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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친구로 남기 바란다면 만나지 말라”

등록 2016-03-25 19:17수정 2016-03-27 09:53

1949년 8월7일 진해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왼쪽 사진 가운데) 대만 총통의 정상회담. 장제스 총통은 정부 수립 후 1년도 되지 않은 신생 대한민국이 처음 국빈으로 맞이하는 외국 정상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1949년 8월7일 진해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왼쪽 사진 가운데) 대만 총통의 정상회담. 장제스 총통은 정부 수립 후 1년도 되지 않은 신생 대한민국이 처음 국빈으로 맞이하는 외국 정상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2) 정상회담
한때 국제 외교무대의 주인공은 외무장관들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 회복을 위해 소집된 비엔나 회의를 이끌었던 쟁쟁한 인물들인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영국의 캐슬레이, 프랑스의 탈레랑은 모두 외무장관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존재감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주역이 되는 정상외교의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상외교는 어땠을까. 조선시대에 국왕이 정상외교를 하러 외국에 나갔던 일은 아마도 없을 테고, 외국의 정상이 조선 땅을 밟은 것은 병자호란 때 쳐들어온 청 태종 홍타이지밖에는 없는 것 같다.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59일을 버티던 끝에 1637년 2월24일 성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의 표시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 조선시대 유일한 정상외교의 씁쓸한 한 컷이었다.

5년간 89개국, 해외 순방 챔피언은 이명박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뒤늦게 서구식 근대외교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그 후 식민지로 전락하여 1945년에 해방되기까지 외교의 공백기가 계속되었다. 명색이나마 근대외교라는 것을 해본 경험은 고작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외교의 안목과 내공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기 나라의 외교사를 깊이 공부해야 하는 법인데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의 외교관들은 공부할 만한 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셈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외교관들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대전, 2차대전 등 굵직한 사건에 관련된 자국의 외교기록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다양한 각도로 분석하고 교훈을 끌어내는 데 비해 한국은 남의 기록을 보며 간접적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상외교 제1호는 1949년 8월7일 진해에서 개최된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대만 총통의 정상회담이었다. 장 총통은 정부 수립 후 1년도 되지 않은 신생 대한민국이 처음 국빈으로 맞이하는 외국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수도 서울이 아닌 진해에서 회담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치안 문제를 걱정한 이 대통령이 진해에서 개최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의 혼란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상황이라 군부대가 있는 진해가 정상회담 장소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불과 40일 전에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벌어졌을 정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최초의 정상회담에서 우리 측이 사용한 언어는 뜻밖에도 영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창한 영어로 회담을 진행했고 장 총통은 중국어를 사용했다. 당시 회담 기록을 위해 현장으로 불려온 국회 속기사의 회고담을 보면 영어와 중국어를 몰라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앉아 있었는데 마침 옆에 있던 외무부의 황성수 정보국장이 귓속말로 통역을 해주어서 겨우 속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요한 정상회담의 자리에 왜 한국어 통역이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찬행사에 참석한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장 총통이 ‘신 의장은 중국인보다 더 중국어를 잘한다’고 칭찬했다는 내용이 신문 기사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한국의 고위 관계자들 가운데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경험 등이 있어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제스 총통의 진해 방문에 대한 답례로 1953년 11월에 대만을 방문했는데 이것이 한국 대통령이 정상외교를 위해 외국을 방문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에 앞서 이 대통령은 도쿄에 머물고 있는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1948년 10월과 1950년 2월에 일본을 방문했고, 1953년 1월에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면담하기 위해 방일했지만 모두 비공식 방문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정상외교로 보기는 어렵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일본 방문 때에는 미 군정 당국의 주선으로 요시다 일본 총리를 만나기도 했지만 정식 정상회담이 아니라 비공식 면담의 형태였다.

2011년 12월18일 일본 교토 영빈관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굳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11년 12월18일 일본 교토 영빈관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굳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세기에 들어 정상외교가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1970년대까지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2년의 재임기간 동안 일본, 대만, 미국, 베트남 등 겨우 4개국을 방문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18년 동안 8개국을 방문했을 뿐이니 결코 많은 횟수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전두환 대통령은 7년 남짓한 임기 중에 7차례에 걸쳐 18개국을 순방하여 본격적인 정상외교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 후 역대 대통령들의 해외순방 횟수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14차례 28개국, 김대중 대통령은 23차례 37개국, 노무현 대통령은 27차례 55개국을 방문했다. 정상외교의 챔피언(?)으로서의 기록은 아마도 당분간 이명박 대통령이 보유하게 될 것 같은데 이 대통령은 5년의 임기 동안 무려 49회에 걸쳐 89개국을 방문하는 왕성한 정상외교를 보여주었다.

한국 정상외교 제1호는
1949년 진해에서 개최된
이승만과 장제스의 정상회담
한국말 없이 영어-중국어로 얘기
국회 속기사는 한동안 당황했다

좋은 결과 만들어내지 못하면
정상회담 부작용은 재앙적 수준
가능하면 외무장관 간 협상부터…
정상들 만나 흉금 터놓는다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수도

도끼로 살해된 부르고뉴 공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박 대통령은 1972년 11월13일부터 일본을 공식방문하기로 하고 10월6일에 대외 발표까지 했다가 10월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함에 따라 방일 계획을 취소했다. 당시에 업무를 담당했던 외무부 간부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 대통령으로서 최초의 공식 방일이니만큼 철저하게 방문 계획을 준비한 뒤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치기 위해서 청와대에 보고 날짜를 잡아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좀처럼 회답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방일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서 여러 차례 청와대에 독촉 전화를 해봤지만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하기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10월 유신이 선포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방문 계획은 정말로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10월 유신을 준비하면서 국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 진상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대통령의 해외 방문이나 외국 정상의 방한 행사를 담당하는 부서는 외교부의 의전장실이다. 의전업무의 총괄책임자를 의전장(Chief of Protocol)이라고 하기 때문에 의전장실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통령의 해외순방 행사는 1년에 한두 차례에 지나지 않았고 1970년대에는 해외 방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전장실의 업무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한 해에만 보통 10차례 가까이 해외순방 행사를 치러야 하니 예전보다 조직과 인원을 늘렸다고는 해도 선배들이 일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 부담이 커졌을 것이다. 최고를 기록한 2009년에는 무려 15회나 해외순방 행사가 있었고 해외에 머문 기간은 모두 51일이나 되었다. 의전장실 직원들은 녹초가 되었겠지만 오늘날이 정상외교의 시대라는 것만큼은 유감없이 보여준 셈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정상회담은 아주 드물게 열렸을 뿐이고 오히려 기피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조선이 최초로 미국에 파견한 상주 외교사절이었던 박정양 주미전권공사는 1887년 11월12일 서울을 출발하여 배편으로 일본,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다시 열차편으로 대륙을 횡단하여 1888년 1월9일 부임지인 워싱턴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워싱턴까지 부임하는 데 거의 2개월이나 걸렸던 것이다. 박정양은 미국 근무를 마치고 1889년 8월에 고종에게 귀국보고를 할 때까지 미국에 주재한 기간이 333일이고 길에서 보낸 날이 315일이라고 적었다. 19세기말의 상황이 이 정도였으니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나라의 정상이 다른 나라의 정상을 직접 만나는 일은 전쟁의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어려웠던 데에는 신변 안전의 보장이 쉽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1419년 프랑스의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과 루앙 지방의 다리에서 회담을 했다. 암살의 위험을 막기 위해 다리 위 중간지점에 신변 보호용 목책까지 만들어 세워두었지만 부르고뉴 공은 목책을 넘어온 샤를 7세의 근위병들에게 도끼로 머리를 맞고 살해되었다.

1475년에는 프랑스를 침공한 영국 국왕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피키니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루이 11세는 아버지인 샤를 7세가 예전에 부르고뉴 공을 무참하게 살해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변 안전 문제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루이 11세는 회담 장소인 솜 강 근처의 다리 위에 동물의 우리처럼 생긴 격자형 구조물을 설치하도록 했다. 팔뚝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격자 구멍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서로 포옹을 하고 난 뒤에 두 국왕은 ‘안전하게’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정상외교를 둘러싼 중세시대의 이와 같은 노골적인 폭력사태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내가 근무했던 예멘에서는 대통령이 상대국에서 파견한 특사를 만나 회담하는 자리에서 폭사한 사건이 있었다. 예멘이 아직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던 1978년 6월24일 아메드 빈 후세인 가슈미 북예멘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살림 루바이 알리 남예멘 대통령이 파견한 특사와 만났다. 남예멘 특사가 자리에 앉아 서류가방을 여는 순간 가방 안에 설치되어 있던 폭탄이 터져서 특사와 대통령이 모두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소련 흑해 연안 항구도시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회담을 연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소련 흑해 연안 항구도시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회담을 연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연합뉴스

시원한 독설, 그것은 최선이었을까

윈스턴 처칠은 ‘정상회담 때문에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오늘날처럼 정상외교가 일상화된 시대에 딱 맞는 말이다. 한-일 정상회담 개최 횟수를 기준으로 보자면 이승만 대통령은 12년의 재임 기간 중에 2회, 박정희 대통령은 18년의 집권 기간 중에 2회에 불과했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에는 매년 4회에서 6회까지 회담을 개최할 정도로 빈도가 늘었으니 아주 모범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15세기 프랑스의 정치가 필리프 드 코민은 ‘위대한 군주들이 서로 친구로 남기를 바란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최고지도자들이 마주앉은 정상회담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 부작용은 재앙적인 수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사전 준비가 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섣불리 정상회담을 개최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의미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정상들이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직접 이야기해야 풀린다고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2011년 12월18일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로 정면충돌했던 교토 정상회담이 좋은 실례다. ‘57분 회담 중 45분…MB, 위안부 작심 발언’이라는 언론 기사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상회담이라는 최고의 외교 무대에서 양국 정상이 직설적으로 공방을 벌인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대통령은 하루 전날의 만찬 기회를 이용하여 성의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길게 이야기했음에도 다음날 정상회담에서 노다 총리가 전혀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을 보인 데 대해 분개했던 심정을 나중에 회고록에서 자세히 털어놓았다. 노다 총리도 작년에 한국 언론인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교토 회담 이야기가 나오자 분을 삭이지 못하며 얼굴이 붉어지더니 눈물까지 글썽거렸다고 한다. 양쪽이 모두 마음속에 큰 응어리가 남은 것 같다.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에 대해 후련하게 맞받아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최선이었을지는 곰곰이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면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정상회담이 너무 흔해진 세상이라 한번쯤 얼굴 붉히고 헤어지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국가의 최고지도자끼리 만나는 회담은 다르지 않을까.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중국·예멘·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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