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정세균 총리. 연합뉴스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캠프 사무실에는 ‘세균맨’이 산다. 국회의장 시절 “항상 세균맨처럼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지지자가 선물로 준 인형이다. 세균맨은 일본 애니메이션 <날아라 호빵맨>의 악역 캐릭터다. 주인공 호빵맨의 숙적이지만 늘 패배한다. 정치인에게 썩 반갑지 않은 비유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그는 파안대소하며 세균맨을 집무실 책상 한편에 놓았다. 지역구 동네 아이들이 장난삼아 “세균맨이다”라고 해도 그는 “정치인 이름이 기억하기 쉬우면 그만”이라며 미소로 화답한다.
하지만 기억하기 쉬워 좋다는 그 이름이 유독 대선판에서만큼은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 지지율은 하위권을 맴돌고, 유권자들 사이에서 좀처럼 회자되지 않는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이미지는 각종 논란을 몰고 다니는 속칭 ‘쎈’ 캐릭터들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진다. 세번의 당 대표, 국회의장, 국무총리까지 쭉 이어진 화려한 정치 경력은 산전 수전 공중전을 치러야 하는 대선 정국에선 도리어 밋밋한 인상으로 남았다. 차고 넘치는 역량에도 좀처럼 뜨지 않는다. 과연 정 전 총리는 ‘저평가 우량주’라는 세간의 평가를 깰 수 있을까.
정 전 총리의 가장 큰 자산은 숱한 공직 이력에서 비롯된 안정감이다. 1995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정책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5대 국회부터 내리 6선을 한 그는 민주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자천타천 ‘구원 투수’로 차출됐고 한국 정치사의 주요 국면마다 격랑의 한복판에 섰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 당시 국회의장으로 의사봉을 두드린 것도 그였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하기 시작할 때 국무총리를 맡아 팬데믹 사태도 총괄했다.
그의 해결사 기질은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과도 맞닿아 있다. 고생을 별로 안 해본 사람처럼 표정도 편안하다. 껄끄러운 이야기들에도 기분 상하는 법 없이 귀를 기울인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했던 고병국 서울시의원에 따르면 “야 이 사람아!”가 그가 내뱉는 가장 과격한 말일 정도다. 부드러움에서 비롯되는 포용력으로 여야를 막론하고 적이 없다는 점도 특징이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정 전 총리는 인간관계가 무난해 갈등 중재에 뛰어난 장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대선주자 중 가장 낮은 수준인 비호감도 또한 정 전 총리 특유의 튀지 않는 무난한 스타일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27년 정치인 생활 동안 측근비리 같은 부패 문제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한보그룹의 불법 정치자금을 거부한 일화도 있다.
정 전 총리는 정치권에선 보기 드문 ‘상사맨’ 출신으로 실물 경제에 밝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쌍용그룹 산하 종합무역상사에 취직해 상무 자리까지 올랐다. 국비 유학 말고 개인이 외국에 나갈 길이 없던 시대였지만, 국외 근무가 자유로운 상사의 특성을 활용해 국제 경험을 쌓았다. 정계 입문 뒤에는 정책통으로서 입지를 다지다 참여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에 임명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관여했다. 그는 “유능한 진보여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진보 정권이 보수 정권에 비해 약하다고 평가받는 경제 분야에서 능력을 입증해야 성공적인 민주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는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경제 관련 상임위에서 주로 활동했고 산자부 장관을 했기 때문에 경제 분야에서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켜켜이 쌓아올린 공적에도 정치적 존재감이 낮다는 건 최대 약점이다. 전북 진안 산골의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정 전 총리는 “대부분의 기억은 배고픔을 참아내는 고통과 지긋지긋한 지게질이었다”고 유년 시절을 회상할 정도로 가난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학비가 없어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한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뒤에는 밀기울로 끼니를 때우던 유년 시절과는 대조적으로 평탄했다. 물론 19대 총선 때 고향 호남(무주·진안·장수)에서 서울 종로로 지역구를 옮기거나,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에 맞서 단식투쟁에 나서는 등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지만 대중의 뇌리에 각인될 만한 강렬한 사건은 없는 편이다. 고려대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으로 유신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한 경험이 있지만, 그 자신도 “아주 대단한 투쟁을 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한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추미애 당대표 때보다, 정세균 대표 당시를 사람들이 훨씬 더 높이 평가하지만, 캐릭터는 추 대표가 훨씬 더 선명하다”며 “정 전 총리는 성공의 역설에 갇혔다. 항상 주어진 소임을 무난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미지가 더 각인되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2008년 19연패의 침몰하는 소수 야당 대표로 등판해 2년 만에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공을 세웠지만, 그해 그의 대선주자 지지도는 1% 남짓에 불과했다. 정치를 함께 해온 동료·당원들이 많아 당내 조직·기반은 탄탄한데, 열정적 지지층이 없다. 지나치게 올곧고 실수하지 않는 이미지가 ‘인간적 매력’을 반감시킨다는 분석이다. 정 전 총리의 후원회장인 배우 김수미씨가 ‘욕 과외교사’를 자처하며 “바른 자세에 너무 빈틈이 없다. 털어서 먼지가 안 나니 사람들이 약 오른다고 한다”며 타박한 이유도 비슷하다. 김태형 소장은 “‘미스터 스마일’보다 홍준표 의원처럼 실수하더라도 이리 받고 저리 받으며 사람 냄새도 나야 열렬한 지지층이 형성되는 것”이라며 “정 전 총리는 그간 절제된 모습만 보여줬기 때문에 지지층도 안티층도 없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임기 말에도 40%가 넘는 높은 정권 지지율은 정 전 총리에게 기회 요인이다. 그는 ‘코로나 총리’로 문재인 정부의 성과를 공유하는 인물이다. 총리 재임 시절 벌어진 세 번의 코로나 대유행을 안정감 있게 해결하고 마스크 부족 사태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은 터라 올해 10월까지 백신 접종이 원활하게 이뤄져 방역 성과가 부각된다면 지지율 ‘역주행’을 기대해볼 수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기 침체가 가속화할 경우 경제통인 정 전 총리의 경쟁력이 주목받을 수도 있다.
여권 대선 선두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네거티브 공방도 정 전 총리에게는 호재다. 이 지사를 겨냥한 도덕성 검증 공세, 이 전 대표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찬반 논란 모두 정 전 총리가 자신감을 나타낼 수 있는 소재들이다. 정 전 총리는 다른 주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덕적 흠결이 적다는 평가를 받는다. 범친노계로 민주당의 울타리를 벗어난 전력이 없어 ‘민주당 정체성’의 계승자로 손색이 없다. 두 주자가 제 살 깎아먹기 경쟁으로 지지율이 정체기에 접어든 만큼 정 전 총리로선 지지율 반등의 적기를 만난 셈이다.
이낙연과 차별화 난제…강고한 양강구도로 전망 어두워
그럼에도 정권교체 여론이 정권 재창출 여론보다 높다는 것은 모든 여권 주자들에게 부담이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민주당이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을 내리 3연승 해 견제·교체 여론이 높은 상황”이라며 “이회창씨는 국무총리 시절 와이에스(YS)와의 차별화로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지만, 정 전 총리는 차별화 시기를 놓쳤다”고 말했다.
캐릭터가 겹치는 이낙연 전 대표의 존재는 정 전 총리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다. 이 전 대표는 정 전 총리와 같은 호남 출신으로, 현 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온건 합리주의 성향의 정치인이란 점에서도 결이 같다. 서로 대체재인 셈이다. 따라서 이 전 대표의 지지도가 내려가지 않는 한 정 전 총리의 지지도가 오르기 쉽지 않다. 윤태곤 실장은 “비슷한 상품끼리의 경쟁이 더 어려운 법”이라며 “단순히 품질을 높이고 마케팅을 하는 걸로는, 지지율을 높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 전 총리는 경선 초반 ‘민주당 후계자 논쟁’의 중심에 서며 ‘친문 지지층’을 겨냥한 강성 발언을 거리낌 없이 쏟아냈다. 한자릿수 지지율 탈피를 위한 ‘이미지 변신’ 차원이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당내 평가 속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윤태곤 실장은 “다른 주자의 불안정성이 부각되면 정세균의 안정성이 부각될 수도 있는 것인데, 정 전 총리가 초반 캠페인에서 자기 장점을 죽이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다”고 짚었다.
초반부터 이재명-이낙연 양강 구도로 굳어진 경선 국면은 정 전 총리의 대선 전망을 어둡게 한다. 대선 레이스 초기 빅3 구도를 형성했던 정 전 총리의 지지율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나 박용진 의원의 추격에 위태로운 상황이다. 성한용 기자는 “당내 경선이 양강 구도로 흐르면서 정세균 전 총리를 포함한 다른 후보들의 몫이 갈수록 줄고 있다”고 진단했다.
심우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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