통하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나옵니다. 자기 지역구보다 전체적인 국익을 우선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정당, 지역이 아니라 양심과 국민의 기대에 따라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18대 국회에 거는 기대는 무엇인지요?

=글쎄 뭐, 사실 기대는 크게 안합니다. 그나마 강기갑 의원이 뭔가 큰일을 해줬으면 합니다. 또 환경미화원 출신으로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된 분도 희망이라고 봅니다. 국회에서 싸우는 방법을 배울 거라면 내가 조언해줄 수 있습니다. 장애인의 경우 지역구와 비례대표에서 6~7명이 당선됐는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는 시점에서 당선돼 고무적입니다. 민노당이 17대에서는 그 몫을 충분히 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외치는 소리가 국민들에게까지 갈 수 있도록 기대해 봅니다. 진보도 노선에 따라 갈라졌는데 아까운 인재들이 조직관리가 안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죠. 그게 바로 국회의원의 힘입니다. 하려고만 하면 1명이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곳이 국회입니다. 본회의장에서 분신하겠다는 각오로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여당에서도 무조건 편들어 휩쓸리는 게 아니라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국회의원들은 사실 팔푼이들이에요. 자기가 잘났고, 잘났다고 해야 표 얻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스스로가 빚진 죄인들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국회는 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곳이 되어야 해요.

그는 정치얘기에 흥이 난듯하다. “그동안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진심으로 참회하고 과거를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두리뭉실 들어가 앉아있는 것을 저는 개인적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늑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정말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신뢰하지요. 그런데 국민들도 하나 착각하는 게 있어요. 국회의원은 선출직이라고 그냥 마구 씹어도 되는 줄 알아요. 그러면서 자기랑 이해관계가 걸린 구청직원이나 공무원들한테는 꼼짝 못하죠.”

기자가 “정치평론하시면 정말 잘 하시겠다”고 전번 주에 이어 다시 한마디 했다. 답도 비슷하다.

그의 답이 다소 엉뚱하다. “정치도 정치지만 언론이 정신 차려야 해요. 보수언론이고 진보언론이고 다 마찬가지에요.

정말 이게, 아주 진실만을 제공해줘야 하는데 편향되고 왜곡된 그런 기사들, 언중유골이라고 지난 번 대선이 어디 이명박의 승리입니까, 조중동의 승리지.”

화제를 바꿨다. 너무 국회얘기, 정치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갑자기 ‘한국의 대표적인 구라’들이 떠올랐다. 백기완, 황석영, 하일성...그러면서 이 선생님도 거기서 빠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대답이 곧 나왔다.

“운동권에 있을 때 우리 집에 다들 많이 왔어요. 저녁 먹고 앉아서 구라를 풀기 시작하면 다음날까지 밤을 새고 지치질 않았죠. 구라엔 세가지가 있어요. 쌩구라, 그건 팩트 중심이지요. 그리고 날구라 즉 믿거나 말거나 나오는 대로 하는 것이죠. 아마 백 선생이 여기 속할 겁니다. 왕구라는 봉이 김선달류로 소설가적이고 시적 구라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서울역에 가서 ‘평양행 기차표를 내놔라’ 하셨는데 불가능하면서도 힘이 있는, 먹히는 구라 그런 게 왕구라입니다.

제 경우는 생활구라입니다. 원고를 놓고 하는 설교가 아니라 상황설교인거죠. 여기저기서 뽑아오는 모자이크 구라는 별로 힘이 없죠.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다 나오는 지식이니까요.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직접 만져본 걸 가지고 이야기 하는 상황구라가 제일 힘이 있습니다.”

그의 입담은 타고난 듯하다. 구랏발이 정말 고수라는 생각이 인터뷰 내내 들었다. 구라를 운동으로까지 연결시키며 그의 말은 종횡무진이다.

“밑바닥이야기이면 밑바닥부터, 그래야 힘이 있어요. 구라는말의 힘이죠. 힘은 삶속에서, 현장에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운동은 집에서 아령 들고 하는 게 운동이 아니라 삶이라고 주장했죠. 현장이 아닌 곳에서 하는 운동은 관찰자 밖에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운동할 당시에는 현장운동 이외의 것에는 강한 반감을 가졌었죠.

사실 책을 쓰게 된 이유도 그렇습니다. 소설이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사실이 빠질 수가 없죠. 저는 보고서라는 개념, 밑바닥보고서 개념으로 글을 쓰죠. 81년 <들어라 먹물들아>는 단숨에 열흘 만에 쓴 책입니다. 운동할 때도 보면 의료 봉사하던 의사들이고, 배운 사람들이고 2년을 버티기가 힘들더라고요. 그저 학생시절에 감상적으로 거쳐 가는 과정인 마냥... 그래서 그 책에서 통렬하게 비판했는데 책이 나오고 금방 판매금지가 되었죠. 이화여대 교수로 미국 연수중이던 현영학 교수가 그곳에서 책을 읽다가 막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뭐 이런 이야기가 있냐고 세 번을 그렇게 던졌다고 김동완 목사님이 전해주었지요. 근데 결국 다 읽고 나서는 나를 한 번 만나야겠다 해서 김 목사와 함께 만났죠. 처음에 만나면 때려주려 했다면서 현 교수가 나를 깊게 안아주더군요. 감동 많이 받았다면서요. 민중신학에 대해 많이 느꼈단 말도 하시더군요.

지난 주 인터뷰에서 그는 국회의원 시절 자신의 별명이 싸움닭이라고 소개했다. 그에게 그것 뿐일 리가 없을 것 같았다.

“20대에는 사람들이 다 깡다구라고 불렀죠. 원래 선천적으로 장애도 있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깡을 많이 부렸기 때문이겠죠. 그러다가 교도소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전도사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국회에 들어가서는 싸움닭이니, 소란꾼이니 이름을 붙여주더군요.” 싸움닭 별명을 얻은 사연은 이렇단다. 그는 대정부 질문 가운데, 강아지니 방성구, 비녀꽂기 등 교도소 은어를 써가며 당시 법무부 장관을 질책했더니 한 기자가 찾아와서 ‘(장관이) 가까운 친척인데 좀 봐달라’고 하더란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몰아부쳤더니 다음 날부터 그 신문에서 ‘상습 소란꾼 또 발작’ 이라며 자신을 비판하더라고 했다. 그 뒤 국회에서 그의 별명은 싸움닭이 됐다.

그는 상담소 안에 세평 가량의 화실을 두고 있다. 입구엔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써있다. 자신의 작업공간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곳엔 습작한 칼라테라피와 아트테라피에 쓰일 그림들이 제법 쌓여있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것도 따로 배운 적이 없어요. 물론 책 쓰는 것도 사주보는 것도 노래도 뭐 하나 사사받은 적이 없지요. 저는 그런 식으로 줄기를 따지는 아류가 싫습니다. 원리나 율법주의만 강조하는 소수는 힘이 없죠. 열정으로 하는 것이 진짜인 것이라고 봅니다. 무슨 무슨 주의다 장르다 하는 것들은 다 우스운 것, 엮겨운 것들이죠. 자기들끼리 기득권을 누리려고들 하는 짓이지요.”

인터뷰가 두 시간 반을 넘길 즈음 50대 아주머니가 ‘통’ 사무실을 찾았다. 자신의 집 지붕이 무너져 내렸는데, 구청에서 수리허가를 안 내줘 집 밖에 나앉게 된 사연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제 인터뷰를 끝내려는 데 이씨가 외국에서 망명하다 귀국한 한 인사를 떠올리며 갑자기 ‘먹물’ 얘기를 꺼냈다. “먹물들은 염치가 없어요.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은 모르는 것 같아요. 도통 감사할 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는 헌법재판소 인근 추어탕집에 예약해놨다며 기자를 이끈다. 통미꾸라지 추탕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그에게 한마디 덕담을 했다. “아이큐가 140은 넘으시죠?” “재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기에 이 선생님 아이큐는 140 이상, 행동지수는 190 이상일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하, 하, 하”

신랄하게 얘기하면서도 좀처럼 화 안낼 것 같은 동안의 ‘환갑청년’ 이철용과의 두 주일에 걸친 인터뷰는 한바탕 웃음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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