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외교

“풍경이고 뭐고 뭘 봤는지 아무 기억도 없대이”

등록 2016-04-08 18:52수정 2016-04-10 11:01

핵안보정상회의를 마치고 멕시코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2일(현지시각) 오후 멕시코시티 베니토 후아레스 공항에 도착해 영접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핵안보정상회의를 마치고 멕시코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2일(현지시각) 오후 멕시코시티 베니토 후아레스 공항에 도착해 영접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4) 대통령의 해외순방
대통령이 한번 해외순방을 하면 100명이 넘는 인원이 수행하고 수십억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이처럼 큰 비용을 들여서 정작 얻어내는 성과가 무엇이냐고 인색한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는 전 부처를 동원해서 성과사업을 발굴해 내느라 애를 쓴다. 정상회담에서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해묵은 현안이 얼마나 많이 해결되었는지, 경제 분야는 어떤 구체적 결실이 있었는지 따위의 외교적 성과가 평가 기준이 된다. 그러나 해외순방 행사를 준비하는 의전 실무자들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차량과 숙소가 제일 중요하다.

특별기가 공항에 착륙하면 대통령은 트랩을 내려와 방문국 정부에서 나온 고위급 환영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대기하고 있는 차량에 탑승해 숙소로 떠난다. 외국의 국빈이 탑승해 이동하는 차량 행렬을 모터케이드(motorcade)라고 하는데, 브이아이피(VIP) 차량 이외에 경찰 사이드카, 의전 선도차, 경호차, 고위 수행원 차량 등 10여대의 승용차와 필수 수행원용 미니버스 2~3대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실무 수행원들은 대통령이 떠난 다음에 대형 버스를 타고 단체로 숙소로 이동하므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모터케이드에 포함되어 함께 이동해야 하는 수행원들은 첫 번째 행사인 공항 도착 행사부터 바짝 긴장해야 한다. 불과 5분 남짓한 짧은 행사 시간 동안에 재빠르게 특별기의 후문 트랩으로 내린 뒤 길게 늘어선 차량 대형 속에서 지정된 차를 찾아 신속하게 타야 한다. 일단 대통령이 타고 나면 모터케이드는 지체 없이 출발하기 때문에 탑승 위치를 못 찾고 헤매다가는 차를 놓치기 십상이다.

영빈관은 국력과 문화의 가늠자

100미터도 넘는 길이의 모터케이드가 교통이 통제된 거리를 경찰 사이드카의 호위 속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논스톱으로 질주한다. 비록 수행원 신분이지만 그 속에 앉아 차창 밖으로 연도에 서서 손을 흔드는 시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뿌듯해져서 마치 자기가 브이아이피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대통령은 방문 기간 중 숙소 건물에서 열리는 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에 모터케이드로 이동한다. 행사마다 수행원의 참석 범위가 다르므로 그에 맞추어 모터케이드 탑승 계획도 다르게 짜야 한다. 정확한 탑승 인원을 정확한 시간에 이동시켜야만 행사가 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순방 행사에는 차량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기간에는 대통령이 숙박하는 장소가 곧 청와대의 역할을 하는 곳이 된다. 방문국에서 영빈관을 제공하는 경우에는 그곳에서 숙박한다. 미국은 백악관 맞은편의 블레어하우스가 국빈 전용 영빈관이며, 중국에서는 조어대(댜오위타이)가 외국 정상의 숙박시설로 제공된다. 일본은 1909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한 화려한 서양식 석조 건물을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5년에는 교토에 일본 전통 건축양식의 영빈관을 추가로 개관했다.

대통령이 영빈관에서 묵는 것은 방문국으로부터 최고의 의전적 예우를 받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수행원들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영빈관은 품격이 있는 대신 국가가 운영하는 탓에 아무래도 일반 호텔보다는 지내기가 불편하고 경비가 엄중하다 보니 마음대로 바깥을 출입하기도 어렵다. 숙소 내에 레스토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칵테일이라도 한잔할 곳도 마땅치 않다. 룸서비스를 이용하기도 불편하다.

그래서 수행원들은 자기 숙소가 영빈관이 아닌 일반 호텔에 배정되는 게 더 편하다. 영빈관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숙박을 하는 대상은 대통령과 공식 수행원 이외에는 근접경호나 부속실 근무자 등 필수요원들로 제한된다. 나머지 대표단은 영빈관에서 가까운 일반 호텔에 묵으면서 필요할 때마다 차량을 타고 영빈관을 출입한다.

어느 나라든 영빈관은 웅장하고 기품과 전통이 잘 느껴지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고급이라도 일반 호텔에 묵는 것과는 다른 각별한 감회를 갖게 된다. 영빈관의 건물이나 실내 장식, 각종 전시품과 제공되는 서비스를 보면서 그 나라의 국력 수준과 문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청와대에 영빈관이라는 이름의 시설이 있지만 그곳은 대규모 연회나 회의를 위한 공간이고 숙박시설은 없기 때문에 한국에는 외교용 시설로서의 영빈관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비추어 볼 때 이제는 영빈관 건설을 검토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1996년부터 2년간 청와대 의전비서실에 근무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해외순방 행사를 6차례 수행했다. 이때 15개국을 방문하면서 현지의 최고급 호텔에서 묵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곳이 별로 없다. 유일하게 브라질에서 머물렀던 호텔이 협소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수행원들이 맡긴 세탁물이 잘못 배달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일일이 호텔 쪽에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대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모두들 자기 방에 잘못 배달되어 온 세탁물을 문밖 손잡이에 걸어 놓고 복도를 돌아다니며 다른 객실 손잡이에 자기 세탁물이 걸려 있지 않은지 찾으러 다니는 사태가 벌어졌다. 브라질리아가 내륙에 건설한 행정수도이다 보니 상업적 경쟁이 없어서 호텔도 몇 안 되고 서비스 수준도 낮은 탓이라고 했다.

100미터 넘는 모터케이드 행렬
행사마다 수행원 참석 범위 달라
매번 탑승계획 다르게 짜야
필수요원까지만 영빈관 숙박
나머지 수행원은 근처 호텔 이용

가까운 거리는 당일치기 순방
외교부장관은 전 일정 밀착 수행
대통령 눈도장 찍을 확실한 기회
특별기 함께 타는 수행원들
속옷 따위 들고 다니는 불편함도

멕시코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3일(현지시각) 멕시코시티 국립인류학박물관을 찾아 박물관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멕시코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3일(현지시각) 멕시코시티 국립인류학박물관을 찾아 박물관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수행원 짐은 전날 미리 맡겨야

반면 영빈관에 머물렀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인도에서 묵었던 영빈관 하이데라바드 하우스는 붉은 빛깔을 띤 돌로 외벽을 장식한 웅장한 건물이었다. 그곳에는 큰 키에 전통 복장을 한 근무자들이 음식도 서빙하고 잡다한 심부름도 해주었다. 대리석으로 치장된 건물 내부에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그중엔 식민지 시절에 영국의 고관들이 야외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고 곁에서 인도 사람들이 시중을 들고 있는 그림이 눈에 띄어 놀랐다. 인도인은 자존심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외빈이 투숙하는 국가시설에 그런 그림을 걸어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정상외교가 일상화된 요즈음엔 가까운 거리는 굳이 숙박을 하지 않는 당일치기 해외방문도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1992년 11월8일 노태우 대통령이 당일 일정으로 교토를 방문해서 미야자와 일본 총리와 회담을 하고 돌아온 것이 처음이다. 그 후에는 2008년 12월 후쿠오카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과 2009년 6월 일본 실무방문 때 이명박 대통령이 당일치기 일정을 소화했다. 이때는 따로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 대표단의 규모를 최대한으로 줄여서 현지의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에 잠시 머물면서 업무를 처리했고, 대통령과 고위 수행원들은 대사관저나 총영사관저를 대기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대통령 해외순방을 수행하는 인원은 공식 수행원과 비공식 수행원, 경호요원 등을 합쳐 100명이 넘는 규모다. 이들은 대부분 대통령이 탑승한 특별기로 함께 이동하므로 경호처에서 화물 검색을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특별기에 탑승하는 수행원들은 개인 수화물을 잠금을 해제한 상태로 출발 하루 전에 미리 지정된 장소에 가져다 맡겨야 한다. 경호처는 수집된 여행가방을 일일이 열어서 꼼꼼히 검색한 뒤에 출발 당일 특별기에 적재한다.

첫 번째 방문국에서 행사가 모두 끝나고 다음 방문지로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수행원은 출발 전날 저녁에 짐을 숙소 호텔 내의 지정된 장소로 가져다 두어야 한다. 여기서도 경호요원들이 밤샘 작업을 하며 화물을 검색해서 특별기로 일괄 운송한다. 짐을 미리 내놓고 나서 하룻밤을 더 지내려다 보니 다음날 아침에 갈아입은 속옷이며 세면도구 같은 것을 서류가방에 적당히 넣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생기기도 한다.

나의 청와대 근무 경험으로 볼 때 대통령의 해외순방 기간에는 국내에서보다 대통령과 가까이 접할 기회가 많아진다. 국내에 있는 동안에는 대통령이 이중 삼중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청와대에서 집무하기 때문에 대통령을 가까이 접하는 기회는 굉장히 제한된다. 장관들도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려면 청와대의 담당 비서실을 통해 미리 일정을 잡아야 한다. 재임 기간 중에 대통령에게 단독보고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장관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수석비서관들조차도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의 위치가 떨어져 있는데다 짧은 거리라도 자동차를 타고 두세 곳의 경호 초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직접 대면보고를 하는 기회는 많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해외순방 때는 길게는 일주일 이상을 대통령과 동행하며 숙소도 같은 호텔이다 보니 대표단에 포함된 장관들이나 수석비서관들이 국내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많아진다. 행사 때마다 대통령과 함께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행사의 막간을 이용하여 대통령 숙소의 거실 같은 곳에서 짬짬이 보고를 할 수도 있다. 공식 일정이 없는 조찬이나 오찬·만찬 기회에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 하며 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국내 골칫거리 잠시 잊는 시간

누가 뭐래도 최고 수혜자는 역시 외교부 장관이다. 외교부 장관은 국내에서도 각종 외교행사 때문에 다른 장관들에 비해 대통령을 직접 만나거나 보고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해외순방 기간에는 대통령의 시간이 모두 외교에 집중되므로 외교부 장관이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몇 배나 더 늘어난다. 직장생활에서도 상사와 함께 해외출장을 다녀보면 국내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가까워지는 법인데, 대통령과 함께 해외순방을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의 입장에서 해외순방은 어떤 것일까? 외국을 방문해서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화려한 행사에 참석해 보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내의 골치 아픈 대소사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2~3일마다 방문지를 옮겨 다니며, 많을 때는 하루에 10개 가까운 행사를 치러내야 하는 해외순방은 상당한 격무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몸은 해외에 있더라도 국내 상황에 대한 관심과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 후 몇 년이 지나서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그곳의 총영사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해외 방문에 대해서는 현지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이 예우 지침에 따라 지원하게 되어 있다. 예전에 의전비서실에서 근무한 인연도 있고 함께 온 비서실, 경호실 직원들과도 낯익은 사이였기 때문에 총영사관에서는 내가 일정을 수행하게 되었다.

수행원들과의 편안한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가 대통령 재임 중에 해외순방도 많았고 좋은 곳에도 많이 가보셨을 텐데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질문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비행기로 현지에 도착하고 나면 정해진 대로 차 타고 가서 회담하고 연설하고 다시 호텔로 차 타고 돌아오는 식으로 쳇바퀴 도는 일정인데, 그러다 보니 내가 어디 가서 뭘 봤는지 그 나라 풍경은 어땠는지 그런 것들은 전혀 기억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정상회담에서 어떻게 대응할 건지, 연설 때 어떻게 분위기를 잡을 건지, 다음 일정은 무엇이 핵심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모터케이드로 이동하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리라. 역시 대통령으로서 해외순방을 하는 것은 정상외교가 주는 부담감 때문에 개인적인 해외여행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 회부터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중국·예멘·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단독 인터뷰] 조국 “이재명 대통령 돼도 혁신당 필요…합당 없다” 1.

[단독 인터뷰] 조국 “이재명 대통령 돼도 혁신당 필요…합당 없다”

윤석열, 15일 검찰 출석 불응…16일 2차 소환 통보 방침 2.

윤석열, 15일 검찰 출석 불응…16일 2차 소환 통보 방침

‘직무정지’ 윤석열 월급 2124만원…못 받게 하려면 어떻게? 3.

‘직무정지’ 윤석열 월급 2124만원…못 받게 하려면 어떻게?

한동훈 내일 사퇴…국힘 다섯달 만에 또 비대위로 4.

한동훈 내일 사퇴…국힘 다섯달 만에 또 비대위로

“탄핵되면 눈물이 한반도 적실 것”…친윤계 의총서 반대 주장 5.

“탄핵되면 눈물이 한반도 적실 것”…친윤계 의총서 반대 주장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