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대학 시절 ‘부캐’는 김혜란이다. 그는 구로공단 의류봉제 수출회사 대우어패럴의 미싱사다. 대학생 심상정은 노동운동을 위해 서울대 사회교육학과 학생이라는 ‘본캐’를 숨기고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했다. 사명감에 불타 시작한 일이었지만 “대학에서보다 공장에서의 삶이 더 건강하고 알차게 느껴졌다”(<난 네 편이야>, 2017년)는 깨달음을 얻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25년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그는 ‘김혜란’을 잊지 않았다. ‘거리에서 팔뚝질만 하던 사람들이 무슨 정치를 아느냐’는 시선을 넘어 4선 국회의원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그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을들을 위한 정치’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소수 정당이란 한계 속에서 꽃피운 성공신화에도 진보정치가 당면한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심 의원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이었던 2004년 이후 지금껏 진보정당은 ‘군소정당’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정의당의 ‘간판스타’ 심 의원은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2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심 의원은 ‘왜 다시 심상정인가’에 응답할 수 있을까.
심 의원은 생존력이 강한 정치인이다. 2004년 민노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이래 진보정당이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4선 중진의원의 입지를 다졌다. 또 20대 총선부터는 민주당과 단일화 없이 독자 출마해 자력으로 당선될 정도로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소수 정당이라는 한계에도 탄탄한 ‘의제 장악력’을 바탕으로 여론을 주도하며 인지도를 높인 결과다. 대중적인 소구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진보정당에서 ‘개인기’를 바탕으로 지역구 다선 의원이 된 것은 심 의원의 사례가 유일하다. 그가 2017년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6.17%)은 진보정당이 대선에서 기록한 가장 높은 득표율이기도 하다.
부당한 것이라면 끝까지 싸우는 게 그의 전법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구로공단으로 향한 그는 위장취업 5년여 만에 공단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동맹파업을 주도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으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현상금 500만원의 수배자가 됐지만 호락호락 잡힐 그가 아니었다. 도로에 뛰어들어 차를 세우고, 치마 차림으로 철조망에 올라타며 당국의 추적을 따돌린 그의 수배생활은 ‘우리나라 최장기 여성 수배자’ 기록을 세울 때까지 계속됐다.
노동자로서의 강한 정체성은 심상정표 ‘킬러 콘텐츠’의 원천이다. 그는 스스로를 ‘금배지 단 노동자’로 규정한다. 정치적 목표도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만드는 것”에 있다. 2003년 금속노조 사무처장으로 ‘임금삭감 없는 주 5일 근무제’를 관철해낸 그는 1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주 4일제 근무’를 대선 1호 공약으로 내세운다. 삼성그룹의 노조 와해 전략을 담은 문건을 세상에 공개해 81년간 지속된 삼성그룹 무노조 경영에 균열을 낸 이도 심 의원이다. 아직도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조합원이라는 그는 “죽을 때까지 조합비를 낼 것”이라고 말한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심 의원은 대선 주자 중에서 콘텐츠 측면에서 가장 탄탄한 후보”라며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말하긴 어려워도 시대의 방향성을 담는 어젠다 제시에 있어 강점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의당은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다. 특히 2019년 심 의원을 대표로 맞은 정의당은 더불어민주당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유독 서툰 모습을 보였다.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할 때 제대로 긋지 못했고, 되레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에는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특히 ‘조국 사태’는 심 의원에게 뼈아픈 대목이다. 진보정당의 숙원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민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에 ‘전략적 관대함’을 취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급기야 심 의원이 조 전 장관 임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을 공개 사과하기에 이르렀지만 지지층의 대규모 이탈을 막을 순 없었다.
선거제도 개혁안도 결과적으로 정의당에 득이 되진 못했다.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창당으로 ‘최대 수혜’가 예상됐던 정의당의 상황이 순식간에 ‘최대 피해’로 역전된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민주당 2중대’ 논란과 의석 손해였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과거의 심 의원은 힘이 부족해서 좋은 일을 못 하는 정치인이란 인상이 강했는데, 지금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잘못된 결과를 만드는 데 앞장서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현 정부 들어 실책을 거듭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정의당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은 대선 주자인 심 의원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정의당 창당 주역이면서 동시에 간판 정치인인 심 의원과 정의당은 ‘운명공동체’의 관계다. 정의당이 대안 정당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심 의원의 ‘집권’은 현실론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는 “심상정 의원 개인의 높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해 있는 정의당이라는 정당의 기반이 너무 취약하다”며 “정의당은 국회의원이 6명에 불과한 소수 정당이다. 정당 투표에 익숙한 대선 지형에서 정의당 후보는 득표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대선 경선은 뚜렷한 ‘대세’가 확인되지 않은 만큼, 서로에 대한 ‘네거티브’ 전쟁이 한창이다. 이는 ‘정책통’인 심 의원에게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윤석열 전 검찰총장 등 ‘활화산’ 같은 캐릭터들이 여야 후보군에 포진해 있어, 이는 민생 정책 의제를 강조해온 심 의원이 ‘차별화’할 수 있는 지점이다. 성한용 선임기자는 “정책은 실종되고 네거티브 캠페인이 판을 치는 상황이 오면 진보적 의제와 정책 대안을 가진 심상정 후보가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되고 득표율을 크게 올리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선 후보 간 치러지는 티브이(TV) 토론회는 심 의원이 돋보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수 있다. 그는 2017년 대선 당시에도 보수·진보 양 진영의 유권자들로부터 티브이 토론을 가장 잘한 후보로 꼽히며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이번 대선은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로 대면 선거운동에 제약이 클 수밖에 없어, 티브이 토론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젠더 이슈’가 주요 대선 의제로 부각될수록 심 의원의 경쟁력이 주목받을 가능성도 있다. 심 의원은 대학생 시절 남성 중심 운동권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서울대 최초의 총여학생회를 세우는 등 여성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중·장년 남성’이 주류인 정치 지형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할 여지가 큰 셈이다. 한귀영 연구위원은 “기득권 남성층과 대별되는 위치로 인해 2030 여성층에서 지지도 상승 여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대선이 초박빙 구도로 치러진다면 심 의원에게 불리하다. 유권자들의 ‘사표 방지 심리’가 작동해 거대 양당 중심으로 지지층이 결집할 가능성이 높다. 심 의원이 지난 대선에서 진보정당 후보로 독자 출마해 비교적 높은 득표율(6.17%)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문재인 민주당 후보만으로 정권 교체가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반면 선거 당일까지 판세가 엎치락뒤치락했던 2012년 대선에서 그는 진보정의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가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중도사퇴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보수진영은 어떻게든 다시 정권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데 목숨을 걸고 있고, 개혁진영은 ‘적폐의 부활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상황이 돼버려서 진보정당이 반사이익을 얻기가 상당히 어려운 판이 됐다”고 설명했다.
심 의원이 오랫동안 진보정치의 간판스타로 활약해온 만큼, ‘심상정 피로감’도 그가 넘어야 할 산이다. ‘세대교체’가 정치권의 화두인데다 경선 경쟁자도 지난 대선 때보다 많아 상황이 녹록지 않다. 특히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의 도전이 점점 거세지는 분위기여서 지난 대선처럼 본선 진출을 낙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성한용 선임기자는 “심 의원은 62살로 진보정당 대선 후보로는 나이가 많다. 2017년 대선 출마로 참신함도 떨어진다”며 “유권자들이 ‘정의당에는 심상정밖에 없냐’고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대선에 세번 출마하면서 그런 비판을 받은 전례가 있다”고 짚었다.
심우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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