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7월 국제공청 제2회 대회 대표증에 첨부된 증명사진. 임경석 제공
조훈은 19살 되던 해에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상하이에서 나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도로 갔다. (…) 그 후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금 결핍 때문에 학교는 단지 11개월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다. 1915년 말이었다.”1
■ 의병 투쟁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조훈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 환경에 울분을 품고서 미국행을 꿈꿨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리라. 평안남북도의 기독교 청년 가운데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조훈이 중국 상하이로 간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세 명의 학우가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장벽이 높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뱃삯도 문제려니와 출입국 서류를 마련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식민지 조선인이 미국으로 건너가려면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여권과 출국 서류, 미국 정부가 발급하는 입국비자가 있어야 했다.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지 않고서는 출입국 서류를 떼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밀입국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하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조계지가 자리잡은 대도시이자 동아시아와 유럽·북미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만 가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국 밀입국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고심 끝에 조훈이 선택한 곳은 북간도였다. 두만강 국경 너머 조선인 이주민이 수십만 명 거주하는, 그곳으로 나아갔다.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길이었다.
중국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에 있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였다. 중국 교육법상 정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지방정부 길림 동남로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개설된 학교였다. 설립 당시 지방정부 수반으로부터 3천원의 특별지원금까지 받을 정도로 합법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중국인이었다.
■ 사관생도 20살부터 30살까지…평균 24.4살
사관생도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 45%에 이르는 54명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2 최연소자는 20살이고, 연장자는 30살이었다. 오늘날 대학교 1~3학년에 해당하는 20~22살 주니어층이 15명이고, 대학교 4학년에서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23~25살 중간층이 22명이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생에 해당하는 28~30살 시니어층이 13명이었다. 평균 24.4살이었다.
나자구라는 지명은 일명 대전자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이 사관학교를 조선인들은 대전학교라고도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동림무관학교라는 호칭도 쓰였다. 나자구 사관학교를 포함한 이 명칭들은 모두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조선인들끼리 은밀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관학교를 유지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교육을 맡은 교수들이 보수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설립 과정에서 토지와 건물은 장만했지만, 생도들의 의복과 식비를 다달이 마련해야 했다.
일본 관헌의 첩보에 따르면 매달 700루블의 경비가 필요했다. 학교 당국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머지않아 재정난에 빠져들었다.
32명의 사관생도에 관한 회상기를 담고 있는 조훈 자서전 첫 쪽. 임경석 제공
1915년 12월 혹은 이듬해 3월에 결국 나자구 사관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영사관 쪽 방해 공작도 영향을 끼쳤지만 주로 자금난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 사업이 중단되는 것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조훈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이 학교의 120명 사관생도 가운데 32명이 결사를 맺고서 군사학교 재개 자금을 벌기 위해서 러시아로 갔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인 청부업자에게 고용됐다. 그는 우리를 페름현 나제진스크 공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우리를 6개월간 장작 제조공으로 채용하고, 선불금을 받고서 달아났다.”
사관생도 32명이 동맹을 맺었다는 문장에 눈길이 간다. 사관학교 재개를 위한 자금을 벌기 위해 육체노동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기꺼이 내려놓기로 작정한, 수준 높은 윤리적 행동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구체적인 성명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참가자의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예외적이다. 보기를 들면 뒷날 독립자금 조성차 일본은행 현금 수송대를 습격한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되는 임국정, 이 글의 주인공이자 뒷날 국제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는 조훈 등이다. 앞으로 언젠가 사료 여건이 개선돼서 그 외 사관생도들의 신원을 알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학교 자금 마련하려 벌목 ‘노예노동’
당시는 전시였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군수 생산을 위한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32명의 사관생도는 일자리를 찾아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아갔다.
그들은 조선인 청부업자의 힘을 빌렸다. 저 멀리 시베리아 너머 우랄산맥 깊은 곳에 있는 페름현 산악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하기로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청부업자는 정직하지 않았다.
그자는 사관생도들이 러시아어에 서툰 점을 악용해 근로계약서를 위조했다. 1년 기한을 2개년으로 몰래 늘렸고, 약정된 근로 할당량을 채우려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도록 꾸몄으며, 노임 수준도 통상 임금의 절반도 안 됐다.
약정 내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고용 기한이 다 찼더라도 작업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사관생도뿐만이 아니었다. 청부업자의 농간으로 페름현의 공장과 사업소에서 노예노동에 얽매인 조선인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청부업자는 ‘포드랴치크’라고 부르는데, 러시아어에 능숙하고 이미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 맡았다. 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광산, 어장 등지에 노동자를 모집해주거나 관청과 군대에 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신이주민과 관청 일에 어두운 러시아어 문맹자는 일자리를 얻으려면 그들을 통해야만 했다. 근로계약의 관행도 청부업자에게 유리했다. 그들은 고용주에게서 노동자의 임금 총액을 직접 수령해, 소관 노동자 개인에게 나눠주는 권한이 있었다.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이 있던 문창범, 최봉준, 최재형, 김두서 등은 모두 이 직업을 통해 재산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사관생도 32명이 독립군자금을 벌기 위해 고용돼 일하던 러시아 페름현의 위치. 구글 지도
문제의 청부업자는 김병학이라는 자였다. 그는 사관생도 등 조선인 노동자 몫의 임금 선불금을 받고서 자취를 감췄다. 그도 연해주 조선인 사회의 유력자였다. 시베리아철도 건설공사 청부, 러시아 군납용 쇠고기 조달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191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민회 회장, 민족운동 단체 권업회의 외교부장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사관생도들은 노예노동의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의 고난은 1년 이상 계속된 뒤에야 끝났다. 사관생도들이 억류에서 벗어난 시점이 눈에 띈다. 1917년 6월이었다. 바로 그해 2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이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조선 노동운동사의 첫 장을 열다
실제로 벌목장의 사관생도들이 노예노동의 처지에서 벗어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 2월 혁명 덕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가 우랄산맥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항의 캠페인을 조직한 덕분이었다.
김알렉산드라는 이주민 2세로 러시아의 정규 초등, 중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이었다. 그는 재학 중에 혁명사상을 수용해 비밀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사관생도들이 우랄산맥에서 노예노동에 종사하던 그때, 김알렉산드라도 페름현 일대에서 거주했다. 왜냐하면 혁명당의 일원으로 지목돼 우랄산맥 방면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페름현 벌목장에서 노동과 착취에 고통받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주목했다. 특히 사관생도 그룹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인 노동자를 조직하는 한편, 그들의 대표자로서 노사 교섭의 현장에 섰다.
김알렉산드라는 가능한 모든 종류의 합법투쟁을 밀어붙였다. 조선인 노동자를 대리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전술도 병행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지방법원의 판사들은 시종일관 자본의 편에 섰다.
2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 덕분에 페름현 조선인 노동자 소송 사건은 여론의 주목을 받는 일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했다. 지방법원 둘레에 수만 명의 사람이 에워쌀 정도였다. 마침내 법원의 최종 판결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처럼 조선 노동운동사의 첫 페이지는 32명의 사관생도와 김알렉산드라에 의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 독립운동 지탱하는 근간으로 자란 생도들
2월 혁명 이후 전 러시아가 혁명적 정세에 휩싸인 조건 속에 사관생도들은 연해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청부업자 김병학에게서 1200루블을 받아냈고, 그 돈을 우랄동맹 31명의 명의로 북간도 무장투쟁 준비사업에 기부했다. 왜 32명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사관생도 한 사람이 우랄산맥 벌목공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1년여 세월에 걸친 사관생도 32명의 용기와 모험치고는 성과가 보잘것없다고 보는 독자도 있겠다. 북간도로 송금한 1200루블은 나자구 사관학교의 약 2개월치 경비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헌신 결과는 고조된 조선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근간으로 자랐음에 주목해야 한다. 1920년 초 독립군이 발흥하던 때였다. “오늘날 중국·러시아 영토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은 나자구 사관학교에서 나온 자가 가장 다수”라는 평가가 나왔다.3 그 한가운데에 바로 32명의 사관생도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훈 동무의 자서전(Автобиография тов.Те-Хуна), с.1, РГАСПИ ф.531 оп.1 д.247 л.14-17, 1927년 3월28일.
2. 琿春副領事 北條太洋, ‘機密公信第10号, 汪淸縣ニ於ケル不逞鮮人ノ設定ニ係ル學校職員並生徒名簿ニ 關スル件’, 3~5쪽, 1916년 3월11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の部-在滿洲の部>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3. 四方子, ‘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 <독립신문> 19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