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비서가 지난 88년9월 군 행사에 참석해 박수에 답하고 있다.
왕조식 승계-능력으로 후계자 증명 등 진단 엇갈려…출생부터 논란거리
‘고난의 행군기’ 겪으며 안으로 군부 중심 선군정치 밖으로 대외관계 개선
‘고난의 행군기’ 겪으며 안으로 군부 중심 선군정치 밖으로 대외관계 개선
그는 왕조의 수성을 다진 당 태종 이세민인가 조선 태종 이방원인가, 아니면 아버지 진시황의 위업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방탕한 진이세황제 호해인가.
지난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위원장은 2000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 자리에서 “나를 은둔생활한다고 말하는데…이번에 김 대통령이 찾아오셔서 나를 은둔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김 위원장이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압축적으로 한 표현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상반된 두 가지 시각과 평가가 존재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력에 오른 무능한 2세 아니면 권력의지를 가진 유능하고 냉혹한 권력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 아니면 즉흥적이고 방탕한 권력자, 북한을 아사 직전의 위기에 빠트린 무능한 권력자 아니면 위기의 북한을 ‘고난의 행군’으로 생존시킨 지도자라는 극단적 평가가 엇갈렸다. 이는 그만큼 그에 대한 정보와 사실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부터가 논란거리이다. 그는 북한 공식 발표로 김 전 주석의 첫 부인인 김정숙에게서 1942년 2월17일 백두산 밀영에 있는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근거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다는 귀틀집은 혁명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은 그와 김 전 주석의 항일투쟁을 그가 이어받았다는 정당성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반론이 남쪽에서는 대세이다. 그가 김일성 전 주석이 소련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소련 내 출생지도 보르실로프, 브랴츠크, 사마르칸드 등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주장된다. 그의 출생 논란은 그를 바라보는 엇갈린 평가의 압축적 표현이다.
어쨌든 해방이 되자 그는 김일성 전 주석이 소련군과 함께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와 그의 항일 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 평양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다가 한국전쟁 당시인 1950∼52년 중국 지린학원에서 유학했다. 1960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61년 20살의 나이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면서 그는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등에서 지도자 수업을 닦는 길로 나섰다.
북한의 공식 출판물들은 당연히 그를 유년 시절부터 극찬한다. 전 과목 우등 등 탁월한 학업성적과 지도력, 다양한 독서와 취미활동 및 봉사활동 등 뿐만 아니라 ‘보통 어린이들이 쓰지 않는 복잡하고 미묘한 어감의 말을 잘 사용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그의 성격이 괴팍하고 즉흥적이고, 능력도 보잘것없다는 주장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등 남쪽으로 망명한 인사들이 구체적으로 전한다. 황장엽은 자서전에서 그가 “김정일은 이복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으며, 아내는 김정일의 방탕한 사생활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김정일을 좋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책은 원래 참을성이 없는데다 탐구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며 학교성적은 중간쯤이었다”고 폄하한다.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중고교 동기동창들도 그가 학교성적은 중간 정도였으며,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엇갈린 주장과 평가 속에서 공통분모는 있다. 그가 집중력과 몰입력이 높으며, 일단 한 문제에 집중하면 의사결정이 단호하고 파격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자질을 놓고, 그의 찬반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호에 맞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그의 이런 자질은 호사가적 기질로 발휘되어, 밤을 새워 일을 한다거나, 문학예술에 대한 재능과 관심을 보여왔다.
권력자의 아들이나 사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은 점도 그의 이런 기질을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한국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 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했고, 계모와 이복형제와의 권력투쟁설도 있었다. 김 위원장이 5살 연상의 성혜림과 동거한 것도 모성 결핍이 한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이후 고영희·김옥과 동거하면서도 이들의 모성애에 상당히 기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을 둘러싼 최대 쟁점은 그의 권력 승계이다. 아버지 김 전 주석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북한의 봉건적 왕조식 독재체제에 따른 것이라는 비난이 있는 한편 그가 사회주의 체제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지도력과 능력을 발휘해 후계자로 올랐다는 진단이 엇갈린다.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학 졸업 뒤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북한의 <조선전사 년표2>를 보면, 그는 1964~66년 사이에 김 전 주석을 집중적으로 수행해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1967년부터 69년까지 과도기를 거쳐 1970년대 독자적인 지도활동에 들어갔다고 북한 연구가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분석한다. 또 그가 1974년 2월 조선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공식후계자로 공식승인됐다는 것에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그가 이 과정에서 반김일성 인물들을 적발해 숙청하고, 특히 이복형제와 작은 아버지 김영주까지 권력투쟁을 통해 제거했다고 남쪽의 보수적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또 영화 등 예술부문 등 선전부문을 담당해, 김일성 항일투쟁 부각 등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다지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남쪽의 보수적 연구를 원용한다고 해도, 김 위원장은 적어도 자신의 지위를 공공히 하며 후계자로 입지를 다지는 능력을 보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을 것 같다. 북한 연구자들은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김일성의 의지, 김정일의 능력, 빨치산 원로들의 추대라는 세 가지 힘이 작용했다고 의견을 모은다.
김 위원장은 74년 당대회를 통해 공식 후계자로 지위를 굳힌 뒤부터 주체사상 확립과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지며, 내치에서도 증산캠페인과 대중동원을 이끌며 경제분야에도 관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됐고,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해 권력승계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1994년 7월8일 한반도 핵위기 와중에서 김일성 당시 주석이 사망하면서 ‘위기의 북한’을 걸머지게 됐다.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가 지탱하던 사회주의권 붕괴로 북한 경제는 엉망이 되어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 이 시기는 북한에게 건국 이후 최악의 시기였다. 그는 군부가 중심이 된 ‘선군정치’로 위기 타개에 나섰고, 김 전 주석 사망을 불발이 된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한 과감한 대외관계 개선에 나섰다. 1994년 미국과 북미기본합의, 김대중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에 이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추진과 북미수교 추진 등으로 북한을 개방 일보 직전까지 끌고 갔다. 또 노무현 대통령과의 10·4남북정상회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종전선언 추진 등으로 다시 한번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평화정착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평화정착은 주변국들의 정권교체에 따른 대북한 정책변경과 북한의 핵문제로 번번히 좌절됐다. 이는 북한이 끝까지 핵개발을 담보로 잡고 포기하지 않은 것에 그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어쨌든 김 위원장은 자신에 대한 엇갈리는 극단적 평가처럼 대외정책도 대결과 화해라는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두 개의 칼을 들고 북한을 이끌었다. 결국 그는 남쪽의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관계 경색 속에서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외관계가 봉쇄된채 자신의 지도봉을 내려놓았다.
김 위원장은 북한이 여전히 고립과 봉쇄된 가운데 사망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업적에 대한 평가를 향후 북한과 그의 후계체제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정의길 선임기자
김정일 연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15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주최 송별오찬에서 밝은 표정으로 담소하고 있다. 평양/청와대 사진기자단
권력자의 아들이나 사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은 점도 그의 이런 기질을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한국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 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했고, 계모와 이복형제와의 권력투쟁설도 있었다. 김 위원장이 5살 연상의 성혜림과 동거한 것도 모성 결핍이 한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이후 고영희·김옥과 동거하면서도 이들의 모성애에 상당히 기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을 둘러싼 최대 쟁점은 그의 권력 승계이다. 아버지 김 전 주석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북한의 봉건적 왕조식 독재체제에 따른 것이라는 비난이 있는 한편 그가 사회주의 체제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지도력과 능력을 발휘해 후계자로 올랐다는 진단이 엇갈린다.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학 졸업 뒤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북한의 <조선전사 년표2>를 보면, 그는 1964~66년 사이에 김 전 주석을 집중적으로 수행해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1967년부터 69년까지 과도기를 거쳐 1970년대 독자적인 지도활동에 들어갔다고 북한 연구가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분석한다. 또 그가 1974년 2월 조선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공식후계자로 공식승인됐다는 것에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그가 이 과정에서 반김일성 인물들을 적발해 숙청하고, 특히 이복형제와 작은 아버지 김영주까지 권력투쟁을 통해 제거했다고 남쪽의 보수적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또 영화 등 예술부문 등 선전부문을 담당해, 김일성 항일투쟁 부각 등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다지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남쪽의 보수적 연구를 원용한다고 해도, 김 위원장은 적어도 자신의 지위를 공공히 하며 후계자로 입지를 다지는 능력을 보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을 것 같다. 북한 연구자들은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김일성의 의지, 김정일의 능력, 빨치산 원로들의 추대라는 세 가지 힘이 작용했다고 의견을 모은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2일 낮 평양시 4.25문화회관 광장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서 처음으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 의원이 2002년5월13일 저녁 숙소인 평양 백화원초대소를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만찬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박근혜 의원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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