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애틀랜타 에스케이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방문, 소개 영상을 시청한 뒤 인사말을 하고 있다. 애틀란타/연합뉴스
21일 오후(현지시각) 미 워싱턴에서 이뤄진 정상회담 결과 도출된 ‘한-미 정상 공동성명’은 지난 70여 간 이어진 한-미 관계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이정표로 역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두 나라 정상은 양국 관계가 “지역 및 세계 질서의 핵심 축(linchipin)”이며 그 “중요성은 한반도를 훨씬 넘어선다”고 밝히며 한-미 동맹이 명실상부 이전과 다른 ‘글로벌 동맹’으로 격상됐음을 선언했다. 이는 앞으로 한국이 감당해야 할 역할과 책임의 영역이 한반도와 북핵이라는 지역적 제약을 벗어나 사실상 ‘중국 견제’를 의미하는 △민주주의·인권 등 가치의 실현 △국제 규범의 준수 △첨단산업 분야의 협력 등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됐음을 뜻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 직후 공개한 ‘한-미 정상 공동성명’에서 “한-미 동맹은 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꾸준히 진화했다. 우리는 지역 및 세계 질서의 핵심축이자 양국 국민들에게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도록 하는 파트너십을 추구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 간 파트너십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기 위해 문 대통령을 워싱턴에서 맞이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적었다.
두 정상이 한-미 관계가 ‘새로운 장’에 접어들었다고 밝힌만큼 협력 분야가 이전보다 대폭 늘어났다. 성명은 한-미가 전통적 과제인 북핵 등 한반도 문제 뿐 아니라 남중국해와 대만 등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현안, 기후변동·코로나19 등 글로벌 과제, 6세대 통신(6G)·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협력, 인권과 민주적 가치의 증진 등에서도 힘을 합칠 것이라고 밝혔다. 동맹의 위상이 확대되면서 언급할 내용이 많아진 탓인지 공동성명의 분량은 이전 공동성명(2017년 6월30일)보다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를 상징하듯 바이든 대통령은 확대 회담을 시작하기 전 모두 발언에서 “단독 회담을 했을 때 너무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를 가지고 오래 논의했기 때문에 제 스태프가 너무 오랜 시간을 대화하고 있다는 메모를 계속 보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 이어 6월11~13일엔 영국 콘웰에서 열리는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도 참석하게 된다. 이 모임이 장차 한국·오스트레일리아·인도 등을 포괄하는 민주주의10개국(D-10)으로 성장하게 될지는 분명치 않지만, 앞으로 한국은 높아진 국제적 위상만큼 자유 민주주의 세계의 중요 국가로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여러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당국자는 이런 변화를 “한-미 동맹의 신기원이 시작되는 것”이란 말로 표현했다.
한-미 동맹의 이런 변화는 점점 치열해지는 미-중 대결 속에서 한반도란 공간이 차지하는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산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 등이 두루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왜 이런 변화가 이뤄졌는지를 둘러 볼 때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은 ‘미-중의 전략 경쟁’이란 무거운 그림자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애초 이번 회담을 앞두고 한-미 양국에선 바이든 행정부가 한국을 중국 견제를 위한 협력체인 ‘쿼드’에 참여하도록 압박할 것이란 전망이 이어졌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선택은 미묘하게 달랐다. 한국을 억지로 대중 포위전선에 끌어 넣는 대신, 동맹 자체의 위상을 강화하고 과감히 자율성을 부여하는 전략을 통해 스스로 나서 여러 지역적·세계적 부담을 짊어지게 한 것이다.
한국은 이번 공동성명을 통해 “국제 질서를 저해, 불안정, 또는 위협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하며 포용적이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지역을 유지”한다는 결의를 밝혔다. 중국을 날카롭게 비판한 4월16일 미-일 공동성명과 달리 중국의 국명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미국의 대 중국 견제 움직임에 한국이 ‘심상치 않은’ 한 발을 내디뎠다고 결론 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사실상 ‘강 건너 불 구경’할 수 있었던 남중국해와 대만 등 고도로 민감한 현안에 높아진 위상만큼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한국은 나아가 “한-미-일 3국 협력의 근본적 중요성”과 “쿼드 등 개방적이고, 투명하고, 포용적인 지역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며, 미국이 추구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함께하고 있다는 명확한 메시지도 전했다. 문 대통령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대중 요구가 강하지 않았냐는 취지의 질문에 “다행스럽게도 그런 압박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는 냉정히 평가할 때 절반만 맞는 말이다.
또 주목해야 할 지점은 미국이 이번 회담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대북 정책 등에서 한국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독자성’을 대폭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약을 담은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 뿐 아니라 “남북이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긴다”는 내용을 담은 4·27 판문점 선언까지 수용했다. 또, “남북 대화와 관여, 협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남북 관계의 자율성을 일정 부분 인정했다. 그밖에 1979년 만들어진 한-미 미사일 지침을 과감히 폐기하며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와 탄도중량의 제한을 없애는 획기적 결정도 내렸다. 한국 스스로 능력을 배양해 중국을 견제할 수 있게 길을 터준 것이다.
한-미 동맹이 이번 회담을 통해 미-일 동맹에 필적하는 포괄적 동맹으로 성장함에 따라 양국 관계 역시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공동성명을 보면, 탄소 배출 등 중요 현안에서 한국의 책임성이 강화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중국과 관련된 여러 현안에서 더 책임성 있게 미국과 공동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압박에 노출될 수 있다. 남북 관계가 풀리지 않은 탓을 무조건 ‘미국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게 됐다.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 이후 일본에선 공동성명에 대만 문제를 언급한 점을 놓고 “루비콘강을 넘었다”(다케우치 유키오 전 외무성 사무차관의 4월18일 <아사히신문> 인터뷰)는 평이 나왔다. 문 대통령의 이번 회담 역시 한국이 ‘자신의 루비콘’을 넘어선 결정적 순간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
길윤형 이완 기자, 워싱턴/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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