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27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5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 행사에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 이글스가 참전 용사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 비행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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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는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인공호수다.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중국군(정확하게는 ‘인민지원대’)이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0일까지 최대의 혈전을 벌인 전투 장소이기도 하다. 미군은 이를 ‘초신 전투’라고 부른다. 당시 미군이 사용한 지도가 일본 식민지 시기에 제작된 것이었다. 그 지도는 이 지역을 일본식 발음인 ‘초신’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초신’호는 그 시기 식민지 경영을 위해 건설된 것이었다. 한반도의 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 굳이 장진호 전투를 소환했다. 미군의 “기적적 성과”라고 치켜세웠다. 마오닝 중국 외무성 대변인이 즉각 반발했다. 장진호 전투가 “항미원조전쟁의 위대한 승리”라는 프레임을 내세웠다. 장진호에 서려 있는 식민지 지배의 그림자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 그림자 아래에 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로 퉁치고 넘어갔다. 70여년 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장진호 전투 때문에 원자탄 투하를 공언했고 이는 동북아 핵 경쟁으로 이어졌다. 식민주의와 전쟁의 현대사는 이렇게 한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다.
‘장진호 역습’에 미국 ‘원자탄 검토’…핵 경쟁의 시작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했던 북 인민군은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에는 미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맹진군하고 있었다. 미 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복병을 마주쳤다. 막 압록강을 건너 6·25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중공군의 대규모 사단에 포위돼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엄청난 사상을 입은 해병사단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세가 또 한번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중국이 장진호 전투를 “위대한 승리”라고 내세우는 이유다. 중국 국경을 향해 진격하던 미군에 1만3천여명 사상자라는 피해를 입히고 예봉을 꺾어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기적적 성과”라고 칭찬한 것은 후퇴 작전이었다. 사단 병력이 거의 완벽하게 포위되어 전원 항복하거나 섬멸될 위기에서 빠져나와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완전히 패배했지만 후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철길을 따라 흥남까지 빠져나온 부대원들은 피난민들과 함께 거제도까지 철수했다. 미국과 한국의 ‘장진호 전투’ 서사는 ‘철수 작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해전술을 구사하던 중국군에 5만2천여명(사상자)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는 타격을 가했다는 승전가다.
게다가 미 10군단과 한국 1군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 10만명까지 철수시키는 기적적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성공 서사에 등장하지 않는 얘기가 있다. 철수 작전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여기서 ‘폭탄 선언’을 했다. 원자탄을 한반도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우리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들을 취할 것입니다.”
기자의 다급한 질문이 따랐다. “거기에 원자탄이 포함됩니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가 포함됩니다.” “대통령께서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원자탄 사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원자탄 사용의 적극적 고려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중국군과의 충돌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미국은 바로 핵무기를 들고나왔다. 한반도 핵위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중국은 이를 갈며 1960년대에 핵무기를 만들었고, 북도 결국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다. 장진호 전투가 촉발시킨 핵무기 연쇄효과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몰지 장진호…주민들 보상 못받고 일제에 쫓겨나
역사를 더 거슬러 100여년 전 이 일대에서는 희한한 ‘땅따먹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진강의 수리권을 확보한 일제 기업 미쓰비시가 강을 가로막아 인공호수를 건설하려 했다. 그 물을 이용해 발전소를 돌리려는 계획이었다. 댐 건설로 장진군의 5분의 1이 수몰되는 상황이 됐다. 주민 1만여명을 집단 이주시켜야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들의 희로애락이 깃든 땅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평당 최저 2전(달걀 한알 값)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땅을 내놓을 사람은 없었다. 주민들은 지주회를 결성해 저항했다.
결국 미쓰비시는 1933년 수리권을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일본질소)에 넘겼다. 신흥재벌 일본질소는 이미 1927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조선질소)를 함경남도 흥남에 설립했고 부전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했다. 거기서 생산된 전기로 화학비료를 만들어 부를 축적해 거대재벌로 성장하고 있었다. 인근의 장진강에도 발전소를 건설해 전력의 절반은 경성과 평양으로, 나머지는 조선질소 공장으로 송전한다는 계약을 총독부와 체결했다.
일본질소는 거침이 없었다. 토지매수 협상을 완결하지도 않은 채 공사를 강행했다. 총독부 및 도와 군청, 경찰의 지원을 받아 지주회 간부를 구속하고 매수해 이를 붕괴시켰다. 그러고도 토지수용령을 적용하고서야 1935년 제1발전소를 완공했다.
조선질소는 화학비료 생산을 확대했고, 일본질소고무공업, 조선압록강수력발전 등과 더불어 ‘전기-화학 콤비나트’를 구축했다. 이들은 총독부와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조선의 식민지 공업화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수전해(수소·산소를 얻기 위해 물을 전기분해) 설비 능력은 세계 1위, 유안(황산암모늄) 생산 능력은 세계 3위였고, 일본질소가 만주국 정부, 조선총독부와 공동 사업으로 추진한 수풍발전소는 당시 세계 2위 규모였다. 1941년 이후에는 화약과 금속 제련 등 군수산업 분야에 진출해 일본제국의 대륙 침략에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질소를 필두로 일제 15대 재벌로 성장했던 ‘일질 콘체른’은 전후 해체됐지만 일본신질소 등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과거 악행에 따른 저주였을까. 일본 미나마타에서 운영하던 공장에서 방류한 산업폐기물로 공해병을 초래해 ‘미나마타병’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환경오염과 공해병에 대한 소송이 잇따랐다. 보상액이 천문학적 액수에 달한다.
그러나 일본질소가 장진군 주민에게 보상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사죄의 기록도 없다. 조선인들이 빼앗긴 삶의 터전 위에서 미군과 중국군이 처절한 사투를 벌였을 뿐이다. 2017년 미 버지니아주 콴티코 국립해병대박물관에 세워진 장진호 전투 기념비는 영어 대문자로 ‘장진(초신)호 전투’라고 새겨 ‘장진’과 ‘초신’을 병기하는 타협안을 택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관련 전시물도 장진호 밑에 영어로 ‘초신 저수지’라고 표기하고 있다.
식민지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도 아직 계속되고 있다. 누가 100년 전의 과거는 잊으라고 하는가.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시카고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국제관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방문학자로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머물고 있다. 한반도와 국제관계에 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