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 ㅣ 길윤형의 알고싶어]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의 일제 시기 굴곡된 삶
창씨명 ‘백천의칙’은 윤봉길이 죽인 일본 대장과 같아
간도특설대의 대게릴라전 “특필할 성과 거둬”
“한국인 토벌…비난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
일부서 주장하는 ‘야스쿠니 합사’는 불가능한 일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의 일제 시기 굴곡된 삶
창씨명 ‘백천의칙’은 윤봉길이 죽인 일본 대장과 같아
간도특설대의 대게릴라전 “특필할 성과 거둬”
“한국인 토벌…비난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
일부서 주장하는 ‘야스쿠니 합사’는 불가능한 일
![아직 건강하던 시절의 백선엽 장군(왼쪽). 2005년 6월2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이 맞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아직 건강하던 시절의 백선엽 장군(왼쪽). 2005년 6월2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이 맞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550/imgdb/original/2020/0713/20200713501780.jpg)
아직 건강하던 시절의 백선엽 장군(왼쪽). 2005년 6월2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이 맞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91/imgdb/original/2020/0713/20200713501781.jpg)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숨졌다.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등을 역임했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숨졌다.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등을 역임했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450/643/imgdb/original/2020/0713/20200713501782.jpg)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숨졌다.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등을 역임했다.
펑톈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42년 봄 임관하여 자무스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뒤 간도특설대의 한인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과 베이징 부근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특설부대에는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충근, 박창암 등과 함께 근무했다.
나는 45년 8월9일 소-만 국경을 돌파해서 만주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1989년)
간도성 옌지현에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 일부가 일계 군관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다.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독립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 임부는 잠임,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김일성이 포함된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9~11월 사이 관동군과 만주군의 토벌 작전에 못 이겨 ‘고난의 행군’을 거쳐 소련 영토로 피신했다-편집자 주)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 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 특설대였다.<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백선엽 회고록>(2000년, 일본어판)
![1939년 3월에 촬영한 간도특설대 간부 사진. 1939년 3월에 촬영한 간도특설대 간부 사진.](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90/394/imgdb/original/2020/0713/20200713501783.jpg)
1939년 3월에 촬영한 간도특설대 간부 사진.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1993년, 일본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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