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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과거를 넘어서자’는 윤 대통령한테 묻는다 [현장에서]

등록 2023-03-23 15:56수정 2023-03-24 02:43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박정희 대통령의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결단 덕분에 삼성, 현대, 엘지(LG), 포스코 등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한국 경제의 눈부신 발전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제3자 변제’를 통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문제 ‘해소’책이 “우리 국민과 기업인들에게 커다란 혜택”이 되도록 하겠다며 한 말이다.

그런데 ‘한-일 국교 정상화=한국 경제 발전 원동력’이라는 윤 대통령의 진단은 진실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박정희 정권기 이른바 ‘한강의 기적’은 한-일 국교 정상화보다 베트남전 참전에 훨씬 큰 빚을 지고 있다. 숫자로 비교해보자. 국교 정상화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 준 ‘청구권자금’은 8억달러(무상 3억, 유상 2억, 상업차관 3억달러)다. 그 돈으로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짓고, 경부고속도로를 놓았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반면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미국한테서 획득한 달러는 81억4천만달러(곽태양, <역사비평> 107호, 206쪽)에 이른다. 청구권자금의 열배가 넘는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직접 준 돈만 46억2천만달러다. “‘한국형 발전모델’은 베트남전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전문 연구자의 지적이 나온 까닭이다.

‘한강의 기적’은 △해방 직후 성공적인 농지개혁 △장면 정부가 입안하고 박정희 정권이 보완·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청구권자금 △베트남전 참전에 따른 달러 유입 등 숱한 요소가 얽힌 결과다. 무엇보다 중동·독일 등에서 힘겨운 노동으로 모은 외화를 가난한 조국·가족한테 보내온 우리 부모 세대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인 다수는 ‘한강의 기적’과 관련해 ‘박정희’와 ‘청구권자금’은 쉽게 떠올리면서도, 베트남전 참전의 영향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는 파병 한국군(연인원 31만2853명) 가운데 5099명이 숨졌으며, 한국군 손에 죽은 숱한 베트남 인민의 존재라는 ‘불편한 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월7일 한국 사법부는 베트남 전쟁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실과 대한민국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내렸다.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려는 한국 시민사회와 베트남 피해자들의 오랜 노력의 열매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결에 불복한다며 3월9일 항소했다. 베트남 외교부는 “매우 유감이다. 베트남은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하자는 방침이지만 그것이 진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뼈아픈 지적이다.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 구제”의 길을 연 2018년 대법원 판결을 “걸림돌”이라 폄훼한 윤 대통령의 인식과 달리, 대한민국의 미래는 ‘제3자 변제안’ 무효화와 항소 철회라는 “과거 직시”의 길 위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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