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를 마친 뒤 참석자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임기 중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우선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평가 지침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이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용을 늘려나가고, 정규직으로 전환해 나가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도록 대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을 보면 “주요 정책과 예산 사업에 대해 고용영향평가제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이런 대선 공약과 발언에는 단순히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근본적이고 깊은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5월 30일부터 2016년 5월 29일까지 19대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은 입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재인 국회의원이 만들려고 했던 법률이 있습니다. 국회 누리집 의안정보시스템을 열어 19대 국회에서 문재인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률안을 찾아보면 모두 세 건이 나옵니다.
2014년 6월 17일 제안한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 2012년 9월 7일 제안한 ‘부담금 관리 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과 ‘청년고용촉진특별법 일부 개정 법률안’입니다. 세 건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습니다.
부담금 관리 기본법 개정안은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안의 관련 법안입니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안은 '모든 공공기관과 지방공기업은 매년 정원의 3% 이상씩 청년 미취업자를 고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상시 고용하는 근로자 수 300명 이상의 민간기업까지 확대하여 적용’하는 내용입니다.
이 법안의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대선 공약집에 “2020년까지 향후 3년간 한시적으로 청년고용의무할당제를 공공부문은 현행 3%에서 5%로 확대하고, 민간대기업은 300인 이상 3%, 500인 이상 4%, 1000인 이상 5%로 규모에 따라 차등 적용”하는 것으로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렇다면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은 무엇일까요? 대선주자급 정치인이 단순한 법률 개정안이 아니라 아예 법을 새로 만드는 기본법안을 제출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2014년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 위로하는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우선 이 법안을 제안한 시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2014년 6월 17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나고 겨우 두 달이 지나서입니다. 법률안 제안 이유를 읽어보면 문재인 의원이 어떤 법률을 만들려고 했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경제를 이끌어왔던 신자유주의 성장전략은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성장도 더 이상 불가능함을 증명하고 있음. 대다수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으며, 사회통합을 유지하는 데도 한계에 봉착하고 있음.”
“세월호 참사는 사람의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앞세웠던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게 함. 이제는 이윤과 효율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공동체의 가치를 지향하도록 국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때임.”
“인권, 노동권, 안전, 생태, 사회적 약자 배려, 양질의 일자리,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등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사회적 가치가 경제 운영 원리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 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음.”
“사회적 가치를 의사결정의 핵심요소로 고려하는 사회·경제적 기제가 절실하며, 공동체의 발전과 공공의 이익을 핵심 국가운영 원리의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 필요함.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 사회적 경제나 기업의 사회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등 사회적 가치 실현을 핵심원리로 포함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확산되고 있음.”
“그러나 정부와 민간을 중심으로 한 선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공공기관의 정책수행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고려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됨. 이는 법적, 제도적 환경이 미비하고 사회적 가치 실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직까지 높지 않은 것이 이유임.”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정책수행의 기본원리로 고려하고, 공공기관의 사업수행과 정책집행 과정에 있어 사회적 가치 실현을 공공기관 성과로 평가하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며, 입법부인 국회가 이러한 제도개선을 선도할 필요가 있음.”
“이에 사회적 가치 실현을 우리 행정 운영의 기본원리로 삼고, 공공기관의 조직운영 및 공공서비스 공급과 정책사업 수행과정에서 사회적 가치 실현을 촉진할 수 있도록 사회적 가치에 관한 기본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음.”
“이 법은 공공기관이 수행하는 조달, 개발, 위탁, 기타 민간지원 사업에 있어, 비용절감이나 효율성만을 중시하기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도록 하며, 이러한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공공기관의 평가에 반영토록 하여, 우리 사회 전반의 공공성을 획기적으로 제고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이 법의 제정을 통해 정부의 공공서비스 책임성이 강화되고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되며,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 다양한 사회적 경제조직을 활성화하고, 민간기업의 사회책임을 촉진하는 효과도 기대됨.”
“이 법의 제정으로 사회적 가치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운영원리로 설정함으로써 이윤과 효율만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고 협동과 상생이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임.”
어떻습니까? 압축하면 비용절감이나 효율성만 따지지 말고 ‘사회적 가치’ 실현을 공공기관 평가에 반영해 공동체를 발전시키도록 하자는 제안입니다. ‘사회적 가치’라는 개념이 좀 낯설지요? 당시 제출한 법안 3조(정의)에 보면 사회적 가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경제적?환경적?문화적 영역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가치로서 다음 각 목의 내용을 포괄하는 가치를 말한다.
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기본권리로서 인권의 보호
나. 재난과 사고로부터 안전한 근로 생활환경의 유지
다. 건강한 생활이 가능한 보건복지의 제공
라. 노동권의 보장과 근로조건의 향상
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회제공과 사회통합
바. 대기업, 중소기업간의 상생과 협력
사. 품위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
아. 지역사회 활성화와 공동체 복원
자. 경제활동을 통한 이익이 지역에 순환되는 지역경제 공헌
차. 윤리적 생산과 유통을 포함한 기업의 자발적인 사회적 책임 이행
카. 환경의 지속가능성 보전
타. 시민적 권리로서 민주적 의사결정과 참여의 실현
파. 그 밖에 공동체의 이익 실현과 공공성 강화
‘문재인 의원’의 법안은 그 내용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그런지 상임위원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고 19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으로 폐기됐습니다.
이제 문재인법의 운명은 끝장이 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에는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의 가치관과 신념체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법안을 제출했던 ‘문재인 의원’이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에 했던 말과 행동, 그리고 대통령 당선 이후의 행보를 살펴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가치’에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7월 부탄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부탄의 체링 톱게 총리.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갈무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부탄을 방문해 체링 톱게 부탄 총리와 카르마 우라 부탄 국민행복위원장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귀국하면서 페이스북에 “정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 정부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글을 띄웠습니다.
5월9일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광화문 광장에 갔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가슴에 털실로 만든 ‘노란 리본’과 ‘노란 나비’를 달아주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승의 날’인 15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기간제 교사 김초원·이지혜씨 순직 처리를 지시했습니다. 또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응급 대책으로 노후 화력발전소 일시 가동 중단과 별도의 미세먼지 대책 기구 설치를 지시했습니다. 대통령 취임 이후의 활동 거의 전부가 인권·노동·안전·생태·약자배려·일자리·상생협력 등 법안에서 제시했던 ‘사회적 가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제안했던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큰 공공기관인 대한민국 정부를 움직여 나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쩌면 문재인 법안에 문재인 정부의 앞날이 들어있는 셈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인 김경수 의원(경남 김해을)은 2016년 4·13 총선에서 2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19대 국회에서 폐기된 ‘문재인 법안’을 김경수 의원이 2016년 8월17일 20대 국회에 다시 대표 발의했습니다.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이 과연 20대 국회에서는 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