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25) 외교관이라는 직업
(25) 외교관이라는 직업
외교관 선발 제도가 2013년부터 바뀌었다.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하면 외교관에 임용되던 것과 달리 현재는 먼저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을 거쳐 1년간 국립외교원에서 연수를 마친 뒤에 최종적인 임용 여부가 결정된다. 2007년 8월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한 외무공무원 임용 후보자들이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선서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강창광 기자chang@hani.co.kr
젊은층은 해외근무에 부담
세계화 시대에 매력 떨어져
미국도 외교관 이직 많아 사익보다 공익에 헌신하고
사명감 높은 젊은 인재들
초일류 외교관으로 키우게
잡무 근절 등 일문화 바꿔야 나는 30년의 외교부 생활 가운데 18년을 해외에서 보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후진국에서 근무하게 되면 국제 뉴스를 듣기 위한 단파라디오가 필수품이었다. 다이얼을 돌려서 주파수를 맞춰가며 <비비시>(BBC) 국제방송에 귀를 기울이지만 한국에 관한 뉴스는 그리 자주 나오지 않았다. 국내의 생생한 뉴스와 동영상은 일주일에 한 번 본부에서 항공화물로 보내주는 서너 개의 비디오 녹화 테이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티브이(TV) 뉴스와 함께 인기 있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도 수록되어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새로 도착하면 제일 먼저 대사가 다 보고난 후에 대사관 직원들이 순서에 따라 집집마다 돌려서 보았다. 내가 중동의 예멘에 근무할 때는 한국에서 드라마 <모래시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새 테이프가 도착할 때마다 목을 빼고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만 가지고도 외국에서 간편하게 동영상을 볼 수 있으니 해외공관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는 일도 없어졌을 테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변화를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해외 근무를 하지 않게 된 덕분에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이 중대한 시기에 촛불집회로 분출된 민심과 일련의 사태 전개를 국내에서 매일 피부로 느끼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는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한국 사회가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 직접 느껴보지 못했다. 언론보도나 인터넷을 통해서 얻은 정보로서의 기억은 있지만, 살아 있는 생생한 느낌으로 현장에서 얻은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다. 국익을 생각하며 일하는 외교관으로서 우리 사회의 가장 간절하고 중요한 화두가 무엇인지를 말과 글로써가 아니라 직접 피부로 느끼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외교관 뺨치는 엔지오(NGO) 경쟁력 외교관들은 한때는 강점으로 인정받던 전문성에서조차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외국여행이 국내여행만큼이나 일상화되었고 외국에 관한 정보도 얼마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외교관으로서 체득한 전문성이라고 하는 것은 더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외국어 능력만 하더라도 대학교수나 민간기업 직원 중에 직업외교관보다 훨씬 더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 많아졌다. 외교부 직원이라 외국어를 엄청 잘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별로였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정부 내의 다른 부처 직원들 중에도 유창한 외국어 능력뿐만 아니라 해외 근무의 경험까지 갖춘 사람이 많이 늘었다. 외국에 관한 정보나 인맥에 있어서도 반드시 외교관들이 더 경쟁력이 있다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세계화를 다룬 명저로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정보의 원천은 더 이상 국제관계 전공 교수도 외교관도 아니고, 지구적인 규모에서 정보를 조감하는 데 익숙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엔 사무국에 나가서 오래 근무한 동료 외교관으로부터 유엔 직원의 신규채용 시험에 면접관으로 들어갔을 때 전세계에서 모인 다양한 경력의 지원자들을 면접해보니 그중에서 외교관이나 공무원 출신이 가장 경쟁력이 없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나라든 외교관 출신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고 외교부에 들어가서 어떤 부서에서 일했으며 해외 근무는 어디서 했다는 내용으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그런 경력만 가지고는 다른 지원자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더라는 것이다. 반면 가장 경쟁력이 있는 사람은 엔지오 출신이 많았다고 했다.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야에서 일하면서 자기만의 뚜렷하고 구체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데다 외국어 능력도 뛰어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해준 내 동료는 외교부에서도 매우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는 사람이었는데도 만약 자기가 공채로 유엔에 지원했다면 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전문성에서 외교관들의 경쟁력이 약해지는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안 처리와 일상적인 잡무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전문성을 키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평소에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쁜 걸까? 예전에 비해 일은 몇 배나 늘었는데 인원은 늘지 않았다든지, 국력이 비슷한 다른 나라에 비해 외교부 직원 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게 외교부 직원들이 바쁜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쓸데없는 자료 만들기'를 들겠다. 외교부는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사업 부서가 아니라 추상적인 정책을 다루는 정책부서다. 국가 간의 현안을 처리하고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대부분 ‘자료 만들기’로 이루어진다. 외교업무에서 자료 만들기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관례에 따라 습관적으로 자료를 만들고 고치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외교관 초년병 시절 처음으로 해외공관에 나가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본부에서 외교부 장관이 주재국을 방문해 외교장관회담을 하게 되었다. 내게는 공항 도착 후에 장관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주재국의 국내 정세 동향과 주요 현안에 대한 대응 방향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자료를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미 본부에서 자료를 만들어 장관에게 보고까지 마쳤을 텐데 비슷한 자료를 중복해서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고 불만 섞인 문제 제기를 했더니, 내 상사는 자기도 그 심정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그래도 장관이 오는데 자료도 없이 빈손으로 공항에 나갈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주한 외국대사관의 외교관들이 2015년 6월8일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한국 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현황과 한국 정부의 대응 조치에 대한 우리 정부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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