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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학살자 전두환, 반성 없이 죽다

등록 2021-11-23 10:54수정 2021-11-23 20:34

23일 오전 연희동 자택서 사망
지난 8월9일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연희동 자택을 나서는 전두환씨. 연합뉴스
지난 8월9일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연희동 자택을 나서는 전두환씨. 연합뉴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내란을 일으켜 시민을 학살한 뒤 고문과 압제로 인권을 유린했던 독재자 전두환이 23일 사망했다. 한국 현대사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도 언제나 ‘뻔뻔한 당당함’을 유지했던 학살자는 이날 오전 서울 연희동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숨을 거뒀다. 국민은 지난 40여년 수없이 사죄의 기회를 줬지만 거짓과 핑계로 일관했던 그는 죽는 날까지 단 한마디 사과도, 참회도 없었다.

육사 11기, 하나회 결성해 박정희 친위대 활동

경남 합천군 율곡면에서 태어난 전두환은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55년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에는 미국 특수전 파견 교육 장교로 선발됐고, 이어 제1공수특전단 본부에 배치됐다. ‘정치 군인’의 면모가 드러난 것도 이때부터다. 그는 육사 2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기인 이규동의 딸 이순자와 1959년 결혼했다. 1961년 5·16 쿠데타 때 서울대 학군단(ROTC) 교관으로 일했던 그는 육사 후배들을 설득해 군부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게 했고 이 일로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부상하며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등을 지냈다. 1969년엔 육사 동기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해 1970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74년 육사 11기 최초로 별을 달고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제1보병사단 사단장 등 요직을 맡았다. 1979년에는 국군보안사령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전두환이 1963년에 노태우 등 육사 11기들과 조직한 사조직 ‘하나회’는 그가 군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됐다. 하나회는 박정희 친위 세력으로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키웠고 10·26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하던 틈에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로 정권 찬탈, 5·18로 유혈 진압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수사를 맡았다. 그리고 12월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를 연행하고 군을 장악했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인사들은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정당·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국회를 폐쇄했으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학생·정치인·재야인사 등 2699명도 구금했다. 전두환은 이에 맞선 광주시민을 총칼로 학살하며 진압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가 2005년 집계한 통계를 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집계됐지만, 암매장 등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 많다. 

 ‘신군부’에 밀려 최규하 대통령이 직에서 물러나자, 전두환은 그해 8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취임 뒤 정당을 해산하고 10월27일 ‘7년 단임 대통령제’가 담긴 새 헌법을 공포했다. 1981년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새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 방식으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6년 1월 15일 서울 가락동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위원 등 당직자, 소속 의원, 당원, 각계인사 1천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민정당 창당 5주년 기념식에서 전두환씨 부부가 당원들의 환호에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1986년 1월 15일 서울 가락동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위원 등 당직자, 소속 의원, 당원, 각계인사 1천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민정당 창당 5주년 기념식에서 전두환씨 부부가 당원들의 환호에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 대통령’ 집권 시절 한국은 저금리·저유가·저달러 상황에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지만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한층 거세졌다. 1985년 12대 총선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터져 나왔고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럼에도 그해 4월,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고 버텼다. 이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고 결국 6월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퇴임 뒤에도 민정당 총재로 남아 막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노태우 집권 뒤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목소리가 들끓었다. 권력을 넘겨받은 친구이자 육사 동기 노태우도 그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1월23일,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내설악 백담사로 들어갔다. 이 정도로 정치적 책임을 갈음하려는 ‘자기 유폐’였다.

퇴임과 구속, 전 재산 29만원

본격적인 징벌은 김영삼 정부 출범 뒤 시작됐다.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후보로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중반인 1995년 말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과 노태우를 전격 구속했다. 쿠데타로 인한 정권 찬탈(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과 대통령 재직 시절 뇌물수수(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였다.

피고인 전두환씨(오른쪽부터)가 노태우씨,유학성 전 중앙정보부장과 1996년 8월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서 기립해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 전두환씨(오른쪽부터)가 노태우씨,유학성 전 중앙정보부장과 1996년 8월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서 기립해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은 이에 반발하며 연희동 자택 앞에서 “(12·12와 5·18)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별법까지 제정해 재조사한다니 응할 이유가 없다. 법을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처만 수용할 것”이라는 ‘골목 성명’을 발표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 검찰 수사팀은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 그를 압송했고 법정에 세웠다.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전씨가 검찰 소환 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전씨는 이후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버티다가 체포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전씨가 검찰 소환 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전씨는 이후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버티다가 체포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

전두환은 1심에서 반란수괴와 부패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검찰은 처벌이 약하다며 상고했지만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1997년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이회창(한나라당)·이인제(국민신당) 후보 모두 ‘전두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선 이틀 뒤인 그해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이 그를 사면 복권했지만 추징금은 전부 내야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추징금 완납을 거부했고 전 재산이 29만1000원이라고 항변하며 공분을 샀다. 전두환은 2003년 4월28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추징금 환수를 위한 재산 명시 관련 재판에서 “기업한테서 뇌물을 받은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게 받은 돈을 민정당 관리 등 정치 활동에 다 써서 남은 게 없다”며 해당 금액이 적힌 예금과 채권 증서를 제출했다. 그가 제출한 재산 목록에는 진돗개, 피아노, 그림, 병풍, 응접세트, 카펫, 에어컨, 텔레비전, 냉장고, 시계, 도자기, 컴퓨터, 식탁세트 등도 적혀 있었다. 출소 뒤에도 그는 연희동에 살면서 경호를 받고, 골프를 치러 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미납한 추징금은 956억원이다.

‘사자명예훼손’ 단죄 못 받고 떠나

말년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2017년 전두환은 3권짜리 회고록을 내놨다. 법원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내용이 담겨 있는 1권 판매를 금지했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1980년 5월 광주 상공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거짓이라며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조 신부의 유족은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결국 전두환은 2019년 3월11일 경찰 경호팀의 호위를 받으며 피고인 신분으로 광주지방법원 법정에 섰다. 1999년 “광주에서 책임 있는 분들이 중심이 돼 초청하면 광주도 방문 못 할 이유가 없다”고 호기를 부렸던 그는 광주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당시에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검찰과 전두환 쪽 모두 판결에 불복하면서 항소심 재판이 이어졌고, 전두환은 올해 8월 항소심에 출석했지만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판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어지럼증을 느낀다며 재판 시작 20여분 만에 퇴정하기도 했다. 그 직후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더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그였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발언(지난 10월19일)으로 다시 한번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9년 11월7일 강원도 홍천 한 골프장에서 전두환씨가 임한솔 정의당 부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임한솔 제공
2019년 11월7일 강원도 홍천 한 골프장에서 전두환씨가 임한솔 정의당 부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임한솔 제공

 그의 죽음에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은 공동성명을 내어 “전두환이 죽더라도 5·18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오월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만고의 대역죄인 전두환의 범죄 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학살자는 죽음으로도 진실을 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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