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통일의 꽃’ 임수경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찻집에서 한 인터뷰 도중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통일의 꽃’ 임수경
트위터에 ‘80년대 원조 아이돌’이라 써놔
통일 위해 ‘역사로서의 임수경’ 기억돼야
트위터에 ‘80년대 원조 아이돌’이라 써놔
통일 위해 ‘역사로서의 임수경’ 기억돼야
“어머, 96학번이세요? 나랑 딱 10년 차이 나네. 임수경 하면 뭐가 생각나세요? 임수경을 알긴 아시나요?”
첫인사에 이어 간단한 자기소개와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임수경(44)씨가 물어왔다. 만 20살의 여대생 임수경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게 1989년, 그때 기자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릴 적 티브이 뉴스에서 본 임수경의 기억은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복 차림은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그 시절 ‘운동권’ 학생들의 패션코드였다. 평양에 가서도 임수경은 북쪽 당국이 내주는 양장 등을 거절하고 고려호텔에서 한복을 새로 맞춰 입었다. 그 모습에는 그림책에서만 보던 유관순 열사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100년이 지나도 ‘누나’인 유관순처럼, 지난 시대 ‘통일의 꽃’으로 박제된 줄로만 알았던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임수경을 잘 모릅니다.
“개인 임수경이 아니라 역사로서 ‘임수경’을 모른다는 건 우리 세대가 반성할 일입니다. 우리가 추구했던 통일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전승해주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나요? 386? 운동권?
“386이란 말은 별로고…, 운동권이라기보단 그 시대를 함께 겪은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지요.” -좁혀서 80년대 학번 세대라고 할까요? “네. (세대를) 분리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그 세대는 그런 게 좀 있어요. 함께 뭔가를 성취하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했고,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의 기억을 함께 공유한 세대…. 그들은 이미지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있어요.”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자. 임수경은 한국외대 불어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전대협 대표로 1989년 6월30일 북한에 들어가 46일 뒤인 8월15일 분단 이후 일반인으로는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돌아왔다. 북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탈북자 출신 한 언론인은 “임수경이 청바지를 입은 채 평양 한복판에서 여자의 몸으로 저렇게 자유분방하고 당당하게 즉석연설을 하는” 등의 모습이 “북한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해방시켰다”고 했다. 단숨에 남북 모두에서 ‘통일의 꽃’이 되었던 임수경은 그러나 귀환 뒤 즉시 체포돼 안기부 조사를 받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3년5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옥살이 후유증은 없나요? “감옥이 몹시 추웠어요. 특히 바닥이 차가웠죠. 그래선지 지금도 겨울이면 몸이 힘들어요. 좁은 곳이 싫어서 지하철을 안 타요. 왠지 답답하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 싫어요. 되도록이면 지상으로 다니고 공간도 넓은 버스를 탑니다.” -방북 때문에 가족 피해는 없었는지요? “언니가 다니던 회사에서 잘렸죠. 그때 막 졸업해서 취직했다가 저 때문에 해고돼 외신이 연좌제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나 가족들에게 결과적으로 무슨 피해가 돌아간 것 아닙니다. 7살 위 큰오빠가 당시 해병대 중위였는데, 본인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전역했다고 했으니. 아! 저 때문에 집 대문 앞에 경찰 초소가 하나 생기긴 했어요. 길 아래 있었던 초소가 집 앞으로 옮겨왔죠. 한참 있었는데 최근엔 안 보이더군요.(웃음)” 평양 한복판 당당한 연설, 시민에 깊은 인상
방북때 태어난 북녘 아이들 ‘수경’ 이름 많아 임수경에게는 작은오빠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연세대 심리학과에 다니다 84년 군복무 중 사망했다. 운동권 대학생들에 대한 군대 내 회유공작인 이른바 ‘녹화사업’이 한창이던 때의 사건이라 나중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했으나 ‘조사 불능’ 결론을 내렸다. “제가 북에 다녀와 안기부 조사를 받는데, 오빠의 죽음을 운동권 참여 동기로 결부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그러나 나의 운동권 활동과 오빠는 무관했습니다.” -당시 전대협이 일부러 ‘철없는 부잣집 딸’인 임수경을 북쪽에 보내 운동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얻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한숨 내쉬며) 어떤 사람들은 내가 투철한 운동가가 아니라고 쑥덕대고, 또 어떨 때는 빨갱이라고 하고. 아휴, 골치 아파!(웃음) 물론 그런 식으로 내 방북의 의미를 희석시키려고도 했죠. 하지만 난 자부해요. 나라와 민족을 고민했던 그때 많은 다른 청년학생들처럼 나도 나의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고자 했어요. 저 그때 되게 열심히 했어요, 학교서나 밖에서나. 그런데 안기부가 사건을 이용하려고 하다 보니 ‘평창동 공주님’이라는 얘기까지 나갔어요. 우리 집이 (부자 동네인) 평창동에 있긴 하지만, 아마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었을 거예요. 부모님은 지금도 40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계세요.” -어린 시절의 임수경도 궁금하네요. “평창동으로 이사 오기 전에 북가좌동에서 충암유치원을 다녔는데 배우 차인표씨와 동창이에요. 대학 동기인데, 잘생겨서 출신 학교 물어보다가 알게 됐죠.(웃음) 저는 어릴 땐 굉장히 내성적이었다가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격이 바뀌었어요. 반장도 한번 못해본 아주 평범한 아이였고, 책을 많이 좋아했어요. 국어 맞춤법, 한자, 불어를 잘했죠.”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신문기자였습니다. 경향신문, 중앙일보를 거쳐 서울신문 사회부장을 끝으로 언론인 생활을 마무리하셨어요. 방북 당시엔 지하철공사 공보실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방부와 판문점 출입기자를 하실 만큼 신원상에 ‘문제’가 없는 분이셨는데, 딸 때문에 집안에 월북자가 있네 없네 하는 소리를 들으셔야 했습니다.” 임수경은 1992년 12월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서강대 언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회활동이 여의치 않은 대신 학구열을 불태웠다. 1999년 미국 코넬대 동아시아연구소를 거쳐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박사 과정 도중엔 언론법제에 관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방송통신대 법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같은 기간 임수경은 이혼을 했고 초등학교 3학년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일상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해인사에서 꼬박 2년을 들어앉아 있었고, 장기간 여행으로 심신을 달래보기도 했고, 신경정신과에서 상담 치료도 받았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으세요? “아휴, 이제 무슨 행복이야….” -역사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입니다. “할 수 없지요. 그게 내 운명인 걸. 스무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결혼은 왜 했었나요? “평범해지고 싶었어요. ‘임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가치관이 잘 안 맞았는지 자꾸 충돌…, 왜 젊어서는 그런 걸 잘 못 참잖아요? 대학원 다니던 4월에 만나 28살이 되던 해 1월에 결혼해 29살에 아이 낳고 4년 동안 같이 살았어요.” -결국 행복을 찾아 나선 거였는데 잘 안되었군요. “그 나이 때 ‘셀러브리티’(유명인)의 삶이 버거워 개인의 삶을 추구했던 게 아마도 결혼과 이혼의 과정이었나 봅니다. 사실 내가 가진 선택지가 얼마 없었어요.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것 외에, 취업도 안 되고… 그러다 돌파구로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겠지요… 그리고 행복이라…,(침묵) 애가 죽었잖아요. 그 엄마는 죽을 때까지 행복할 수 없어요. 어떤 행복도 추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식을 잃은 엄마는 죄인이에요.” 평범해지고싶어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
사랑하는 아이 잃고난뒤 ‘인연’ 깨달아 임수경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절 생활이 좋았던 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을 안을 수 있게 된 것도 최근 일이다. “친구들 만나면 다들 하는 얘기가 남자들은 마누라 얘기, 여자들은 서방 얘기, 그리고 애들 얘기인데, 난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혼자 있는 거야. 그런 얘기도 들을 수 있게 된 게 얼마 안 됐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아들을 2005년 필리핀에서 사고로 잃었다. 임수경은 아들이 쓰던 휴대전화를 아직 지니고 있다. 아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여러가지 ‘미래’의 일정을 미리 입력해뒀다. 이달 3일엔 ‘고등학교 입학’이란 알람이 울렸다. 그는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나 생일 때 늘 아들 선물을 준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를 필리핀에 어학연수 보낸 거였나요? “아니에요. 학원가에 운동권 출신이 많잖아요. 친구들이 운영하는 학원의 스태프하고 자녀들을 이른바 ‘캠프’ 형태로 보낸 거였어요. 아이들의 부모가 다 제 친구들이었죠. 사실 저는 그 캠프에 보낼 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그 여름에 박사 논문을 써야 했어요. 방학 때 20일가량 논문을 바짝 써볼까 하는 생각에 그랬는데… 논문은 못 썼어요. 나중에도 쓰려 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많이 보고 싶겠어요. “보고 싶지. 얼마나 사랑한 아이였는데… 나는 늘 그 아이를 끼고 업고 다녔는데,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었나 봐요. 아이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인연이란 걸 배웠어요.” -해인사에선 어떻게 보내셨어요? “주로 절하고 기도했어요. 밖엔 안 나왔죠.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왔다가는 데려갈 생각은 않고 옥중면회 하듯이 ‘다음주에 또 올게’ 하면서 그냥 가요. 그러니 나는 계속 있었죠.(웃음) 사실 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절에서 밥도 다 주니까. 나름 바쁜 적도 있었어요. 그때 해인사에서 서기 883년에 만들어졌다고 쓰여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인 비로자나불상이 발견됐어요. 노무현 대통령까지 오셨고 국고지원을 받아 대비로전을 만들었어요. 제가 홍보기획위원으로 일했고, 그곳 불상 안에 스님들 이름과 함께 노 전 대통령 부부 이름, 그리고 제 이름도 들어갔어요. 가문의 영광이죠. 500년 뒤에 개봉할 텐데 그 임수경이 그 임수경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잡지에 글도 썼어요.(웃음)” 연평도 포격때 내 역할 안끝났음을 확인
이번 총선에 어떤식으로든 참여할 생각 2008년 임수경은 오스트리아로 가 유럽평화대학(EPU)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뒤 대학 강의도 했고, 라디오와 <한국정책방송>(KTV)에서 방송 진행도 했다. 트위터(@su_corea)를 통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그렇게 비교적 조용히 살던 그가 최근 사회적 주목을 받는 이유는 총선 때문이다. 임수경이 방북할 때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은 최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임수경은 당연히 영입해야 하지 않나”라고 말한 바도 있다. 하지만 낡은 매카시즘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영입 제의를 진짜 받았나요? “공식적인 제안은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영입과 관계없이 총선에는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생각입니다. 2000년부터 매번 선거 때마다 영입 제안이 있었어요. 그때는 내가 정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내 역할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죠.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정부간 채널이 생겼잖아요. 장기수도 송환했고, 금강산·개성으로 관광도 다녔잖아요. 나 같은 사람은 뒤에서 박수만 쳐주고, 자연인으로 살면 될 줄 알았어요.” -왜 생각이 달라졌나요? “가장 좌절을 느낀 건 연평도 포격사건 때였어요. 남북 긴장이 고조될 때가 많았지만 북이 남을 겨냥해 정면으로 공격을 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잖아요.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돼도 분단을 극복 못하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걸 보여준 거예요. 냉전이 극에 달할 때도 벌어지지 않은 포탄이 터진 거예요. 그 사건을 통해 나의 삶과 나의 투쟁을 되돌아본 거죠. 그때 난 되게 슬펐어요. 내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임수경표 대북정책엔 어떤 게 있을까요? “사실 6·15와 10·4만 잘 지켰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 대화를 계속해야죠. 임수경은 북녘 땅에서 인지도 100%예요. 제가 갔던 무렵 태어난 19살, 20살 북한 주민 가운데 ‘수경’이란 이름이 많대요.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으니, 그런 감성적인 코드를 적절히 활용해야 합니다. 아직도 저를 빨갱이니 뭐니 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89년에 45일 동안 북한에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그 이후의 제 삶이 설명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의 삶을 재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임수경’이란 이름은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사회 전반에 형성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옥중에 있는 임수경에게 편지를 보냈던, 그리고 임수경의 답장을 받았던, 그리고 ‘임수경 현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임수경은 여전히 살아있는 ‘통일의 꽃’이다. 임수경씨는 트위터에 “80년대 국민 여동생, 원조 아이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스무살 시절 임수경에 대한 자부가 위트 속에 묻어난다. 20여년이 지나 마흔도 훌쩍 넘긴 ‘통일의 꽃’에게 걸맞은 새로운 수식어는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처음 ‘누나’를 봤던 기자 같은 후배 세대들은, 그리고 임수경과 함께 시대의 경계를 넘어온 이들은 그에게 어떤 이름을 안겨줄 수 있을까? 인터뷰/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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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이란 말은 별로고…, 운동권이라기보단 그 시대를 함께 겪은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지요.” -좁혀서 80년대 학번 세대라고 할까요? “네. (세대를) 분리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그 세대는 그런 게 좀 있어요. 함께 뭔가를 성취하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했고,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의 기억을 함께 공유한 세대…. 그들은 이미지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있어요.”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자. 임수경은 한국외대 불어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전대협 대표로 1989년 6월30일 북한에 들어가 46일 뒤인 8월15일 분단 이후 일반인으로는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돌아왔다. 북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탈북자 출신 한 언론인은 “임수경이 청바지를 입은 채 평양 한복판에서 여자의 몸으로 저렇게 자유분방하고 당당하게 즉석연설을 하는” 등의 모습이 “북한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해방시켰다”고 했다. 단숨에 남북 모두에서 ‘통일의 꽃’이 되었던 임수경은 그러나 귀환 뒤 즉시 체포돼 안기부 조사를 받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3년5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옥살이 후유증은 없나요? “감옥이 몹시 추웠어요. 특히 바닥이 차가웠죠. 그래선지 지금도 겨울이면 몸이 힘들어요. 좁은 곳이 싫어서 지하철을 안 타요. 왠지 답답하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 싫어요. 되도록이면 지상으로 다니고 공간도 넓은 버스를 탑니다.” -방북 때문에 가족 피해는 없었는지요? “언니가 다니던 회사에서 잘렸죠. 그때 막 졸업해서 취직했다가 저 때문에 해고돼 외신이 연좌제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나 가족들에게 결과적으로 무슨 피해가 돌아간 것 아닙니다. 7살 위 큰오빠가 당시 해병대 중위였는데, 본인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전역했다고 했으니. 아! 저 때문에 집 대문 앞에 경찰 초소가 하나 생기긴 했어요. 길 아래 있었던 초소가 집 앞으로 옮겨왔죠. 한참 있었는데 최근엔 안 보이더군요.(웃음)” 평양 한복판 당당한 연설, 시민에 깊은 인상
방북때 태어난 북녘 아이들 ‘수경’ 이름 많아 임수경에게는 작은오빠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연세대 심리학과에 다니다 84년 군복무 중 사망했다. 운동권 대학생들에 대한 군대 내 회유공작인 이른바 ‘녹화사업’이 한창이던 때의 사건이라 나중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했으나 ‘조사 불능’ 결론을 내렸다. “제가 북에 다녀와 안기부 조사를 받는데, 오빠의 죽음을 운동권 참여 동기로 결부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그러나 나의 운동권 활동과 오빠는 무관했습니다.” -당시 전대협이 일부러 ‘철없는 부잣집 딸’인 임수경을 북쪽에 보내 운동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얻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한숨 내쉬며) 어떤 사람들은 내가 투철한 운동가가 아니라고 쑥덕대고, 또 어떨 때는 빨갱이라고 하고. 아휴, 골치 아파!(웃음) 물론 그런 식으로 내 방북의 의미를 희석시키려고도 했죠. 하지만 난 자부해요. 나라와 민족을 고민했던 그때 많은 다른 청년학생들처럼 나도 나의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고자 했어요. 저 그때 되게 열심히 했어요, 학교서나 밖에서나. 그런데 안기부가 사건을 이용하려고 하다 보니 ‘평창동 공주님’이라는 얘기까지 나갔어요. 우리 집이 (부자 동네인) 평창동에 있긴 하지만, 아마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었을 거예요. 부모님은 지금도 40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계세요.” -어린 시절의 임수경도 궁금하네요. “평창동으로 이사 오기 전에 북가좌동에서 충암유치원을 다녔는데 배우 차인표씨와 동창이에요. 대학 동기인데, 잘생겨서 출신 학교 물어보다가 알게 됐죠.(웃음) 저는 어릴 땐 굉장히 내성적이었다가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격이 바뀌었어요. 반장도 한번 못해본 아주 평범한 아이였고, 책을 많이 좋아했어요. 국어 맞춤법, 한자, 불어를 잘했죠.”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신문기자였습니다. 경향신문, 중앙일보를 거쳐 서울신문 사회부장을 끝으로 언론인 생활을 마무리하셨어요. 방북 당시엔 지하철공사 공보실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방부와 판문점 출입기자를 하실 만큼 신원상에 ‘문제’가 없는 분이셨는데, 딸 때문에 집안에 월북자가 있네 없네 하는 소리를 들으셔야 했습니다.” 임수경은 1992년 12월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서강대 언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회활동이 여의치 않은 대신 학구열을 불태웠다. 1999년 미국 코넬대 동아시아연구소를 거쳐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박사 과정 도중엔 언론법제에 관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껴 방송통신대 법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같은 기간 임수경은 이혼을 했고 초등학교 3학년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일상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해인사에서 꼬박 2년을 들어앉아 있었고, 장기간 여행으로 심신을 달래보기도 했고, 신경정신과에서 상담 치료도 받았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으세요? “아휴, 이제 무슨 행복이야….” -역사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입니다. “할 수 없지요. 그게 내 운명인 걸. 스무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결혼은 왜 했었나요? “평범해지고 싶었어요. ‘임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가치관이 잘 안 맞았는지 자꾸 충돌…, 왜 젊어서는 그런 걸 잘 못 참잖아요? 대학원 다니던 4월에 만나 28살이 되던 해 1월에 결혼해 29살에 아이 낳고 4년 동안 같이 살았어요.” -결국 행복을 찾아 나선 거였는데 잘 안되었군요. “그 나이 때 ‘셀러브리티’(유명인)의 삶이 버거워 개인의 삶을 추구했던 게 아마도 결혼과 이혼의 과정이었나 봅니다. 사실 내가 가진 선택지가 얼마 없었어요.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것 외에, 취업도 안 되고… 그러다 돌파구로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겠지요… 그리고 행복이라…,(침묵) 애가 죽었잖아요. 그 엄마는 죽을 때까지 행복할 수 없어요. 어떤 행복도 추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식을 잃은 엄마는 죄인이에요.” 평범해지고싶어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
사랑하는 아이 잃고난뒤 ‘인연’ 깨달아 임수경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절 생활이 좋았던 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을 안을 수 있게 된 것도 최근 일이다. “친구들 만나면 다들 하는 얘기가 남자들은 마누라 얘기, 여자들은 서방 얘기, 그리고 애들 얘기인데, 난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혼자 있는 거야. 그런 얘기도 들을 수 있게 된 게 얼마 안 됐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아들을 2005년 필리핀에서 사고로 잃었다. 임수경은 아들이 쓰던 휴대전화를 아직 지니고 있다. 아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여러가지 ‘미래’의 일정을 미리 입력해뒀다. 이달 3일엔 ‘고등학교 입학’이란 알람이 울렸다. 그는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나 생일 때 늘 아들 선물을 준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를 필리핀에 어학연수 보낸 거였나요? “아니에요. 학원가에 운동권 출신이 많잖아요. 친구들이 운영하는 학원의 스태프하고 자녀들을 이른바 ‘캠프’ 형태로 보낸 거였어요. 아이들의 부모가 다 제 친구들이었죠. 사실 저는 그 캠프에 보낼 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그 여름에 박사 논문을 써야 했어요. 방학 때 20일가량 논문을 바짝 써볼까 하는 생각에 그랬는데… 논문은 못 썼어요. 나중에도 쓰려 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많이 보고 싶겠어요. “보고 싶지. 얼마나 사랑한 아이였는데… 나는 늘 그 아이를 끼고 업고 다녔는데,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었나 봐요. 아이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인연이란 걸 배웠어요.” -해인사에선 어떻게 보내셨어요? “주로 절하고 기도했어요. 밖엔 안 나왔죠.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왔다가는 데려갈 생각은 않고 옥중면회 하듯이 ‘다음주에 또 올게’ 하면서 그냥 가요. 그러니 나는 계속 있었죠.(웃음) 사실 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절에서 밥도 다 주니까. 나름 바쁜 적도 있었어요. 그때 해인사에서 서기 883년에 만들어졌다고 쓰여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인 비로자나불상이 발견됐어요. 노무현 대통령까지 오셨고 국고지원을 받아 대비로전을 만들었어요. 제가 홍보기획위원으로 일했고, 그곳 불상 안에 스님들 이름과 함께 노 전 대통령 부부 이름, 그리고 제 이름도 들어갔어요. 가문의 영광이죠. 500년 뒤에 개봉할 텐데 그 임수경이 그 임수경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잡지에 글도 썼어요.(웃음)” 연평도 포격때 내 역할 안끝났음을 확인
이번 총선에 어떤식으로든 참여할 생각 2008년 임수경은 오스트리아로 가 유럽평화대학(EPU)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뒤 대학 강의도 했고, 라디오와 <한국정책방송>(KTV)에서 방송 진행도 했다. 트위터(@su_corea)를 통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그렇게 비교적 조용히 살던 그가 최근 사회적 주목을 받는 이유는 총선 때문이다. 임수경이 방북할 때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은 최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임수경은 당연히 영입해야 하지 않나”라고 말한 바도 있다. 하지만 낡은 매카시즘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영입 제의를 진짜 받았나요? “공식적인 제안은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영입과 관계없이 총선에는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생각입니다. 2000년부터 매번 선거 때마다 영입 제안이 있었어요. 그때는 내가 정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내 역할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죠.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정부간 채널이 생겼잖아요. 장기수도 송환했고, 금강산·개성으로 관광도 다녔잖아요. 나 같은 사람은 뒤에서 박수만 쳐주고, 자연인으로 살면 될 줄 알았어요.” -왜 생각이 달라졌나요? “가장 좌절을 느낀 건 연평도 포격사건 때였어요. 남북 긴장이 고조될 때가 많았지만 북이 남을 겨냥해 정면으로 공격을 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잖아요.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돼도 분단을 극복 못하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걸 보여준 거예요. 냉전이 극에 달할 때도 벌어지지 않은 포탄이 터진 거예요. 그 사건을 통해 나의 삶과 나의 투쟁을 되돌아본 거죠. 그때 난 되게 슬펐어요. 내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임수경표 대북정책엔 어떤 게 있을까요? “사실 6·15와 10·4만 잘 지켰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 대화를 계속해야죠. 임수경은 북녘 땅에서 인지도 100%예요. 제가 갔던 무렵 태어난 19살, 20살 북한 주민 가운데 ‘수경’이란 이름이 많대요.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으니, 그런 감성적인 코드를 적절히 활용해야 합니다. 아직도 저를 빨갱이니 뭐니 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89년에 45일 동안 북한에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그 이후의 제 삶이 설명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의 삶을 재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임수경’이란 이름은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사회 전반에 형성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옥중에 있는 임수경에게 편지를 보냈던, 그리고 임수경의 답장을 받았던, 그리고 ‘임수경 현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임수경은 여전히 살아있는 ‘통일의 꽃’이다. 임수경씨는 트위터에 “80년대 국민 여동생, 원조 아이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스무살 시절 임수경에 대한 자부가 위트 속에 묻어난다. 20여년이 지나 마흔도 훌쩍 넘긴 ‘통일의 꽃’에게 걸맞은 새로운 수식어는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처음 ‘누나’를 봤던 기자 같은 후배 세대들은, 그리고 임수경과 함께 시대의 경계를 넘어온 이들은 그에게 어떤 이름을 안겨줄 수 있을까? 인터뷰/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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