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1962년 2월21일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을 만나 회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 회담에서 양국 국교정상화를 위한 청구권 자금의 총액 규모를 비밀리에 합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일본 정치의 격동의 순간을 여러 차례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2009년 9월 민주당의 정권교체다. 1955년에 탄생한 자민당 정권은 1993년 8월부터 11개월간 야당에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고는 54년 동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자민당 정권이 힘없이 무너졌으니 일본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정치에 비교하자면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직후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자민당의 집권 기간 동안 굳어져버린 관행과 구태를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정책을 펼쳐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충만했다.
새로 출범한 민주당 내각에서 외상으로 발탁된 오카다 가쓰야(현재 민진당 상임고문)는 2009년 9월16일 외무성에 들어서자마자 야부나카 미토지 사무차관에게 미-일 간의 ‘밀약'을 조사하라는 내용의 명령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첫번째 일정을 시작했다. 신임 각료가 처음 출근하면 사무차관 이하 주요 간부들과 먼저 상견례를 겸하여 인사를 나눈 뒤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 그때까지의 관례였다. 그런데 오카다 외상은 A4 용지 한 장에 인쇄된 조사명령서를 사무차관에게 전달하는, 딱딱하고 긴장된 의식(儀式)으로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외무성 간부들은 물론, 출입기자들도 이제 자민당 정권 때와는 다른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2005년 한국 정부의 공개로 확인된 한일회담 교섭 문서의 일부인 ‘김-오히라 메모’. <한겨레> 자료사진
성북동 주택에서 이뤄진 독도밀약?
오카다 외상이 조사를 지시한 밀약 가운데 하나는 유사시 미군의 핵무기 반입에 관한 것이었다. 미군의 핵무기가 많을 때는 1200발이나 배치되었을 정도로, 오키나와는 핵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 본격화된 오키나와 반환 교섭에서 일본은 미국이 모든 핵무기를 철수한 상태로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일단 일본의 요구에 동의했지만 유사시에는 미군이 언제든 다시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반입할 수 있도록 일본이 보장해주기를 원했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의 입장에서 이를 거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는 밀약의 형태로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1969년 11월 개최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회담 도중에 양쪽 대표단을 회담장에 남겨둔 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둘이서 바로 옆방으로 잠시 자리를 옮겨 미국이 원하는 대로 유사시 오키나와에 핵무기 반입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합의의사록에 서명했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공식적으로 합의된 내용들은 공동성명으로 발표되었지만, 별도로 체결된 비밀 합의의사록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 뒤 오랫동안 언론과 학계에서는 이러한 밀약의 존재 가능성이 지적되어왔으나,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핵무기의 제조와 보유, 반입을 금지하는 ‘비핵 3원칙'을 대외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점점 확산되었고, 정부에 대한 이러한 불신감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오카다 외상이 진상조사를 명령했던 것이다. 조사 결과는 6개월 뒤인 2010년 3월9일 발표되었고 일본 정부는 처음으로 밀약의 존재를 인정했다.
밀약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1962년 11월12일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청구권 자금의 총액 규모에 합의한 ‘김-오히라 메모’가 가장 유명했는데, 2005년 8월 한국 정부가 한일회담 교섭 문서를 전면 공개하면서 드디어 그 존재가 외부로 드러났다.
일 정권교체로 외상 된 오카다
“미-일 밀약 조사하라” 일성
‘유사시 핵반입’ 69년 밀약 확인
암호명 ‘요시다’ 정치학자 개입
민감 사안은 때로 비선 통한
교섭이나 밀약 체결 불가피
지속적 효력 발휘하려면
공조직의 ‘제도적 기억’ 돼야
그밖에도 최근에는 한-일 간의 독도밀약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정치경제학자 노다니엘씨는 <독도밀약>이라는 책에서 국교정상화를 앞둔 한·일 양국이 1965년 1월 독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 곧 해결을 의미한다'는 내용의 밀약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 안에 있는 홈 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종락 한일은행 전무(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가 일본 쪽 밀사인 우노 소스케 의원을 만나 A4 용지에 타이핑된 4개 항에 합의했다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주장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안겨준다.
밀약의 4개 항목에는 한·일 양국은 서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상대방이 반론을 제기하는 것에 이의가 없으며, 한국은 독도의 현상을 유지하는 동시에 경비 병력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건설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독도에 관한 양국 정부의 행동을 보면 일부 이에 부합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밀약의 내용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다.
암호명 가졌던 30대 학자의 비극
밀약의 존재 여부는 그 특성상 마지막까지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당시 양국 간에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권 분쟁에 관하여 일단 현상을 유지하면서 미래의 세대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에 관해서도 1980년대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 최소한 일본의 총리, 관방장관, 외상의 참배는 자제한다는 밀약이 있었다고 하지만 일본 쪽이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독도밀약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된 김종락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 이후 부정축재 등의 명목으로 김종필, 이후락 등 박정희 정권의 실세들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서 밀약 문서를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원본 문서가 사라져버렸다면 밀약의 존재 여부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독도밀약이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든 아니든, 나는 외교부에서 일본 관련 업무를 담당하면서 독도밀약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업무 자료 속에서 그러한 내용을 본 적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배나 상사로부터 그 명칭이나 합의 내용을 전해 들은 적도 없다. 김종락씨가 이미 밀약 문서를 소각해버린 뒤에 외교부에 들어가서 일했으니 밀약의 존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는 1969년 11월 양국 정상회담에서 “유사시에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반입한다”는 내용의 비밀 합의의사록에 서명했다. 조세영 교수 제공
그러나 만일 독도밀약이 후대에 계속 승계되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면 원본 문서의 소각과 관계없이 그 내용은 외교 담당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인수인계되었을 것이다. 또한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의 이동원 외무장관이나 김동조 주일대사가 밀약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설사 독도밀약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정부 간의 공식 협상을 능가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밀약에는 비선의 개입이 불가피한 경우가 많다. 앞서 소개한 오키나와 핵무기 반입 밀약에는 당시 교토산업대학 교수이던 39살의 국제정치학자 와카이즈미 게이가 사토 총리의 밀사로 활약했다. ‘요시다'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한 와카이즈미는 백악관의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을 상대로 비밀접촉을 거듭하여 닉슨-사토 비밀 합의의사록을 만들어냈다. 국민적인 염원인 오키나와 반환을 성사시키려면 밀약의 체결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훗날 핵무기 반입을 초래한 역적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동분서주했다.
1969년 닉슨-사토의 ‘유사시 핵 반입’ 밀약 내용 중 일부. 일본 외무성 누리집
1972년 오키나와 반환이 실현된 뒤 고향으로 낙향해 일체의 대외활동을 자제하던 와카이즈미는 미-일 동맹과 미국의 핵우산에 안이하게 의존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탓에 스스로의 안전보장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잊은 채 경제대국이라는 달콤한 현실에 자족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주권국가로서의 긍지를 잊어버린 일본 사회에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관계했던 밀약의 존재를 상세히 공개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1994년 <달리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여 비밀교섭의 전모를 상세히 밝혔다. 그는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던 외교 비밀을 공개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1996년 7월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촉망받던 젊은 국제정치학자를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밀 합의의사록 문서는 40년 동안 베일에 싸여 있다가 2009년 12월 사토 총리의 차남(자민당 정치인으로 운수상을 역임한 사토 신지)에 의해 갑자기 공개되었다. 1975년에 가족들이 사토 총리의 유품을 정리하다 서재의 책상 서랍에서 밀약 문서를 발견하고 외무성에 인계하려고 했으나 공식 외교문서가 아니기 때문에 인수할 수 없다는 외무성의 답변을 듣고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보관했던 것이라고 했다. 밀약의 존재를 부인해온 외무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사토 총리의 개인적인 문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싶었을 것이다.
와카이즈미의 자살에는 자신의 책이 출판된 뒤에도 밀약의 존재를 계속 부인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국가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비선을 활용하여 비밀 교섭을 추진하고 밀약을 체결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공식적인 정부조직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밀약의 존재는 금세 잊히고 그 내용도 외교정책으로 제대로 계승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공식 정부조직 속에서 제도적인 기억(institutional memory)으로 자리잡지 않으면 밀약의 효과는 지속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일 신어업협정은 ‘비선’ 성공 사례
한국에서도 밀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지만 비선이 활용된 경우가 있었다. 1998년 10월 타결된 한-일 신어업협정 교섭에는 한·일 양쪽의 비중있는 정치인들이 교섭의 대표로 투입되었다. 한국은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김봉호 국회부의장이었고, 일본은 홋카이도 출신으로 어업 분야의 실력자인 사토 고코 의원이었다. 이들은 양국 어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어업협정 교섭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치적 배경을 활용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비선을 통해 추진된 교섭이었지만 나중에 교섭의 경위며 분위기, 교훈까지 모두 양국 외교당국에 계승되었다. 그 비결은 두 사람의 배후에서 실제 교섭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모든 작업을 양국 외교부가 담당했다는 데 있었다. 매번 교섭할 때마다 외교부의 실무자들이 함께 참여했고 그 내용은 세부사항까지 모두 문서로 본부에 보고되었다. 양국 정부가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두 사람의 정치인은 주연배우 역할을 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섭의 내용과 결과가 모두 양국의 정부조직 내에서 제도적인 기억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너무 커서 타협점을 찾기 어렵고 국내적으로도 민감한 외교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비선에 의한 교섭이나 밀약의 체결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변칙적인 외교 수법을 동원하더라도 그 결과가 합리적인 국익에 부합하고 중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공식 외교조직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전문적인 관료집단을 배제한 채 정치 지도자가 외교 교섭을 전횡하게 되면 단기적인 정권의 이익에 편향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