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복식조에서 중국의 9연패를 저지하고 우승한 남한의 현정화(왼쪽)와 북한의 리분희가 그해 5월7일 밤 도쿄 프린스호텔에서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버스에 오르기 전에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도쿄/곽윤섭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내년 평창 겨울올림픽에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하는 방안을 공식 제의하면서, 얼어붙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굴곡 많은 남북관계의 부침 속에서도 꾸준하게 그 맥을 이어온 남북 스포츠 교류의 역사도 관심의 대상이다.
남과 북이 단일팀을 구성해 국제무대에 선 것은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두 차례다. 문 대통령이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영광을 다시 보고 싶다”고 언급한 대회들이다. 그해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북 최초의 단일팀이었던 여자탁구 ‘코리아’팀은 남한의 여자 간판 현정화와 북한의 리분희를 앞세워, 중국의 9연패를 저지하고 단체전 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두 달 뒤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남과 북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 ‘코리아’를 선뵈었다. 코리아팀은 조별리그에서 1승1무1패로 예선을 통과해 사상 첫 8강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단일팀의 모습은 국내외에 큰 감동을 전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이던 당시 체육교류는 이후 남북관계에 윤활유 구실을 했다. 남북은 1991년 9월 유엔 동시가입을 했고, 12월엔 상대방의 체제 존중, 무력침략 포기 등 담은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듬해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2000년 9월 시드니 하계올림픽도 남북한 스포츠 교류가 꽃을 피운 때였다. 당시 180명의 남북한 선수들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공동 입장하자, 11만여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6·15 공동선언을 발표한 직후로, 모든 분야에서 남북관계가 본격화하고 있었다.
스포츠 교류가 남북 경색 국면을 완화한 사례로는 2002년 6월 서해교전 이후 북한이 8월 부산 아시안게임에 184명의 선수단(임원 포함 316명)과 300명 규모의 응원단을 보낸 것을 꼽을 수 있다. 그해 말 ‘2차 한반도 핵위기’로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으나, 2003년 8월 대구 여름유니버시아드에 북한은 197명의 선수단과 300여명의 응원단,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을 파견했다. 이 시점에 베이징에서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1차 6자회담이 열렸다.
북한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9~10월 인천 아시안게임에도 150명의 선수단을 참가시킨 바 있다. 특히 10월 폐막식 참석차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최룡해 비서 등 ‘분단 이래 최고위급’ 북한 대표단이 방한해, 김관진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만나 대화하기도 했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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