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동서양 격언은 모두 준비와 부지런함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정치판에서는 ‘준비’가 ‘능사’가 되지 못한다.
“이미지 정치는 망국적 지역주의처럼 ‘묻지마 투표'를 조장한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정치 독초’다.”(맹형규 전 의원)
“열린우리당이 ‘춤바람’이라면 지금 한나라당은 ‘꽃미남(오세훈)’이 나와 여론이 요동치고 있다.”(홍준표 의원)
“중앙위원회의에서 경선 방식을 결정하면 그것을 토대로 내 생각을 정리하겠다.”(이계안 의원)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오세훈 전 한나라당 의원의 출마선언으로 서울시장 선거판에 ‘강풍’과 ‘오풍’이 거세다. 그러나 의원직을 내던지며 지방선거에 ‘올인’한 여야의 ‘준비된 후보’ 맹형규, 홍준표, 이계안 의원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꼴이고, ‘준비된 예비후보’들의 처지는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당내 경선을 앞두고 예비후보들은 ‘내용 없는 이미지정치’를 비판하며 “‘콘텐츠 정치’로 승부를 걸겠다”고 ‘준비된 후보론’을 내세우고 있다. 한나라당은 25일 서울시장 후보 당내 경선을, 우리당도 이달말 당내 경선을 실시할 예정이다.
의원직까지 사퇴 ‘벼랑 끝 전술’ 맹형규 “이미지 정치는 독초”
맹형규 한나라당 전 의원은 지난 1월말 “한나라당이 2007년 정권을 창출하려면 교두보인 서울시장 선거에 승리해야 한다”며 “시장후보 경선에 참여하는 모든 후보와 공정하게 경쟁하려고 기득권인 의원직을 버리겠다”고 밝혔다. 이종찬 기자
맹형규 전 의원은 의원직까지 내던지면서 서울시장 선거를 ‘대비’했다. 맹 전 의원은 지난 1월말 “한나라당이 2007년 정권을 창출하려면 교두보인 서울시장 선거에 승리해야 한다”며 “시장후보 경선에 참여하는 모든 후보와 공정하게 경쟁하려고 기득권인 의원직을 버리겠다”고 밝혔다. 의원직을 사퇴하자마자 맹 전 의원은 선거준비에 돌입했고, 당내 경쟁자인 홍준표 의원과 비방전도 마다지 않으며 한나라당 후보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그러나 맹 전 의원의 ‘벼랑끝 전술’은 오세훈 전 의원의 출마 선언으로 말 그대로 벼랑끝에 몰리게 됐다. 당 안팎에서 끊임없이 외부인사 영입론이 흘러나왔으나 오 전 의원의 가세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1순위 맹형규의 처지를 2인자로 몰아냈다.
맹 전 의원은 10일 성명을 내 “오세훈 전 의원의 경선 참여 여부는 그동안 침체하였던 당내 경선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고 국민적 관심을 높일 수 있는 윤활유가 되리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맹 전 의원은 “실용과 생산의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알맹이 없는 이미지 정치가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한다”며 “이미지 정치는 망국적 지역주의처럼 ‘묻지마 투표'를 조장한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정치 독초”라고 공격했다.
맹 전 의원은 ‘준비된 후보론’을 내세우며, 치밀하게 바닥을 다져 경선에서 조직표의 힘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분위기다. 맹 전 의원은 “오세훈 전 의원은 강금실 전 장관과 비슷한 이미지 정치 스타일”이라며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해온 콘텐츠 정리로 이미지 정치에 맞서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미지에 의존한 젊은 후보와 준비된 이명박 후보와 싸움에서 시민들은 준비된 이명박 시장을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덧붙였다.
홍준표 “‘꽃미남’ 나와 여론이 요동치고 있다”
“오세훈은 당 어려울 때 헬스클럽 선탠한 사람” 독설
홍준표 의원은 1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열린우리당이 ‘춤바람’(강금실) 이라면 지금 한나라당은 ‘꽃미남(오세훈)’이 나와 여론이 요동치고 있다”며 “보랏빛 카드 강금실 후보에 녹색카드 오세훈 전 의원이 서울시장 선거를 이미지 전쟁으로 급변시켰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당내 경쟁에서 맹형규 전 의원으로도 버거웠던 홍준표 의원은 더욱 곤경이다. 홍 의원은 특유의 독설로 대응하고 나섰다.
홍 의원은 1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열린우리당이 ‘춤바람’(강금실) 이라면 지금 한나라당은 ‘꽃미남(오세훈)’이 나와 여론이 요동치고 있다”며 “보랏빛 카드 강금실 후보에 녹색카드 오세훈 전 의원이 서울시장 선거를 이미지 전쟁으로 급변시켰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당 지도부를 향해서도 “(내가) 강금실 후보보다 11% 앞설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당 지도부와 일각에서는 후보영입을 거론했다”며 “여당의 강 후보 띄우기에 10분의 1만 해줬다면 기존 후보들이 이렇게 왜소화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홍 의원은 12일에도 “탄핵 열풍이 불었을 때, 수도이전 반대 투쟁 때, 국가보안법 투쟁 때, 당 대표부터 일반당원까지 사학법 투쟁에 엄동설한 헤맬 때 오 전 의원은 당원으로서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며 “그 때도 강남 헬스클럽에서 선탠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묻고자 한다”고 비난했다. 홍 의원은 “홍준표는 당을 위해 10년간 헌신하고 몸바쳐온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미지 정치와 콘텐츠 정치에 대항하는 ‘헌신의 정치’로 당내경선의 파고를 넘겠다는 뜻이다.
몸값오른 박진 의원은 누구와 손 잡을까?
후보들 합종연횡속 맹형규-홍준표 연대론도 모락모락
박진 한나라당 의원이 12일 오전 국회 기자실에서 서울시장 후보 당내경선 출마포기를 선언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한나라당의 또다른 경선 후보였던 박계동 의원과 박진 의원은 중도하차했다. 그러나 두 박 의원이 누구와 손을 잡느냐가 한나라당 당내 경선에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박계동 의원은 11일 경선 불참을 선언하면서 “오세훈 후보야말로 강풍을 잠재울 수 있고, 한나라당이 이기는 선거를 위한 교두보”라며 “서울시장 선거와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밑거름이 되겠다”고 오 전 의원 지지를 선언했다.
박진 의원은 12일 “한나라당의 서울 시장 선거 승리와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하려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사퇴하기에 앞서 다른 후보들과 만났다고 알려졌으나 지원활동과 관련해서는 “지금은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기”라며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것”이라고만 밝혔다. 특히 당 안팎에서 돌고 있는 ‘오세훈 선대본부장설’에 대해 “지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 결심은 서지 않았으나 박진 의원이 오 전 의원과 손을 잡으면 ‘오풍’은 더 위력적일 것으로 보인다. 박 의원은 당내 중도성향 모임인 ‘국민생각’을 이끌고 있어 당내 입지가 약한 오 전 의원이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비후보들의 줄사퇴와 합종연횡의 과정에서 ‘맹-홍 단일화’의 움직임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맹 전 의원이 한때 회장을 맡았던 의원모임인 ‘국민생각’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맹 전 의원과 홍 의원의 후보 단일화, 맹 전 의원과 박 의원의 연대 방안 등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맹 전 의원은 12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상황 변화에 조급증을 보이면서 가볍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며 “지금은 상황을 지켜볼 때”라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박근혜, 이명박 대주주는 누구 손 들어줄까?
한나라당 경선을 놓고 당의 양대 주주인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시장의 의중도 관심을 끈다. 박근혜 대표는 10일 방문한 오 전 의원에게 “원칙을 지키겠다”고 짧게 답할 뿐 격려성 발언을 일체하지 않았다. 당 대표로서 원칙을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 전 의원이 자신과 사사건건 대립한 원희룡, 정병국, 남경필 등 소장파 의원과 절친한 사이여서 오 전 의원의 정치적 입지가 확대되는 것이 박 대표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한편 이명박 시장은 오 전 의원을 크게 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장은 11일 오 전 의원을 만나 “2년간 정치 일선에서 떠나 있어 바깥에서 시정을 더 잘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며 “이 점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현직인 이 시장이 대놓고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 없지만 자신의 치적을 보호해줄 경쟁력있는 후보의 출현에 이 시장이 누구보다 반가웠을 것이다.
‘보랏빛 피멍’ 이계안 의원 “경선 참여 고민중”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6일 서울 영등포 열린우리당사에서 입당식을 하던 중 서울시장 후보 경선 경쟁자인 이계안 의원으로부터 보라색 꽃다발을 받고 있다.이종찬기자 rhee@hani.co.kr
‘준비된 후보’들의 볼멘 소리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오 전 의원의 가세로 경선 흥행이 성공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경선 구도는 맥이 빠지는 모습이다. 강 전 장관 대세론이 워낙 강한 데다 지도부가 당내 경선을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상 강 전 장관 ‘전략공천’으로 흐른 탓이다.
이 과정에서 일찌감치 출사표를 던진 이계안 의원의 가슴은 피멍이 들었다. 언론은 강 전 장관의 보랏빛 구호에 빗대 이계안 의원의 가슴은 ‘보랏빛 피멍’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이계안 의원은 국민참여 경선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후보를 사퇴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이 의원은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경선 자체를 생각지 않고 있던 지도부가 경선이 불가피해지자 경선같이 보이는 경선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돼 이러는 것”이라고 지도부에 서운함을 표시했다.
이 의원은 “중앙위원 회의에서 최종 결정에 따라 생각을 정리하겠다”며 ‘경선 참여 재검토’를 거듭 밝혔다.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회는 10일 서울시장 후보경선방안으로 기간당원 30%, 일반당원 20%, 국민여론조사 50%를 반영하는 국민참여경선 방식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으나 이 의원은 기간당원 30%, 일반당원 20%, 신청자 방식으로 모집한 일반국민선거인단 50%가 참여하는 경선을 주장하고 있다.
당의 안대로 여론조사 비율을 높이는 경선방식이 강 전 장관보다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는 이 의원에게 불리하고, 선거인단의 비율을 높여야 일찍부터 바닥을 다져온 자신의 조직표에 기대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보랏빛, 초록빛을 앞세운 이미지 열풍 속에서 일찍부터 ‘시장의 꿈’을 키워온 ‘올드보이’들이 당내 경선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 지 주목된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