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 획정을 둘러싼 여·야 갈등이 풀릴 기미가 안 보입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수용하라”는 야당과 “절대 받을 수 없다”는 여당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건데요.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 어떤 제도가 옳은지 판단하고 싶지만 용어부터 너무 어렵죠? 정치BAR가 선거구 획정을 둘러싼 논란을 처음부터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선거구 다시 그어라…헌재발 폭풍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출 제도에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선거구별로 유권자가 행사하는 표의 무게에 차이가 큽니다. 둘째,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율이 의석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습니다. 첫번째 문제부터 따져보겠습니다.
지난 2012년 4·11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영천의 정희수 후보(새누리당)는 2만3331표를 득표해 당선됐습니다. 그런데 서울 강남갑의 김성욱 후보(민주통합당)는 4만1509표를 얻었는데도 낙선했습니다. 경북 영천의 인구는 10만3003명이고, 서울 강남갑의 인구는 30만9776명인데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각 1명씩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입니다. 출마한 후보의 숫자 등 각 선거구별 사정에 따라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울 강서을의 경우 민주통합당 김효석 후보가 6만1098표를 얻었지만, 6만1967표를 획득한 새누리당 김성태 후보에게 졌습니다. 그러나 광주광역시 동구에서는 후보 난립 속에 무소속 박주선 후보가 겨우 1만5372표를 얻어 당선됐습니다.
당시 선거구별 인구수 편차는 3대1까지 허용됐습니다. 경북 영천, 전부 무주진안장수임실 등 지역구 인구수가 10만명을 겨우 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서울 강서갑, 경기 김포, 인천 서구강화갑의 인구수는 30만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1표의 값이 전자의 경우 10만분의 1, 후자는 30만분의 1이죠. 1표 값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줄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칼을 들었습니다. 헌재는 지난해 10월30일 국회의원 선거구 인구수 편차를 ‘3대1’에서 ‘2대1’로 조정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최대 선거구와 최소 선거구의 인구 편차가 3대1에 달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 선거구 인구 편차를 2대1 이내로 줄이는 선거법 개정을 2015년 연말까지 완료해 위헌 요소를 없애라”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것입니다. ‘1인1표’ 선거제도에서 모든 유권자 표는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게 민주주의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행 선거구제는 이를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으니 바로잡으라는 뜻입니다.
2.떡본 김에 제사 지내자는 기특한 선관위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계기로 ‘선거구 선을 새로 긋는 김에 해묵은 정치개혁 과제들도 해결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중대선거구제, 권역별 비례대표제, 석패율 제도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자”고 했고, 정의당은 이참에 선거구마다 의원을 1명씩 뽑는 소선거구제를 선거구 크기를 키워 2명 이상의 의원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출 제도에 있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점을 한번에 다 풀자는 거죠.(물론 새누리당은 헌재 결정에 맞춰 선거구를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 즉 ‘선 새로 긋기’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놀라운 방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어차피 선거구를 대폭 조정해야 하니, 이참에 정당의 지역편중 완화 방안과 함께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도록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한 거죠. 선관위의 권역별 비례대표제 안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① 국회의원 정수는 현행 300명을 유지한다. ② 지역구 200석, 비례대표 100석으로 한다.(2대1) ③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눈다(선관위 예시:서울/인천·경기·강원/부산·울산·경남/대구·경북/광주·전북·전남·제주/대전·세종·충북·충남) ④ 인구 비례별로 권역별 의석수를 산출한다. 예를 들어 서울 인구 수가 대한민국 전체의 20%라면 서울 권역에 배정되는 의석 수는 60석(300석*20%)이 된다. 60석 중 지역구는 40석, 비례대표는 20석(2대1)으로 한다. ⑤ 유권자는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에 1표, 선호 정당에 1표를 행사한다. ⑥ 각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는 권역별로 나눠서 명부를 공개한다. ⑦ 권역별 정당 득표율에 따라 권역별 정당 의석 수를 계산한다. 예를 들어 행복당이 서울 권역에서 50%의 정당 지지도를 얻었다면 행복당에 배정되는 서울 권역 의석 수는 30석(서울 권역 총 의석수 60석의 50%)이다. ⑧ 서울 권역에서 30석을 배정받은 행복당이 서울 권역 지역구에서 18명을 당선시켰다면 모자라는 12석은 비례대표로 채워준다.
유권자의 지지율이 의석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문제는 심각합니다. 19대 국회의원 선거의 지역구는 246개였습니다. 지역구 투표에서 새누리당은 모두 932만4911표를 얻었습니다. 득표율로 환산하면 43.3%였습니다. 그런데 지역구 의석은 그보다 훨씬 많은 127석(51.6%)을 차지했습니다. 민주통합당도 815만6045표를 얻어 37.9%를 득표했지만, 지역구 의석은 그보다 많은 106석(43%)을 차지했습니다. 소선거구제의 ‘승자독식’ 원리 때문이지요. 반면 작은 정당들은 손해를 봤습니다. 통합진보당은 129만1306표(6.0%)를 득표하고서도 지역구 의석은 7석(2.8%)에 그쳤습니다. 자유선진당은 47만4001표(2.2%)를 득표했지만 3석(1.2%)을 가져갔습니다. 그밖에 득표율 2% 미만의 수많은 군소정당은 아예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봐도 불공평한 의석배분이 이뤄진 것입니다. 1당과 2당 거대정당들이 작은 정당의 득표율을 빼앗아 의석을 차지한 겁니다. 이때문에 많은 정치학자와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처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선관위 제안을 2012년 총선 결과에 대입해 보니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전체 의석수는 각각 13석, 10석이 줄어드는 반면, 소수정당 의석수는 26석 늘어납니다.
3.문제는 국회의원 정원이야
선관위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제안하면서 의원정수를 300명으로 묶은 것은 국회의원 증원에 대해 국민들이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정수 300명’ 대목 때문에 선관위 제안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습니다. 지역구 의원수를 46명이나 줄여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국회의원 증원 얘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결정판은 새정치연합 혁신위원회의 안이었습니다. 혁신위는 지난 7월26일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의 당론 채택과 함께 현행 300명인 국회의원 수를 369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5차 혁신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선관위가 권고한 ‘지역구·비례대표 비율 2대1’ 기준을 현 지역구 의원 수(246명)에 적용하면 비례대표가 123명으로 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혁신위는 “현실적으로 지역구 의원 수를 줄이기는 어렵다”는 의견과 함께 의원 정수를 늘릴 경우 세비 등 국회 총예산은 지금 수준으로 동결한다는 대안도 함께 제시했죠. 그러나 당시 국가정보원 불법해킹 의혹 문제에 밀렸고, 국민 여론에 부담을 느낀 새정치연합 지도부도 적극 나서지 않아 힘을 받지 못했습니다. 선관위의 혁신적 제안을 실현시킬 수 있는 현실적 방안으로 꼽혔던 국회의원 정원 수 확대는 이렇게 흐지부지 됩니다.
4.‘선 새로 긋기만 하자’는 새누리당
정치개혁 과제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는 비례대표와 지역구 의석 비율을 2대1로 하자는 선관위의 제안을 전제로 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 8월1일 LA 현지언론인 간담회에서 “지역구 의원 수가 늘더라도 비례대표를 줄여 지금의 300석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 당의 일반적인 생각”이라며 속내를 드러냅니다. ‘선이나 새로 긋자’는 겁니다. 헌재의 결정은 존중하되 구속력 없는 선관위의 제안은 무시하자는 뜻이죠. 김 대표의 이날 발언은 이후 새누리당의 확고부동한 당론으로 채택됩니다.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246석인 지역구 의원을 지금보다 늘리고 그만큼 비례대표를 줄이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김상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장(가운데)과 혁신위원들이 2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5차 혁신안을 발표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5. 이병석 중재안, 등장하다
이런 퇴행의 흐름 가운데 뜻밖의 중재안이 나옵니다. 11월9일 이병석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장이 지역구 의석(246석)을 260석으로 늘리되 비례대표제를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중재안으로 내놓은거죠. 야당이 주장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여당이 전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은 겁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국회의원 정수는 현행 300명을 유지한다. ② 지역구를 260석으로 늘리고 비례대표를 40석으로 줄인다. ③ 정당득표율에 따른 의석수의 과반을 보장한다. 예를 들어 행복당이 11%의 정당 득표율을 올릴 경우 300석의 11%인 33석의 과반인 17석을 보장한다. 행복당 지역구 당선자가 7명이라면 비례대표 의석 10석을 준다.
선관위가 제시한 권역별 비례대표제에서 보장하는 의석수를 절반으로 ‘뚝’ 깎은 겁니다. 새누리당이 받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본 것이겠죠. 새정치연합과 정의당은 이를 수용합니다. 문제는 새누리당입니다. 이병석 중재안대로라면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2석 정도를 잃고, 제3당이 그 의석수를 가져가게 됩니다.
6. 일진과 금수저…완강한 새누리당
1표의 값을 제대로 반영하자는 비례성 제고 방안에 대해 새누리당의 태도는 완강합니다. 과반 의석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100m를 뛰는데 자꾸 자기가 10m 앞에서 뛰겠다는 데 받아들이겠나”라며 ‘불공정 선거 제도’라고 주장합니다. 이학재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는 야당이 다른 정치개혁 과제와 선거구 문제를 같이 논의하자는 제안에 “나이키 안 사주면 학교 안 가겠다는 거랑 똑같다”고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새누리당의 과도한 ‘앓는 소리’에 새정치연합도 가만히 안 있었죠. 새정치연합의 정개특위 간사 김태년 의원은 “좋은 학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이 영원히 일진 짱을 먹겠다는 게 여당의 의도”라고 비판했습니다. 정의당도 “지금 상황이, 새누리당이 불공평한 선거룰로 얻게 된 ‘금수저’ 쥐고 졸부처럼 떵떵거릴 때인가”라고 비판했습니다.
새누리당 농어촌지역 의원들이 11일 오후 국회 대표회의실에서 농어촌지역구 축소에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7. 전면에 나선 국회의장
여·야 교착상태가 길어지자 새누리당 출신인 정의화 국회의장이 나섰습니다. 정 의장은 “새누리당이 과하다. 거대 여당으로 너무 당리에 치우친 게 아니냐”며 새누리당을 압박했습니다.
15일 정의화 국회의장은 의장실 문을 걸어잠근 채 여야 당 지도부와 선거구 획정 마지막 담판을 시도했습니다. 이날은 총선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된 날입니다. 정 의장은 “국회 비상사태가 올 수 있다. (합의안이 나올 때까지) 교황(선출)식으로 결판을 내겠다”고 했지만 7시간 가까운 중재와 협상은 끝내 결렬됐습니다. 결국 정 의장은 선거구 획정안이 이달 말까지 처리가 안 되면 심사기일을 정해 직권상정 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여야가 끝내 합의에 실패할 경우 야당이 주장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이병석 중재안) 도입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정 의장은 “여야 양쪽을 중재하면서 연동형 비례제는 도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저는 도달했다”며 “더 이상 그 부분은 (중재가) 힘들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선거권자 연령을 19살에서 18살로 한 살 낮추는 야당 요구를 여당이 심사숙고하길 바란다”며 여당의 양보를 요구했어요.
정 의장은 현행 공직선거법을 획정기준으로 현행대로 지역구 의석을 246석, 비례대표 의석을 54석으로 선거구를 획정하는 방안을 우선 검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안은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부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요. 농어촌 지역구가 10석 가까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정 의장쪽은 여야 지도부가 잠정 합의한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 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하네요.
연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면 기존 선거구는 모두 무효가 되고 예비후보자의 법적 자격도 사라집니다. 현역 의원들이야 의정보고회 등의 명목으로 활동할 수 있겠지만, 새로 선거에 도전하는 예비후보들은 합법적인 활동을 아예 할 수 없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역 의원들만 유리해지는 구조입니다. 뒤집어놔도 국회 시계는 재깍재깍 갑니다.
김원철 김태규 기자 wonchul@hani.co.kr관련영상 : 선거구 획정, 한상균의 소요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