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사일 2발을 발사한 지난 1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페이스북에 ‘주적은 북한’이란 글을 올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주적은 북한“이라는 다섯 글자를 올렸다. 북한이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한 직후 윤 후보가 핵을 탑재한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있을 경우를 가정해 “선제타격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한 뒤 ‘주적론’까지 꺼내든 것이다.
하지만 주적이라는 표현은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인 1995년 <국방백서>에 처음 명기됐지만 남북화해 분위기를 타고 2000년에 폐기됐다. “주적은 북한”이라는 윤 후보의 다섯글자가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퇴행적 구호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국방백서>가 처음 발간된 1988년에도 국방부는 당시 국방 목표를 “적의 무력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로 규정했다. 이때의 ‘적’은 문맥상 북한으로 읽혔지만 북한을 직접 거명하진 않은 것이다. 주적이라는 표현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국방백서에 처음으로 명시됐다. 1994년 3월 판문점에서 남북 특사 교환 실무접촉에서 박영수 북쪽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 뒤 국내 여론이 격앙되자, 여론을 달래는 차원이었다. 애초 ‘북한 주적’ 표현은 국내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2000년까지 매년 발간된 <국방백서>에 ‘주적’ 표현은 쭉 이어졌지만 격년 주기로 바뀐 <2004 국방백서>부터는 ‘직접적 군사위협’, ‘현존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등으로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주적 표현을 부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이상희 당시 국방장관은 2008년 9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방백서에 주적 표현을 다시 쓸 것이냐’는 질의에 “주적이란 표현을 다시 써서 우리 사회가 북한이 원하는 남남갈등에 빠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반대했다. 이명박 정부 첫해에 나온 <2008 국방백서>에서는 북한 주적 대신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라고 표현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이후 보수 쪽의 강력한 ‘주적 부활’ 요구가 있었지만 <2010 국방백서>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으로 표현했다. 당시 국방부 당국자는 ‘북한=주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배경에 대해 “외국의 경우 국방백서나 이와 유사한 공식문서에 주적 표현 사례가 없다”며 “국방백서가 대내외적으로 공개하는 정부의 공식 문서란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국방백서를 발간하는 세계 어떤 나라들도 주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미국은 ‘위협(threat)’이란 표현을 쓰고, 러시아도 ‘근본 위협’이란 표현을 쓴다. 독일은 냉전 시기에 ‘군사적 위협’이란 말을 사용했다. 통일 이후 독일은 불특정 위협을 뜻하는 ‘도전’이란 표현을 쓴다. 분쟁 중인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아랍, 중국과 대만 등도 적대국을 겨냥한 주적이란 표현을 피한다. 대만의 경우 중국을 '주요적인(主要敵人)으로 표현하다 1980년대부터 '최대 위협'으로 표현을 바꿨다. 중국은 교전 중인 상대를 적, 교전 가능성이 있는 상대를 가상 적, 전쟁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상을 대수(對手)로 구분한다. 중국군은 내부적으로 대만을 가상 적으로 간주하지만 공식적으로 이를 표현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주적이란 표현을 피한 이유가 또 있었다. 주적은 실제 교전상태에 있는 상대에 사용하는데 현재 정전 상태인 한반도 군사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군 내부의 지적이 있었다. <국방백서>가 북한을 주적으로 명시하면 북한 자체가 전쟁 대상이 되므로 당시 국방부는 북한 주적 표현 대신, 북한 정권과 북한군으로 적의 대상을 좁혔다. “북한 정권과 북한 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은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국방백서>가 나온 2016년까지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2018 국방백서>에서 “북한 정권과 북한 군은 우리의 적”이란 표현 대신 “우리 군은 대한민국의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윤석열 후보가 강조하는 ‘북한 주적’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이미 폐기해 사용하지 않는 용어인 셈이다.
북한은 심각한 안보 위협이자 화해 협력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이중적 존재다. 군사적으로 남북은 적대관계이며, 수십년간 남북 군대는 서로를 적으로 상정하고 작전계획을 세우고 훈련을 해왔다. 현재 군사작전상 북한군은 국군의 적이다. 예를 들어, 군사분계선에서 북한군 경계초소(GP)를 마주보며 근무하는 장병들은 북한군 지피를 ‘적 지피’라고 부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야전부대에서 정신교육을 할 때 병사들에게 주적 개념을 가르쳤다. 남북간 군사대치가 근복적으로 해소되지 않았는데 군사대비태세를 풀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북한이 주적이라는 개념을 <국방백서> 등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나왔지만, 현실적으로 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외국이 특정국가를 주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그게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적과 친구가 수시로 바뀌는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주적을 공개하는 게 자국의 운신을 제약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외국은 ‘위협’ 같은 용어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응한다.
현재 한국 국방비 중 무기관련 예산을 보면, 70%는 북한 위협에 대비하고 30%는 한반도 주변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하는데 쓴다. 최근 국내외 정세를 종합해보면, 앞으로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하는데 더 많은 국방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런데 ‘북한 주적’을 <국방백서>에 명시하거나 책임있는 정치 지도자가 이를 주장하면,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하는 데 지장이 생긴다. 한국이 북한 위협에 집중하지 않고 왜 우리를 겨냥해 무기를 사고 훈련을 하느냐는 반발이 주변국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주적은 일선 부대에서 ‘전시에 복수의 적을 상대할 때 제1의 적을 부차적인 적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전술적 개념이다. 현재 한반도가 전시상태가 아니며, 부차적인 적을 규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주적’이라는 용어는 쓸모가 없기도 하다. 주적에 대한 주변국의 비공식적 ‘항의’도 있었다. 북한이 주적이면 그럼 중국·일본은 ‘부적’이냐는 반발이었다. 일선 부대에서 사용할 전술적 용어를 정부나 국가 지도자가 국가전략 차원에서 사용하면서 빚어진 문제였다.
대북 선제타격, 주적 등 윤석열 후보의 말을 보고 있으면, 80년 전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조지 오웰은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쓴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이렇게 적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는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온다는 점이다.”
존 볼턴도 생각난다. 미국 외교안보 요직을 두루 지낸 존 볼턴은 대표적인 대북 강경론자다. 그는 그냥 매파가 아니라 ‘슈퍼매파’(Super-hawk)로 꼽힌다.
볼턴이 젊었던 시절 미국이 징병제였는데, 그는 베트남전 참전 대신 전투를 벌일 위험이 없는 주방위군에 입대했다. 볼턴 같은 사람을 미국에서는 ‘치킨호크’(Chickenhawk)라고 한다. 치킨은 겁쟁이, 호크는 강경파를 뜻하니 치킨호크는 ‘뜨거운 얼음’ 같은 형용모순이다. 이 말은 1970년 미국 시사풍자 코미디 진행자의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베트남 문제와 관련해 내 친구 가운데 스스로를 치킨호크라고 하는 녀석이 있는데,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라지만 자신을 빼고 우리끼리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미국 신문 <뉴햄프셔 가제트>는 치킨호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남성 공직 인물로서, 첫째 정치적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동시에, 둘째 개인적으로 전시 병역의무를 한사코 피하려는 인물.” ‘치킨호크’를 우리 말로 의역하면 ‘입 안보’쯤 되겠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악화됐을 때 치킨호크들이 강경 대응을 주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전 때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열린 안보대책회의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국방부 장관을 빼면 대부분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
‘주적’ 표현을 놓고 20년 넘게 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안되는 소모적인 논쟁을 벌였다. 윤석열 후보가 해묵은 ‘북한 주적론’을 다시 꺼내기엔 한반도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