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시민단체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이 윤석열 대통령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면담에 반대하며 한·미·일 군사동맹 등에 항의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두 국가가 미국에 버금가는 핵무기를 보유한 세상이 눈앞에 있고, 이 핵국가들과 분쟁의 위험성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지 않다. 즉시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미국 하원 전략태세위원회 보고서 핵심을 요약한 내용이다. “존재론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며 ‘양대 전쟁’의 체급을 올렸다. 1990년대에도 양대 전쟁을 운운했고 지금도 양대 전쟁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미국이 추구하는 군사력도 그만큼 큰 차이가 있다. 러시아 및 중국과의 동시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비전을 내놓은 이 보고서는 과거에 위기를 팔아 미국의 군사화를 가속화한 ‘현존위험위원회’(소련과의 대결 정책을 부추기던 민간 로비조직)의 최신 버전이 될 것인가?
미국은 냉전 직후 양대전쟁 전략을 채택했었다. 1990년대 이라크와 북한과 같은 ‘악당국가’ 둘과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둘 능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악당국가 하나를 먼저 처리하고 그 뒤에 두번째 악당국가를 물리칠 것인지, 동시에 이들과 싸워 승리를 거둘 것인지를 둔 차이가 있었지만 당시의 양대 전쟁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중견국가와의 전쟁을 상정한 것이었다. 소련은 붕괴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고 중국은 미국의 상대조차 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조지 H. W. 부시 정권은 악당국가와의 양대 전쟁에서 동시에 승리할 능력이 필요하다는 국가전략을 내세워 미국의 군사력을 냉전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러던 미국이 이제는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제압할 능력을 추구하고 있다. 지난 몇년 사이 중국을 최대의 위협으로 호명하던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의 위협도 다시 불렀다. 양국이 협동하거나 독자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가능성을 전면에 띄우며 이들 두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 승리할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미 하원 전략태세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전략태세 평가 최종보고서’는 이런 전망을 공식화했다. “미국은 무력으로 국제 정세를 변화시키려는 야망을 가진 두개의 핵 보유 적국을 마주하고 있다”며 “새로운 글로벌 환경은 냉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절의 경험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냉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절’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이 요청된다. 전략태세위원회는 “기존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촉구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략폭격기, 전략잠수함은 물론 핵탄두 생산도 늘리는 등 “미국 전략태세의 양적·질적 조정”이 필요하단다. 그뿐만 아니라 전술핵무력도 강화해야 하므로 유럽에 배치된 전술핵무기를 강화하고 인도·태평양에는 전술핵무기 재배치를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선제타격 생존성과 미사일방어체계 돌파능력 등을 강화한 무기체계들을 개발·배치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전략태세위원회의 보고서는 2027~2035년을 전망한 것이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시급하므로 지금부터 군사력과 군사력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물론 의회의 보고서이므로 행정부의 공식적 정책은 아니다. 전략태세위원회 외부에서도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상원도 이 위원회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위원회 내부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의원들이 이런 전략태세 평가에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략태세위원회는 임의기구가 아니라 지난해 국방수권법에 따라 설치된 의회 산하 초당적 기관으로, 미국의 장기적인 전략태세를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보고서는 미국 국방예산 심의의 근거가 될 것이고, 국방부는 이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하며 국방계획을 작성하고 예산안을 만들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미국 정치의 극심한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전략태세위원회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이런 보고서가 발표됐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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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태세위원회는 북한이 미사일 시험을 실시하고, 핵 개발에 몰두하는 것이 미국과 아시아 동맹의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 “미국의 지상배치 미사일방어체계에 잠재적 도전이 되기에 충분한 수의 핵탄두 장착 대륙간탄도미사일 배치로 가고 있다”며 위기감을 표명했다. 이 위원회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무장 해제”라는 이미 실패한 목표에 지지를 표명하고 이를 위한 “과도적인 폐기 조치”의 기회가 있다면 미국의 동맹들과 함께 비확산을 고려하면서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흘러간 옛 노래’에 집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미국을 비롯해 동맹국들의 재래식 전력의 규모 및 유형, 전투태세에서 더욱 강화된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그러한 대책을 세우지 못할 경우 미국은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높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내용이
바이든 행정부의 ‘핵태세 검토보고서’보다 더 호전적이라며 즉각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과학자연맹은 의회 보고서라기보다는 “군수업체 보고서” 같은 내용이 실행된다면 러시아 및 중국과의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고 군비통제의 가능성을 어둡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포린어페어스는 핵무기를 늘리지 않고도 러시아와 중국을 억제할 수 있다는 분석을 게재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이러한 군비확장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전략태세 보고서는 구체적 예산 문제는 회피했다. 그러면서 군사동맹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동맹을 강화하고 확대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동맹 네트워크는 지역에서의 공세가 미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억제하여 미국의 안보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의 접근을 통해 미국 경제의 번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미국이 이미 냉전 시기의 강대국이 아님을 눈치채고 있다. 미군을 세계에 배치하고, 동맹국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퍼부으면서 자국의 시장을 열어주던 강대국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의 등을 떠밀며 러시아와 싸우라고 독려하고, 동맹국들더러 우크라이나를 더 지원하라고 촉구하는 국가만이 남았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하마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순간 이스라엘은 전쟁의 패배라는 독배를 들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중동에서 누리던 미국의 영향력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운명이다. 전략태세위원회는 절대반지라는 ‘미국몽’을 다시 이뤄보자고 한다. 대한민국에 꿈이 될까, 악몽이 될까.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시카고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국제관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반도와 국제관계에 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