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누구인가
경북 포항 출신의 가난했던 소년은 ‘샐러리맨 신화’와 ‘청계천 신화’를 거쳐, 마침내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서 새로운 신화 창조를 향한 출발선에 섰다.
20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인생은, 그를 모델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둘이나 만들어졌을 정도로, 역동적이고 극적인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에는 적지 않은 오점과 상처들도 남아 있다. 결승선을 통과하려면 꼭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기도 하다.
가난 24년 청소일 해가며 공부 ‘가시밭길’
이 후보는 일제 강점기인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이충우)는 포항 흥해 출신의 목장 인부였고, 어머니(채태원)는 반야월(대구)의 과수원집 딸이었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다른 형제들처럼 ‘상’자 돌림을 따 ‘상경’으로 돼 있다. 이 후보는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태몽을 꿨다고 해서 명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말한다.
광복 직후 포항으로 돌아오던 귀국선과 함께 재산도 가라앉았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이 후보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옷감, 풀빵, 뻥튀기, 밀가루떡, 과일, 김밥, 성냥, 아이스케키 등 온갖 행상을 했다. 술도가에서 얻은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둘째형(이상득 현 국회부의장) 뒷바라지 때문에 고교 진학도 포기하려 했으나, “등록금 면제되는 동안만 다니라”는 어머니의 조건부 승낙을 받아 동지상고 야간부에 들어갔다. 전체 수석으로 고교를 마치고도 대학 진학을 할 수 없던 그는 ‘돈이 없어 중퇴하더라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겠지’라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한 참고서로 공부해,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그에게 새벽 쓰레기 치우는 일을 맡겨준 덕에 학비를 댈 수 있었다.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돼,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을 복역했다. 내란선동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 후보는 학생회장 출마에 대해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내 성격을 바꾸고 싶었다.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나를 개조하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기업 27년 초고속 승진 거쳐 46살에 회장 이 후보는 ‘내 일생의 3대 사건’으로, 좋은 어머니를 만난 것, 중학교 선생님이 야간고 입학을 권유한 것, 그리고 현대의 정주영 회장을 만난 것을 꼽는다. 현대건설 없이는 오늘의 이명박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운동권 경력 때문에 취업이 어려워지자,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써서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것으로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 후보는 입사 2년도 안 돼 대리, 5년 만인 29살에 이사, 12년 만인 35살에 사장에 오르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샐러리맨 신화’를 이뤘다. 46살에는 회장이 됐다.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인천제철 등 현대 계열사 10여곳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타이 건설현장에서 성난 인부들로부터 금고를 지켰던 일, 밤새 불도저를 해체한 뒤 조립하며 구조를 익힌 일, 현대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맞섰던 일 등이 대표적 일화들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 중국 장쩌민 전 주석, 옛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의 관계도 현대 시절 다져놓은 것이다. 이 후보는 현대건설 이사가 된 뒤인 1970년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김윤옥씨와 결혼해, 마포의 14평 새서울아파트에서 사글세로 신혼살림을 차렸다. 1990년 <한국방송>에서 방영한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현대맨 이명박’을 모델로 한 것이다. 고 정주영 회장을 잘 아는 한 원로인사는 “정 회장이 ‘원래는 내가 그 드라마 주인공인데 이명박이 자기 드라마로 만들어버렸다’며 불쾌해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정 회장의 오해였다. 단지 <야망의 세월>이 정 회장과 나의 갈등을 야기시켰고, 내가 현대를 떠나야 할 시점을 정해준 계기 중 하나가 됐다”고 술회한다. 정치 15년 잇단 구설수…청계천 살려 ‘인기’ 이 후보는 1992년 초,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주영 회장과 결별했다. 그 대신 그해 3월 여당인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정치인 이명박’은 ‘기업인 이명박’처럼 성공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1995년 서울시장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졌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에서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해 9월 김유찬 비서가 선거비용 초과 지출 사실을 폭로했다. 이 일로 1998년 의원직을 사퇴한 그는 조지워싱턴대 객원교수로 1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김유찬과의 악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후보는 1999년 말 귀국해 “사이버금융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2000년 엘케이 이뱅크, 이뱅크증권중개 등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는 비비케이 384억원 횡령 사건의 주인공 김경준을 만난 것도 이때다.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된 그는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 체계 개편, 서울숲 및 서울광장 조성 등 눈에 보이는 굵직한 성과들을 남겼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재 훼손이나 ‘밀어붙이기’라는 비판에 대해 이 후보는 “4천여회에 걸쳐 상인들을 만나 설득했다”고 반박한다. 2006년 6월30일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이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발표하면서 대선 행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1년2개월 만인 2007년 8월20일, 이 후보는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겠다”며 대선을 향한 발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 ▶ 이명박 2452표 1.5%p 차, 진 쪽도 이긴 쪽도 ‘깜짝’
▶ [대선까지 과제는] 당내 화합·검증공세 ‘시험대’
▶ [이명박 누구인가] 개발시대 성공신화 밑천 ‘야망의 세월’
▶ 여론조사서 승부 갈려…‘표 등가성’ 논란일듯
▶ “백의종군” 관망…박근혜의 선택은?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둘째형(이상득 현 국회부의장) 뒷바라지 때문에 고교 진학도 포기하려 했으나, “등록금 면제되는 동안만 다니라”는 어머니의 조건부 승낙을 받아 동지상고 야간부에 들어갔다. 전체 수석으로 고교를 마치고도 대학 진학을 할 수 없던 그는 ‘돈이 없어 중퇴하더라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겠지’라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한 참고서로 공부해,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했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그에게 새벽 쓰레기 치우는 일을 맡겨준 덕에 학비를 댈 수 있었다.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돼,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을 복역했다. 내란선동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 후보는 학생회장 출마에 대해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내 성격을 바꾸고 싶었다.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나를 개조하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기업 27년 초고속 승진 거쳐 46살에 회장 이 후보는 ‘내 일생의 3대 사건’으로, 좋은 어머니를 만난 것, 중학교 선생님이 야간고 입학을 권유한 것, 그리고 현대의 정주영 회장을 만난 것을 꼽는다. 현대건설 없이는 오늘의 이명박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운동권 경력 때문에 취업이 어려워지자,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써서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것으로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 후보는 입사 2년도 안 돼 대리, 5년 만인 29살에 이사, 12년 만인 35살에 사장에 오르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샐러리맨 신화’를 이뤘다. 46살에는 회장이 됐다.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인천제철 등 현대 계열사 10여곳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타이 건설현장에서 성난 인부들로부터 금고를 지켰던 일, 밤새 불도저를 해체한 뒤 조립하며 구조를 익힌 일, 현대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맞섰던 일 등이 대표적 일화들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 중국 장쩌민 전 주석, 옛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의 관계도 현대 시절 다져놓은 것이다. 이 후보는 현대건설 이사가 된 뒤인 1970년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김윤옥씨와 결혼해, 마포의 14평 새서울아파트에서 사글세로 신혼살림을 차렸다. 1990년 <한국방송>에서 방영한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현대맨 이명박’을 모델로 한 것이다. 고 정주영 회장을 잘 아는 한 원로인사는 “정 회장이 ‘원래는 내가 그 드라마 주인공인데 이명박이 자기 드라마로 만들어버렸다’며 불쾌해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정 회장의 오해였다. 단지 <야망의 세월>이 정 회장과 나의 갈등을 야기시켰고, 내가 현대를 떠나야 할 시점을 정해준 계기 중 하나가 됐다”고 술회한다. 정치 15년 잇단 구설수…청계천 살려 ‘인기’ 이 후보는 1992년 초,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주영 회장과 결별했다. 그 대신 그해 3월 여당인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정치인 이명박’은 ‘기업인 이명박’처럼 성공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1995년 서울시장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졌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에서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해 9월 김유찬 비서가 선거비용 초과 지출 사실을 폭로했다. 이 일로 1998년 의원직을 사퇴한 그는 조지워싱턴대 객원교수로 1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김유찬과의 악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후보는 1999년 말 귀국해 “사이버금융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2000년 엘케이 이뱅크, 이뱅크증권중개 등을 설립했다.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는 비비케이 384억원 횡령 사건의 주인공 김경준을 만난 것도 이때다.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된 그는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 체계 개편, 서울숲 및 서울광장 조성 등 눈에 보이는 굵직한 성과들을 남겼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재 훼손이나 ‘밀어붙이기’라는 비판에 대해 이 후보는 “4천여회에 걸쳐 상인들을 만나 설득했다”고 반박한다. 2006년 6월30일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이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발표하면서 대선 행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1년2개월 만인 2007년 8월20일, 이 후보는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겠다”며 대선을 향한 발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 ▶ 이명박 2452표 1.5%p 차, 진 쪽도 이긴 쪽도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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