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국회의장실을 찾았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뒷통수에 최근 커진 원형탈모가 선명하게 보인다.
“한 열번째 똑같은 얘기 하는데…”(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오늘 더 만나실 계획 있으신가 해서…”(기자)
“오늘은 계획 없습니다.”(홍 원내대표)
정확히는 여덟번째였습니다. 사실상 여당 단독으로 예산안 상정을 위한 본회의를 마친 뒤 홍 원내대표는 다시 기자들 앞에 섰습니다. 예산안 처리 시한(12월2일) 초과 하루차인 지난 3일, 홍 원내대표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와 만났다가 국회의장을 만났다가 다시 두 원내대표 만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죠. 홍 원내대표 뒷통수에는 500원짜리만한 구멍이 생겼습니다. 스트레스성 원형탈모라고 합니다. 원내대표 초기에는 작았는데, 최근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급격히 커졌다는 전언입니다. 지난주엔 왼쪽 눈이 터져 벌개져서 돌아다녔는데, 그건 가라앉았네요. 연말 예산 정국, 각종 법안과 현안에 얽혀 여야가 ‘밀당(밀고 당기기)’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지만, 올해는 다당제에, 선거제 개혁까지 얽혀 홍 원내대표가 풀어야 할 방정식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제3정당 바른미래당(30석)과 제4정당 민주평화당(14석)은 선거제도 개혁과 예산안을 연계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정치권에선 이 두 사안이 실제 연계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팽배합니다. 개별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걸려 있어, 국회 안에서도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히는 게 선거제도 개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동영 평화당 대표는 매우 적극적입니다. 평화당 관계자는 “예산은 (통과가 안 되면) 준예산이라는 대안이라도 있지만 선거제도 개혁은 이번에 안 되면 안 된다”라며 “예산안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평화당은 어제(3일) 국회 본청 계단 밑에 농성용 천막을 쳤습니다. 천막 설치에 대해 사전 문의가 들어오자 국회 사무처는 ‘불허’ 입장을 미리 밝혔다고 하는데요. 사무처의 반발이 ‘예정’된 가운데, 정 대표는 천막을 실은 트럭 조수석에 직접 탑승한 채 본청 앞에 나타났습니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습니다. 이 곳은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4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천막 농성을 하던 자리입니다. 국회 관계자는 “김 원내대표의 경우 사전 문의가 없었기 때문에 국회에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천막이 세워져 설치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매우 적극적인 당대표와 달리, 당내 움직임에서는 다소 온도 차이가 있습니다. 한 의원은 “실제 예산안과 연계까지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며 “다만 이번 압박을 통해 ‘언제까지 하겠다’라는 여당의 답변은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홍 원내대표는 평화당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인데요. 이날 틈을 내 ‘평화당 천막’을 방문했습니다. 천막에 와서 “(평화당이 주장하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가면 초과 의석이 100석 가까이 발생하기 때문에 어렵다”며 입장 변화를 설득했다고 평화당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설득은 물론 안 됐습니다.
더 큰 산은 바른미래당인데요. 교섭단체인 바른미래당은 당장 원내대표들 회동에서 매번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30석 바른미래당이 결정하는 향배에 따라 여당은 안정적 과반을 얻을 수 있을지 기로에 놓이곤 하죠. 홍 원내대표는 이날 저녁에도 김성태, 김관영 원내대표와 2시간가량 식사하면서 설득 작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김-김 원내대표’는 최근 부쩍 ‘공동행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섭단체는 아니지만, 정의당 사정도 복잡한데요. 심상정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필두로 정의당은 선거제도 개혁에 당의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산안과의 연계에서는 다른 당들과 결이 다른데요. 선거제도 개편과 예산안을 연계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많습니다. 이날 여당 주도로 예산안 상정을 위한 본회의가 열렸을 때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와 김종대 대변인은 참석해 자리를 지켰습니다. 야당 의원들 중엔 유일했습니다.
3일 저녁 장제원 자유한국당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가 여당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입장을 더 밝히고 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자유한국당입니다. 야권의 ‘선거제 개편’ 연계 움직임과 관련해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상 ‘뒷짐’지는 모양새인데요. 이날도 관련 질문을 여러 번 받았는데 “연말 국회는 힘들지만 여야가 합의해 처리하는 슬기로움과 지혜를 보여야 한다. 홍영표 원내대표가 폭넓게 판단할 것이다”라며 홍 원내대표에게 공을 넘겼습니다. 같은 시각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교섭단체 간사만 참여하는 비공개 회의를 진행하며 감액·증액 심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저녁 한국당 예결위 간사인 장제원 의원이 국회 기자회견장을 찾아 ‘긴급 브리핑’을 했죠. 정부가 세수 결손분 해소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여권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였습니다. 장 의원은 카메라 앞에서 “민주당은 예결위 간사 뒤에 원내대표, 그 뒤에 대표, 그 뒤에 국무총리, 그 뒤에 대통령이 있지만 제 뒤에는 김성태 원내대표밖에 없다”, “제가 여기서 낭떠러지에 떨어져야 하나. 김성태를 제가 낭떠러지에 떨어뜨려야겠냐”라고 말하며 눈이 촉촉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선거제 개편을 두고 갈등이 진행되는 사이 한국당이 소소위에서 ‘실리’를 챙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옵니다.
3일 민주평화당이 국회 본청 계단 밑에 `선거제도 개혁'을 촉구하며 만든 천막 농성장.
이번 예산 정국 정기국회는 9일까지 열립니다. 홍 원내대표는 이번 방정식을 잘 풀어낼 수 있을까요? 예산안은 언제쯤 통과될까요? 오늘(4일) 오후 2시 바른미래당과 평화당, 정의당은 선거제 개혁을 촉구하며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에서 공동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밤샘 농성도 각오하겠다고 합니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오늘 국회에서 잘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글·사진 송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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