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용
한겨레가 만난 사람 - 이철용 전 국회의원이 말하는 ‘18대 국회’
한나라 총선잔치에 진보 들러리
개혁공천이니 공심위도 정치쇼
강기갑 의원 당선이 가장 큰 수확
미화원·장애인 의원들이 희망
혼자서라도 분신 각오로 일하고
여당에도 ‘입바른’ 의원 있어야 이철용씨를 1주일 간격으로 두 차례 만났다. 18대 총선 엿새 전인 3일과 선거 이튿날(10일) 오후 4시 같은 시각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 요새는 삭발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기자가 앉자마자 냉장고에서 뽕잎차를 꺼내 왔다. 위장 췌장 비장 등에 좋다며 …. 선거 얘기가 자연스레 첫 화제가 됐다. “이번 총선에서 강기갑 의원의 당선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는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서 자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실제로 강 의원을 한 번도 만나거나 통화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제 말로 하는 시대는 끝내야죠. 투표율이 낮아서 ‘조직표’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개혁공천이니 전략공천이니 했지만 실패라고 봅니다. 공천심의위원회도 다 쇼였다고 봐요. 마치 군대처럼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하는 건 민주화를 퇴보시키는 거지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공천이 돼야 합니다.” 그는 선거 기간 유일하게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를 찾았다고 했다. 노 의원 부인(김지선-본명 김복자)이 70~80년대 빈민운동할 때 노동운동을 하던 후배라고 한다. “서울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한 것은 재건축, 재개발 이후 유권자 자체가 통으로 바뀐 게 큰 이유지요. 재개발 지역에는 원주민 비율이 10%도 안 되죠. (노 후보더러) 마이크 잡고 하지 말고 시장을 누비며 한 명 한 명 만나라,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이야기 해줬어요.”
희망디자이너 이철용 “빈민운동했던 정신은 끝까지 가지고 갈 것” [%%TAGSTORY1%%] 그의 선거 이야기는 경험담과 실명이 실리면서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한나라판이었어요. 손학규(그는 사람들 이름을 거론하면서 몇몇-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을 제외하곤 거의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로는 한나라당에 각을 세우기에는 부족했죠. 한나라당 잔치에 통합민주당은 조연이었던 겁니다. 차라리 시민단체들과 한나라당과는 정말 대립되는 신진들을 내세웠으면 참패는 안 당했다고 봐요. 그동안 독재정권 물리치느라 얼마나 고생들 했는데, 이제 완전히 다 내어준 게 아닙니까? 자칫하면 다시 지역주의로 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친박이고 무소속이고 초록은 동색이고 …. 국민들이 이명박이라는 머리도 주고 팔 다리까지 다 붙여준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과연 18대 국회가 과연 소통을 잘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소통이라는 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항상 통해야죠. 성경에 너희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이 외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통하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나옵니다. 자기 지역구보다 전체적인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당, 지역이 아니라 양심과 국민의 기대에 따라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가 18대 국회에 거는 기대는 무얼까? “글쎄 뭐, 사실 기대는 크게 안 합니다. 그나마 강기갑 의원이 뭔가 큰일을 해줬으면 합니다. 환경미화원 출신 의원이나 지역구 전국구에서 당선된 6~7명의 장애인 출신들이 희망이라고 봅니다. 진보도 노선에 따라 갈라졌는데 아까운 인재들이 조직관리가 안 되는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죠. 하려고만 하면 단 1명이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곳이 국회입니다. 본회의장에서 분신하겠다는 각오로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여당에도 무조건 편들어 휩쓸리는 게 아니라 입바른소리 하는 의원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국회는 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는 곳이 되어야 해요.” 당선자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국회의원 임무는 간단해요. 국가 이익과 국민의 안전과 인권보장,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거예요. 지금 그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아 참 걱정이죠. 휴전선 철조망을 당장 거두지는 못하지만 천천히라도 해야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보수 일색에 버림받은 진보가 붙어있는 양상이에요.” 13대 국회의원 시절 경험이 후배의원들한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을 꺼냈더니 그는 날짜 등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국회에 가니 심신장애자 복지법이라고 돼 있더라고요. 신체 장애가 왜 능력 장애랑 같이 있느냐, 그리고 왜 또 놈 ‘자’를 쓰느냐 야단쳤지요. 81년에 유엔에서 세계장애인의 해를 선포하면서 졸속으로 만든 거였거든요. 그래서 심신장애자 복지법을 장애인 복지법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내용도 ‘할 수 있다’를 ‘해야 한다’로 바꾸고, 말하자면 개정을 한 거죠.” 장애인 고용촉진법(상) 의무 고용제 도입도 그때 한 일 중 하나라고 한다. 그는 100인 이상 사업장에 5% 고용을 주장했는데, 당시 여당인 민자당에서 500명에 1%로 하자고 해 절충해서 300명에 2%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때 노무현 이상수 이해찬 등 노동위 3총사들 덕을 봤죠. 지금까지도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다시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저는 안 합니다. 그냥 이 일 할 거에요. ‘희망디자인’(그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꼭 이렇게 불렀다) 일하고 장애인 관련 일만 할 겁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장애인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인 그는 장애인 출신 국회의원을 두고 할말이 많았다. “디제이 때 이성재 의원이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는 그냥 정치쇼, 당 이미지 관리용이 아닌가 합니다. 아직도 모양 갖추기, 마치 디스플레이 하듯이 하죠. 여성과 장애인을 묶어서 정치쇼를 하기도 하고요. 숫자면에서는 이제 정당마다 경쟁적으로 늘었지만 옷가게처럼,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시각장애인도 공천하는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장애인) 의원을 뽑아서 훈련을 시켰으면 그냥 일회용으로만 써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4년 동안 국회대학을 겨우 졸업해서 일할 만한데 또 바꾸고 그럼 뭐예요, 장애인이 1회용 반창고도 아니고. 그런 쇼는 집어치워야죠.” 장애인의 날(4월20일)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다. “1989~90년 한국방송공사(KBS) 자문위원 할 때였어요. 어린이 장애우를 출연시키라고 했어요. 자연스럽게 (비장애우와) 똑같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안 되고 있어요. 이 시대는 바른 말이 먹히지 않는 시대예요.” 두 번째 만나던 날, 인터뷰가 두 시간 반을 넘길즈음 50대 아주머니가 ‘통’사무실을 찾았다. 지붕이 무너져 내렸는데, 구청에서 수리 허가를 안 내줘 집 밖에 나앉게 된 사연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끝내려는데 이씨가 외국에서 망명하다 귀국한 노동운동권 인사를 떠올리며 ‘먹물’ 얘기를 꺼냈다. “먹물들은 염치가 없어요.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은 모르는 것 같아요.” 그가 헌법재판소 인근 추어탕집에 예약해 놨다며 저녁을 함께 들잔다. 통미꾸라지 추탕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그에게 덕담이라고 던졌다. “아이큐가 140이 넘으시죠?” “재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기에 아이큐는 140 이상, 행동지수는 190 이상일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 그가 한바탕 웃음으로 답했다. “하, 하, 하!” 얘기할 땐 신랄하면서도 좀처럼 화낼 줄 모르는 ‘환갑 청년’ 이철용씨와의 두 주에 걸친 인터뷰는 한바탕 웃음으로 끝났다.
글 이상기 선임기자 amigo@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영상 이규호 피디 pd295@hani.co.kr
개혁공천이니 공심위도 정치쇼
강기갑 의원 당선이 가장 큰 수확
미화원·장애인 의원들이 희망
혼자서라도 분신 각오로 일하고
여당에도 ‘입바른’ 의원 있어야 이철용씨를 1주일 간격으로 두 차례 만났다. 18대 총선 엿새 전인 3일과 선거 이튿날(10일) 오후 4시 같은 시각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 요새는 삭발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기자가 앉자마자 냉장고에서 뽕잎차를 꺼내 왔다. 위장 췌장 비장 등에 좋다며 …. 선거 얘기가 자연스레 첫 화제가 됐다. “이번 총선에서 강기갑 의원의 당선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그는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에서 자기 문제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실제로 강 의원을 한 번도 만나거나 통화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제 말로 하는 시대는 끝내야죠. 투표율이 낮아서 ‘조직표’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개혁공천이니 전략공천이니 했지만 실패라고 봅니다. 공천심의위원회도 다 쇼였다고 봐요. 마치 군대처럼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하는 건 민주화를 퇴보시키는 거지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공천이 돼야 합니다.” 그는 선거 기간 유일하게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를 찾았다고 했다. 노 의원 부인(김지선-본명 김복자)이 70~80년대 빈민운동할 때 노동운동을 하던 후배라고 한다. “서울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한 것은 재건축, 재개발 이후 유권자 자체가 통으로 바뀐 게 큰 이유지요. 재개발 지역에는 원주민 비율이 10%도 안 되죠. (노 후보더러) 마이크 잡고 하지 말고 시장을 누비며 한 명 한 명 만나라,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이야기 해줬어요.”
희망디자이너 이철용 “빈민운동했던 정신은 끝까지 가지고 갈 것” [%%TAGSTORY1%%] 그의 선거 이야기는 경험담과 실명이 실리면서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한나라판이었어요. 손학규(그는 사람들 이름을 거론하면서 몇몇-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을 제외하곤 거의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로는 한나라당에 각을 세우기에는 부족했죠. 한나라당 잔치에 통합민주당은 조연이었던 겁니다. 차라리 시민단체들과 한나라당과는 정말 대립되는 신진들을 내세웠으면 참패는 안 당했다고 봐요. 그동안 독재정권 물리치느라 얼마나 고생들 했는데, 이제 완전히 다 내어준 게 아닙니까? 자칫하면 다시 지역주의로 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친박이고 무소속이고 초록은 동색이고 …. 국민들이 이명박이라는 머리도 주고 팔 다리까지 다 붙여준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과연 18대 국회가 과연 소통을 잘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소통이라는 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항상 통해야죠. 성경에 너희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이 외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통하지 않으면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나옵니다. 자기 지역구보다 전체적인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당, 지역이 아니라 양심과 국민의 기대에 따라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가 18대 국회에 거는 기대는 무얼까? “글쎄 뭐, 사실 기대는 크게 안 합니다. 그나마 강기갑 의원이 뭔가 큰일을 해줬으면 합니다. 환경미화원 출신 의원이나 지역구 전국구에서 당선된 6~7명의 장애인 출신들이 희망이라고 봅니다. 진보도 노선에 따라 갈라졌는데 아까운 인재들이 조직관리가 안 되는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죠. 하려고만 하면 단 1명이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곳이 국회입니다. 본회의장에서 분신하겠다는 각오로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여당에도 무조건 편들어 휩쓸리는 게 아니라 입바른소리 하는 의원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국회는 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는 곳이 되어야 해요.” 당선자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국회의원 임무는 간단해요. 국가 이익과 국민의 안전과 인권보장,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거예요. 지금 그 평화적 통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아 참 걱정이죠. 휴전선 철조망을 당장 거두지는 못하지만 천천히라도 해야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보수 일색에 버림받은 진보가 붙어있는 양상이에요.” 13대 국회의원 시절 경험이 후배의원들한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을 꺼냈더니 그는 날짜 등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국회에 가니 심신장애자 복지법이라고 돼 있더라고요. 신체 장애가 왜 능력 장애랑 같이 있느냐, 그리고 왜 또 놈 ‘자’를 쓰느냐 야단쳤지요. 81년에 유엔에서 세계장애인의 해를 선포하면서 졸속으로 만든 거였거든요. 그래서 심신장애자 복지법을 장애인 복지법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내용도 ‘할 수 있다’를 ‘해야 한다’로 바꾸고, 말하자면 개정을 한 거죠.” 장애인 고용촉진법(상) 의무 고용제 도입도 그때 한 일 중 하나라고 한다. 그는 100인 이상 사업장에 5% 고용을 주장했는데, 당시 여당인 민자당에서 500명에 1%로 하자고 해 절충해서 300명에 2%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때 노무현 이상수 이해찬 등 노동위 3총사들 덕을 봤죠. 지금까지도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다시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저는 안 합니다. 그냥 이 일 할 거에요. ‘희망디자인’(그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꼭 이렇게 불렀다) 일하고 장애인 관련 일만 할 겁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장애인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인 그는 장애인 출신 국회의원을 두고 할말이 많았다. “디제이 때 이성재 의원이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는 그냥 정치쇼, 당 이미지 관리용이 아닌가 합니다. 아직도 모양 갖추기, 마치 디스플레이 하듯이 하죠. 여성과 장애인을 묶어서 정치쇼를 하기도 하고요. 숫자면에서는 이제 정당마다 경쟁적으로 늘었지만 옷가게처럼,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시각장애인도 공천하는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장애인) 의원을 뽑아서 훈련을 시켰으면 그냥 일회용으로만 써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4년 동안 국회대학을 겨우 졸업해서 일할 만한데 또 바꾸고 그럼 뭐예요, 장애인이 1회용 반창고도 아니고. 그런 쇼는 집어치워야죠.” 장애인의 날(4월20일)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다. “1989~90년 한국방송공사(KBS) 자문위원 할 때였어요. 어린이 장애우를 출연시키라고 했어요. 자연스럽게 (비장애우와) 똑같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안 되고 있어요. 이 시대는 바른 말이 먹히지 않는 시대예요.” 두 번째 만나던 날, 인터뷰가 두 시간 반을 넘길즈음 50대 아주머니가 ‘통’사무실을 찾았다. 지붕이 무너져 내렸는데, 구청에서 수리 허가를 안 내줘 집 밖에 나앉게 된 사연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끝내려는데 이씨가 외국에서 망명하다 귀국한 노동운동권 인사를 떠올리며 ‘먹물’ 얘기를 꺼냈다. “먹물들은 염치가 없어요.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은 모르는 것 같아요.” 그가 헌법재판소 인근 추어탕집에 예약해 놨다며 저녁을 함께 들잔다. 통미꾸라지 추탕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그에게 덕담이라고 던졌다. “아이큐가 140이 넘으시죠?” “재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기에 아이큐는 140 이상, 행동지수는 190 이상일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 그가 한바탕 웃음으로 답했다. “하, 하, 하!” 얘기할 땐 신랄하면서도 좀처럼 화낼 줄 모르는 ‘환갑 청년’ 이철용씨와의 두 주에 걸친 인터뷰는 한바탕 웃음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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