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4년5개월 만에 이뤄진 북-러 정상회담은 네시간 만에 마무리됐지만, 여러 대에 걸친 우호관계가 언급되는 등 밀도는 높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의 우주기지 시설을 직접 둘러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러시아 쪽 인사에게 여러 질문을 건네고 직접 수첩에 메모도 하는 등 로켓기술에 대한 학구열을 보였다.

김 위원장은 13일 낮 1시께 정장 차림으로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 도착했다. 지난 10일 전용열차(태양호)로 평양을 출발해 3박4일 동안 철길을 달려온 김 위원장은 우주기지 인근 역에서 리무진을 타고 회담장을 찾았다. 푸틴 대통령은 외국 정상들과 회담할 때마다 상습 지각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날은 30분 전 회담 장소에 도착해 김정은 위원장을 맞이했다. 앞서 푸틴 대통령은 2019년 김 위원장과 첫 정상회담에서도 회담장에 30분 앞서 나온 바 있다.

두 정상은 공식회담에 앞서 러시아 최신 로켓인 ‘안가라’의 조립·시험동과 소유스-2 우주로켓 발사 시설, 건설 중인 안가라 발사 단지 등을 푸틴 대통령과 함께 둘러봤다. 이날 견학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해 북한 전략무기 개발을 주도하는 리병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장창하 국방과학원장, 김정식 군수공업부 부부장 등 고위 관계자들도 동행해 이번 정상회담의 성격을 가늠하게 했다.

김 위원장은 견학 내내 러시아 로켓 시설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이날 우주기지 방명록에 “첫 우주 정복자들을 낳은 로씨야(러시아)의 영광은 불멸할 것이다”라고 적어 러시아 우주기술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러시아 현지 언론 인테르팍스는 김 위원장이 연료의 특성과 발사체의 추진 원리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며, 견학 뒤에는 직접 메모를 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시엔엔(CNN)은 김 위원장이 러시아 쪽 관계자들에게 “부품까지 포함하면 (직경) 8미터인가”, “이 기지에서 발사할 수 있는 가장 큰 로켓의 추력은 얼마나 되나” 등 기술적인 세부사항에 대한 상세한 질문을 이어갔다며, 김 위원장이 “호기심 많은 학생” 같은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두 시간 가량의 정상회의 뒤 이어진 만찬은 두 정상이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는 건배사를 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푸틴 대통령은 만찬사에서 김 위원장이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과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길을 가고 있다며 “북·러의 우호 강화와 북·러 주민의 안녕을 위해” 건배를 제의했다.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의 건강을 기원”하는 건배사로 화답했다. 만찬에는 무화과와 천도복숭아를 곁들인 오리샐러드, 캄차카반도산 킹크랩으로 만든 만두, 감자·버섯을 곁들인 철갑상어와 구운 채소를 곁들인 쇠고기스테이크 등이 식탁에 올랐다.

북-러 정상회담은 만찬 뒤 김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우주기지를 떠나면서 약 4시간 만에 마무리됐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