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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그날 일본 기자는 왜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렸을까

등록 2016-04-22 19:32수정 2016-04-24 10:11

외교관은 엄격한 계급이 있는 집단이므로 계급에 따라 면담 상대방이 정해진다. 외교통상부 박석환 제1차관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2011년 11월22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외교관은 엄격한 계급이 있는 집단이므로 계급에 따라 면담 상대방이 정해진다. 외교통상부 박석환 제1차관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2011년 11월22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5) 주재국 정보 수집하기
외교관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외국에 주재하면서 현지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신문이나 책 같은 공개 자료를 이용하거나 또는 그 나라의 관료,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 중요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 가서 근무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만나는 일이 쉬울 수도 있고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일본은 사람을 만나기가 아주 수월한 곳이다.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면담을 신청했는데 못 만났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거꾸로 중국은 사람 만나기가 상당히 어려운 나라다. 어렵게 사람을 만나더라도 좀처럼 깊은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 미국은 개방된 선진 사회이지만 일본만큼 사람 만나기가 쉬운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영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새로 온 총영사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신임 인사차 면담을 신청했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 좀처럼 성사되지 않았다. 비서실에서 여러 차례 재촉을 해봤지만 주지사실은 단순한 인사를 위한 면담은 하지 않는다며 나중에 실제 용건이 있을 때 다시 신청하라는 답변만 보내왔다. 괜한 인사치레로 서로 시간 뺏기지 말고 용건이 있을 때 만나자는 이야기인데, 미국 사회가 아무리 실용적인 면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너무 빡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선 기밀누설죄 처벌 흔해

중국은 공산당 일당지배의 권위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도 제한되어 있고 공개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신화서점 같은 큰 책방에 가보면 출판물은 많지만, 중국의 내부 사정을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책은 드물다. 각종 연구소들도 대개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오는 자료를 가지고 중국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당이나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이 폐쇄적이므로 학자를 비롯한 외부의 전문가들도 깊이 있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당 간부나 관료 등 내부 정책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한데, 문제는 마음먹은 만큼 이들을 잘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베이징의 한국대사관에 근무해 보니 중국 측 관계자를 만나려면 원칙적으로 그들이 소속한 기관의 외사판공실을 통해서 면담 신청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외사판공실이란 일종의 대외창구로서 국제협력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다. 외부 면담 요청을 전부 이곳에서 처리하면서 직원들의 대외활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면담 대상자와 직접 연락해서 약속을 잡는 경우보다 훨씬 까다로워지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중국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면담 약속이 되어도 혼자서는 잘 안 만난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나 연구소 관계자들을 만나러 가보면 거의 예외 없이 두세 명 이상이 함께 나온다. 물론 면담 내용을 기록할 부하 직원을 데리고 나오거나 업무상 관련이 있는 직원이 동석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흔한 일이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단독 면담을 꺼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경제 관련 연구소의 연구원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작은 회의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에 면담 상대가 혼자 앉았다. 그런데 회의실의 출입문 안쪽 간이의자에 3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 직원이 앉아서 면담 내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인상으로 볼 때 연구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비서나 안내원도 아니었다. 면담이 끝나고 우리가 일어서자 그 사람은 출입구 바깥쪽으로 나가서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출입문 쪽으로 가다가 잠시 멈추어서 한두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그 사람은 화들짝 놀라서 얼른 다시 안쪽으로 들어와 우리를 주시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사람의 역할은 면담 과정에서 혹시 민감한 내용은 없는지 감시하는 일인 것 같다. 일단 면담이 끝난 줄 알았는데 우리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무슨 내용인가 싶어서 급히 되돌아 들어온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공무원이나 학자들이 외국에 대한 기밀누설죄로 처벌받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다. 한국과 관련된 경우만 하더라도 리빈 전 주한대사나 사회과학원의 김희덕(진시더) 박사가 처벌받은 사례가 있었고, 후진타오-김정일 정상회담의 통역을 맡았던 대외연락부의 장류청 한반도 담당 처장은 사형까지 당했다. 국내 사정이 이렇다보니 중국 측 관계자들이 좀처럼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것도 이해는 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외국 대사관 사람을 괜히 단독으로 만났다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내부적으로 의심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두 명 이상이 함께 만나서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두는 편이 안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마다 현지인 만나는 법 제각각
중국, 외사판공실 둬 대외활동 통제
면담 자리엔 두세 명이 함께 나타나
일본, 외교관 노릇 가장 수월한 곳
정계 인맥 쌓는 데 상당한 공 들여

외교관은 계급 따라 상대 정해져
정·관계 뒷얘기 통로는 언론인
외교관 일은 현장 취재기자와 닮아
면담 보고서 쓰려면 기억력 필수
종이 냅킨에 키워드 적어두기도

현지 언론과 접촉하는 일도 외교관의 주된 업무다. 지난달 11일 서울 중구 주한미국대사관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현지 언론과 접촉하는 일도 외교관의 주된 업무다. 지난달 11일 서울 중구 주한미국대사관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사가 장차관을, 공사는 차관보를 상대

일본은 외교관의 입장에서 굉장히 일하기 좋은 곳이다. 우선 공개된 정보가 넘쳐난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과 공개보고서들만 챙겨 봐도 상당히 깊이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있다. 오히려 시간이 부족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일단 만나면 자유롭게 깊은 이야기도 잘 해준다. 1980년대 중반에 내가 처음 일본으로 해외연수를 떠날 때 외교부의 대선배로부터 우리가 미국의 정책결정 과정에 깊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일본의 정책결정에는 깊이 들어가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열심히 공부해 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아마도 일본에서는 정·관계의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서 내부사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고 실제 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일본은 관료의 힘이 막강하지만 정책의 큰 흐름은 관료가 아닌 정치인들이 결정하기 때문에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의 대사관들은 정계 인사들과 인맥을 쌓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투입한다. 주일 한국대사관에서도 정치인들과의 접촉은 중요한 업무의 하나다. 대사나 공사쯤 되면 거물급 정치인을 만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대사관에서 중간 허리 구실을 담당하는 참사관은 서울의 본부에서는 과장급에 해당하는데 일본에서는 본인의 역량만 받쳐주면 얼마든지 정치인을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실무자인 서기관급에서도 정치인과 만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주미대사관에 의회과가 따로 있을 정도로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한 나라이지만 대사 이외의 직원들이 정치인을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중국에는 국회와 유사한 조직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있지만 진정한 대의정치기관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는 사실상 정치인을 상대하는 업무 자체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외교관은 엄격한 계급이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주재하고 있는 나라의 외교부 관계자를 만날 때는 계급에 따라 상대가 정해진다. 주일대사관의 경우에는 일본 외교부를 상대할 때 대사가 장관이나 차관, 그 아래의 공사가 차관보나 국장, 중간 간부인 참사관 또는 1등서기관이 과장을 만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되어 있다. 이러한 위계질서를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정치인을 만날 때는 그런 규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대사가 장관급 이상의 거물 정치인들을 주로 만나고 그 밖에는 당선 횟수나 정치적 비중에 따라 공사 이하의 직원들이 적절히 나누어 맡는 것이 기본이다. 때로는 참사관급에서 중요한 정치인을 만나기도 하는 등 얼마든지 예외가 있다.

2009년 일본의 정권교체는 54년에 걸친 자민당 장기독주 체제 속에서 형성되었던 파워엘리트 집단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는 장관 자리를 여당 정치인들이 돌아가며 맡고, 부처별로 차관급 자리에 2명에서 6명까지 여당 정치인들이 들어온다. 그동안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정치인들이 한꺼번에 이런 자리들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일본의 국내정치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셈이었다. 주일대사관도 민주당 의원들과 새롭게 인맥을 구축하기 위해 모든 직원들이 전방위적으로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공사참사관(공사급 참사관이라는 의미의 계급)으로 근무하던 나도 하루에 몇 번씩 국회의원회관을 드나들며 민주당 정치인들을 만나서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다.

정계나 관계의 뒷얘기를 가장 실감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언론인들을 통해서다. 주일대사관에서도 언론인들과의 인맥은 아주 중요한 자산이다. 대사가 언론사의 사주나 사장급을 만나고 공사가 편집국장이나 부장급을 주로 만난다. 참사관 이하 직원들은 부장급에서부터 일선 취재기자까지 다양하게 접촉한다. 그중에서도 서울특파원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기자들은 중요한 접촉 상대다. 이들을 만나서 일본의 국내정치 전망이나 일본 외교부의 내부 동향 같은 이야기들을 듣는다. 사람들 사이의 친소관계나 인사 발령의 숨은 배경 같은 이야기들도 유용한 정보다.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보고서를 쓰는 일을 하다 보면 외교관의 업무가 일선 취재기자들이 하는 일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리 파한 뒤 닥치는 대로 메모해둬야

사람을 만났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억력이다. 면담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공식적으로 면담을 할 때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직접 메모하거나 동행한 부하 직원이 기록하면 되므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식사를 함께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편하게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메모를 하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긴장해서 말을 조심하게 된다. 솔직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려면 수첩도 꺼내놓지 말고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가벼운 잡담도 하면서 긴장을 풀도록 하는 게 좋지만 상대방의 이야기 중에 중요한 부분은 머릿속에 정확히 기억해 두어야 나중에 보고서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기억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테이블 아래 손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게 조금씩 메모를 하는 경우도 있고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몰래 녹음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내 경우에는 식탁에 놓인 종이 냅킨이나 종이로 된 컵받침의 뒷면에 키워드만 조금씩 표시하는 방법을 많이 썼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수단일 뿐이고 어떻게든 머릿속에 기억해두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과 헤어지고 나면 돌아오는 차 안에서든 어디서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바로 중요한 내용을 수첩에 기록해 두어야 한다.

주일대사관에 근무할 때 어떤 일본 기자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현안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한국의 입장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다음날 일본 신문에 그 내용이 상당히 큰 기사로 실렸다. 내가 놀랐던 것은 그 기자가 식사하는 동안 전혀 메모를 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설명한 내용을 아주 정확하게 기사에 담아냈다는 사실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식사 도중에 그 기자가 유난히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렸는데 틀림없이 화장실에 갔을 때마다 그 안에서 메모를 한 것 같았다.

사람을 만나는 데는 이런 애환도 따르지만 외교관 생활의 큰 보람 중의 하나는 역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외교관은 주재하고 있는 나라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누구에게든 신분을 밝히고 만나고 싶다고 하면 호의적으로 검토해준다.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갖는 국제적인 신용도 덕분이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중국·예멘·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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