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열린 3·1절 103돌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안보 부담이 가장 큰 나라입니다. 당장은 남북 간의 전쟁 억지가 최우선의 안보 과제이지만, 더 넓고 길게 보면,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 자체가 언제나 엄중한 안보 환경입니다.”
지난달 28일 육군3사관학교 57기 졸업·임관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축사의 한 대목이다.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가열되는 와중에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에 따른 미-러의 ‘대치’는 국제질서의 전략 지형 변화를 예고한다. 무엇보다 냉전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가 21세기 ‘미국 대 중국·러시아’ 충돌의 단층선으로 다시 내몰릴 위험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3·1절 103돌 기념사에서 “힘으로 패권을 차지하려는 자국중심주의”의 부상과 “신냉전의 우려” 확산을 짚으며 “우리가 더 강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한반도 평화”라고 강조한 까닭이다.
20세기 냉전 적대의 민낯인 ‘한국전쟁’과 장기 분단, 북한의 ‘핵 집착’과 북-미 적대관계로 상징되는 ‘한반도 안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자면 남과 북의 주체적 노력은 물론 미·중·러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중 패권·전략경쟁이 격화하며 나라 안팎에서 ‘양자 택일’ 압력이 높아지는데도 문 대통령이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중관계도 조화롭게 발전시켜나간다”는 전략 기조를 꺾지 않는 배경이다. ‘냉전의 외딴 섬’에서 벗어나자면 미·중과의 협력은 ‘선택’이 아닌 대한민국 대외전략의 숙명에 가까운 ‘원칙’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평화”는 지상과제이고, 국외 진출 국민·기업 보호를 포함해 ‘경제안보’ 영역에서 국가이익 지키기도 허투루 할 수 없는 과제다.
문 대통령이 2월22일 이례적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연석회의를 소집해 직접 주재하며 “우크라이나 정세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노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고 특별히 당부한 까닭을 이런 맥락에서 짚을 필요가 있다. 국제질서의 원심력 강화 탓에 당장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더라도 ‘좌초’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의 표현으로 읽혀서다.
상황은 엄중하다.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둔 미-러의 대치를 두고 외교안보 분야 원로인사가 “신냉전의 도래보다 열전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중재자가 없지 않느냐”라고 한탄할 지경이다.
실제 ‘미-중 패권·전략경쟁, 미-러 대치, 중·러 협력’이 뒤엉켜 국제 질서의 원심력에 가속을 일으키고 있다. ’패권국’ 미국은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제·군사자원의 공급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 “중국몽”의 깃발을 들고 떠오르는 시진핑의 중국, “루스키 미르”(러시아 세계)를 외치며 유럽에서 자기 몫을 요구하는 ‘푸틴 러시아’의 도전도 거칠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유일 동맹국이고, 중국은 최대 교역국이다. 더구나 미·중은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3년 전쟁’의 교전 당사자이자 정전협정 서명국이다. 러시아는 6자회담 당사국이다. 요컨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가동해 ‘냉전의 외딴 섬’에서 벗어나자면 미·중·러 3국 모두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포기할 수 없는 ‘한국의 길’이다.
문제는 그 길이 ‘미·중·러 신삼각 전략 게임’이 빚어내는 새로운 국제질서, 비유컨대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권위주의 시장경제’ 쟁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한국은 미국을 축으로 한 ‘자유주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시장경제’를 고리로 중·러와도 연결돼 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권위주의 시장경제’는 가치·이데올로기(자유주의 대 권위주의) 측면에서 대립한다. 하지만 시장경제라는 기반 위에서 ‘공존’한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이후 유일 패권국 미국이 벼린 세계 질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치적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올해 10~11월 미국 중간선거와 중국공산당 20차 대회가 지나기 전엔 미-중·러 사이 ‘가치 투쟁’의 완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보다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쟁점은 냉전 종식 이후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공존을 가능케 한 ‘지구적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기반이 유지될 수 있느냐다. 만약 ‘시장경제’라는 공통 기반이 무너지고 글로벌 공급망이 완전히 분리된다면, ‘냉전 종식’ 이후 하나로 묶인 지구적 시장경제의 최대 수혜 무역대국이자 에너지·원자재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엔 재앙이다. 다만 미국이 글로벌 패권 유지를 목적으로 밀어붙이는 ‘공급망 재편’ 전략이 중·러를 다시 ‘시장경제 밖’으로 밀어낼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패권·전략 경쟁 와중에도 미-중 무역 규모가 더 커지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푸틴을 징벌하겠다며 꺼내든 ‘대러 제재’가 러시아 경제의 알짬인 에너지·원자재 산업을 아직은 정조준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중·러 삼국지’의 결론을 지금 알 순 없지만,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은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대북 집중력 약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사실상 붕괴 위험이 그것이다. 5월9일 출범할 새 정부 앞에 던져진 난제다.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충돌하는 단층선에 놓인 완충국가인 한국은 ‘완충국가가 양자택일을 하면 충돌의 전장터로 내몰린다’는 역사의 뼈저린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며 “새 정부는 관성에서 벗어나 생각과 시스템을 뿌리부터 성찰해 유연하고 실용적인 외교안보정책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안보 분야 원로 인사는 “미·중·러 갈등·각축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면 무엇보다 내부 분열을 완화해야 한다”며 “새 정부는 대외정책과 관련한 여론의 공감대 강화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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