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라, 개혁 틀 짜자] 전문가 기고 ①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지난 2000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 순안공항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정은 무시하면 한반도 평화 요원
당장 성과 안 나와도 대화 추진해야 ② 강대국 사이 ‘선택보다 조율’
북핵·사드 등 문제 당사자는 우리
미·중 이해 가능한 절충안 도출을 ③ 북핵 해결, 단계적 접근 필요
북·미, 제어하기 어려운 독립변수
6자회담 재개뒤 긴 호흡으로 추진 ④ 통일·외교 ‘국민 공감대’ 절실
반대 목소리 크면 대외협상력 약화
진정성 담은 설득작업에 온 힘을 우리는 6자회담이 중단된 지난 시기에 끊임없이 상황이 악화돼온 것을 체감했다. 남북 간에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전운마저 감돌았던 때는 예외 없이 대화가 중단된 시기였다. 반대로 6자회담이 진행될 때 북한은 핵 도발을 한 적이 없으며, 남북 대화 시기에 군사적 도발을 감행한 적도 없었다. 북한을 믿기 어려워 대화를 할 수 없다고들 한다. “믿는 사람과는 협상이 필요없으며, 협상이라는 것은 원래 믿기 어려운 사람과 (하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부시 대통령한테 해서 전폭적인 동의를 받은 말이다. 물론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당장 성과가 나오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대화의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화는 협상 성공의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대화의 성공과 실패는 흔히 있는 일로서, 우리는 더 많이 성공하는 대화를 추구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특히 필요한 것이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과의 대화다. 김정은은 각국 지도자 중에서 가장 호전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손꼽힌다. 한·미의 대북정책은 이런 정형화된 그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수립된다. 그리고 우리는 김정은에 대해 넘치는 풍문과 첩보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김정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김정은은 집권 6년차 지도자이지만 아직 정상회담의 경험이 없다. 그가 만난 서방 인사는 미국 농구선수와 어린 시절 요리사였던 일본인이 전부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외부세계는 지난 5년간 김정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지만, 정작 그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의 존재만 무시한 셈이다. 어느 지도자도 그에게 핵을 포기하도록 직접 설득해본 적이 없다. 결국 국제사회는 이 ‘가장 위험한 지도자’에 대해 정보도, 접촉도, 공감대도 없으면서, 그를 상대로 빈번하게 중대 결정을 해야 하는 비합리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방치는 위험하다. 김정은의 존재를 무시하고 한반도 평화는 요원하다. 사실 우리는 과거 김정일 위원장이 각국 수반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외정책에서 중대 결정을 하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김정일은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2002년 9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납치 고백을 했으며, 2010년 5월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한 회담에서 사실상 북한의 경제개방을 결정했다. 둘째,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이 필요하다. 북핵이나 사드 문제 등은 우리의 생존 터전인 한반도에서 벌어지며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이다. 우리가 문제의 당사자다. 어떻게 해야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 가능할까? 무엇보다도 정부가 중요 현안에 대해 국제사회나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창의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며, 이것을 가지고 치열하게 협력외교를 펼쳐야 한다.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남북관계 개선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국제사회로 하여금 우리의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는 남북 대화다. 남북이 대결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누구도 한반도 분쟁의 한쪽 첨병에 불과한 한국 정부의 얘기를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상시적으로 하려면 균형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국가 간 쟁점 사안에 대해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서 중심을 잡고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 균형외교다. 이 관점에서 강대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은 양자택일의 선택보다 ‘조율’을 통해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외교·안보를 운용하는 전략적 지혜가 우선 필요하다. 그러나 사드 문제처럼 결과적으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어렵더라도 “배치냐? 철수냐?”의 양자택일 대신에 한-미-중의 이해의 ‘조율’을 통해 해결점을 찾아가야 한다.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도, 다른 쪽의 좌절도 초래하지 않는 결과, 곧 당사국들이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이해할 수 있는” 해결책을 도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주권국가로서 취해야 할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사드 배치의 국회 동의 및 환경영향평가와 같은 법적 절차와 북핵 문제 진전 노력, 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에 대한 정밀 평가 등을 통해 외교적 조율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북핵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되, ‘올인’해서는 안 된다. 북핵 문제는 장기적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동결 뒤 완전 폐기’라는 2단계 해법을 구상하고 있다. 이를 위해 새 정부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악화일로에 있는 북핵 문제를 해결 방향으로 물꼬를 돌리는 것이다. 6자회담의 재개가 그 신호탄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긴급해 보인다. 그러나 다음 단계는 한편으로 북핵 문제가 역진하지 않도록 상황 관리를 해가며 핵 동결을 향한 과정을 비교적 긴 호흡 속에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북핵 해결은 우리에게 숙명적 과제지만, 우리 의지대로 되기 어려운 문제다. 북한과 미국이라는, 우리가 제어하기 어려운 독립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북핵 문제는 이미 25년을 끌어온 문제다. 어쩌면 일제 치하 36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를 고려해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는 6자회담의 재개 수준에서 유연하게 연동시키고, 남북관계를 통한 북핵 문제 진전이라는 선순환 구조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넷째,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 공감대의 확산이 절실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사드, 남북 대화 등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핵심 쟁점에 대해 어느 분야보다도 분명한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있다. 그의 대안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쟁점 하나하나가 찬반 여론이 극명하게 나뉘는 민감한 사안으로서, 반대 목소리가 분명하고 격렬하다. 온 국민이 정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대응해도 어려운 문제인데, 새 정부는 내부 논쟁과 갈등으로 일단 진을 빼고 난 뒤, 대외 협상에 나서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대로라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내의 목소리가 상대국에 먼저 전해져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 어렵더라도 대다수 국민을 하나로 묶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특히 견해가 다른 언론과 전문가에게도 진정성을 담아 이해를 구하는 설득 작업에 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정부 정책의 국제적 지지 확보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을 광범하게 활용한 공공외교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합리적인 대북정책이 정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 사회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공간이 꾸준히 확대돼왔지만, 이념의 다원성과 관용도는 오히려 좁아지는 역설을 겪어왔다.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이 낳은 북한 혐오증이 이 역설을 키웠다. 그 결과 대통령후보 토론에서 주적을 묻는 비합리적 상황이 수십년째 계속되고 있다. 오늘의 풍토를 극복하지 않는 한 대북문제는 끊임없이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당연해 보이지만 대북정책에서 국민 공감대의 확산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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