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도 이슈대결도 실종…맥빠진 ‘민주주의 축제’
2002년 대선 때 ‘노사모’였던 윤상현(35·회사원)씨는 “이번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노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 동료들과 사무실에서 술집에서 인터넷에서 열심히 토론했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주변에도 대선 얘기를 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윤씨는 “사회적인 이슈도 없고, 꼭 찍어주고 싶은 후보도 없다”고 말했다.
28일 충남 아산 온양재래시장에서 만난 상인 이창식(59)씨는 “지난번에는 시장 사람들이 모여서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심지어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굴 찍어야 할지 감을 못 잡겠고, 선거 얘기도 거의 안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판에 유권자들의 참여 열기가 실종됐다. 토론과 소통이 없는 최악의 선거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유권자의 실종 현상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지지 후보를 위해 입씨름을 벌이곤 하던 동네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주요 포털사이트의 대선 섹션 방문자는 전체 방문자의 1%도 안 된다. 2002년 대선판을 뜨겁게 달궜던 인터넷 논객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중앙선관위가 28일 발표한 이번 대선 부재자 투표자수(81만755명)는 지난해 지방선거 때(89만4243명)에도 못미쳤다. 신고자가 줄어든 탓이다. 최근 “국내 정치에 관심 있다”는 국민이 10년 전 28.7%에서 13.8%로 반토막이 났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1992년 81.9%, 97년 80.7%, 2002년 70.8%로 점점 낮아진 투표율이 이번엔 더 떨어질 것으로 선관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70% 초중반대로 나타났는데, 실제 투표율은 이 수치보다 10%포인트 가량 낮아진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부채질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희한한 대선 구도가 꼽힌다. 후보가 열두 사람이나 되는데다, 각 진영의 대표선수가 누군지도 헷갈린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독주와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 제기는 오히려 ‘흥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높은 지지율이 유권자들의 열정을 반영하기보다는, ‘매력 없는’ 다른 후보들을 두드러지게 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최근 토론회에서 “유권자들은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어렵고 고통스럽다. 이런 점에서 최악의 대선”이라고 말했다.
유권자들이 ‘밥상’에 올릴 만한 이슈의 대결도 없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의 정치 개혁이냐, 이회창의 정권 교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치열했던 것과 사뭇 다르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은 “보수 진영의 ‘심판론’에 다른 이슈가 모두 묻혀 버리면서 논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정치적 의사 표현에 대한 과도한 규제가 참여민주주의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10월 말 현재 선관위가 단속한 인터넷 게시물은 6만7천건이다. 이미 2002년 대선 때의 6배가 넘는다. ‘판도라티브이’ 관계자는 “유권자들이 이미 보도된 뉴스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도 선관위에서 삭제 요청이 들어온다”고 하소연했다. 남윤인순 대선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이번 대선은 철저하게 유권자가 배제된 채 치러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영태 목포대 교수는 “정치권이 잘못하고 있는데 유권자들에게 무조건 참여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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