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문제에 대해 국무위원들에게 “뭐가 옳고 그른지 한번 생각해보라”며 “누군가 해야할 일이라면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홍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육사)와 국방부 청사에서 철거하는 게 합당하다는 의중을 내비치면서, ‘이념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홍 장군 흉상 철거 문제와 관련해 “재평가할 자료들이 있는데 잘 검토해보라. 내가 규정짓지 않고 여러분들이 뭐가 옳은 건지 한번 봤으면 좋겠다”며 1991년 한국-소련 수교 직후 발굴된 소련 쪽 정부문서를 언급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홍 장군 논란에 관한 윤 대통령의 발언이 알려진 것은 처음이다. 전날 국방부는 소련 정부 쪽 문서를 근거로 홍 장군의 ‘자유시 참변’ 관여 의혹을 제기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정율성 역사공원은 말할 것도 없고, 홍범도 흉상 설치 등 자꾸 이런 문제들이 있다. 뭐가 옳으냐”며 “정무적으로 지금 이런 역사 논쟁으로 가는 게 좋지 않다는 분들도 있지만, 잘못된 것을 가만히 놔둬야 하나.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이번 정부에서)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이념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이념이라는 게 방향이다. 일단 방향을 잘 잡아야지, 방향 잡는 데서 왔다 갔다 하면 되겠나”라며 “싸우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다”, “사방에서 공격을 많이 하는데 그런 공격에 대해 움츠러들지 말고, 당당하게 대응하라”고 국무위원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최근 윤 대통령은 정치권 등을 이념 전쟁의 장으로 바라보면서, 비판 세력 전체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메시지를 거듭 내놓고 있다. 지난 28일 열린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철 지난 엉터리 사기 이념에 우리가 매몰됐다”, “전부 회계가 분식이고, 내실로 채워져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국정운영권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하는 아찔한 생각”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오염수 관련 비판 여론에는 “1 더하기 1을 100이라는 사람들”이라며 “이런 세력들하고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치권과 언론에는 “여소야대에다가, 언론도 전부 야당 지지 세력들이 잡고 있어서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와 진보 진영을 ‘새의 좌우 날개’로 비유하면서는 “새가 날아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어야 왼쪽 날개, 오른쪽 날개가 힘을 합친다”며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가 힘을 합쳐 성장과 분배를 통해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 날아가는 방향에 대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앞으로 가려는데 뒤로 가겠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이 설정한 방향과 이념만 정답이고, 민주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견해와 토론, 타협은 걸림돌로 치부하는 인식이다. 윤 대통령은 특히 “공산전체주의”를 한국 사회의 주요한 현존 위협으로 여기는, 다수 국민들과 동떨어진 인식을 보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부위원과의 대화에서도 비판 세력에 공세를 퍼부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지난 8·15 광복절 축사를 되풀이했다.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윤 대통령의 ‘반대세력 이념공세’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여야 모두에서 나왔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중도층에서는 민생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정부가 최근에 이념 공세를 집중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크다”고 했고, 유승민 전 의원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하는 일본과 싸우는 게 아니라, 방류에 반대하는 우리 국민들과 싸우겠다는 대통령”이라며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면 1+1도 모르는 ‘미개한 국민’이 되는 것인가.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면 ‘반국가 세력’이 되는 것인가”라고 직격했다.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참배한 뒤 “국민 통합을 도모하진 못할망정 끊임없이 국민을 갈라치기 하고 갈등을 조장하고 국민의 삶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정치학)는 “오염수 방류로 시작된 반일 감정을 반공주의로 방어하려는 전통적 수법”이라며 “자유를 주장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이념 이슈를 건드리고, 공정과 상식을 얘기하면서 극단주의자 언어를 사용하는 모순”이라고 짚었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배지현 기자
beep@hani.co.kr 이우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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