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동독봉기 등에도 꾸준히 교역…중, ‘독립 주장’ 대만과 무역확대
독일과 중국의 경험은 정치 군사적 위기가 닥칠수록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평화적 통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동서로 분단됐던 독일의 경우,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될 때까지 적지 않은 정치 격변을 겪었다. 하지만 동서독 사이의 교역은 끊어진 적이 없었다. 특히 동서독의 교역은 서독에서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더라도 변함이 없었으며, 매년 꾸준히 늘었다. 동서독 분단 40년 동안에는 동독 봉기(1953), 베를린 장벽 구축(1961), 헝가리 봉기(1965), 체코 봉기와 소련의 침공(1968) 등 동서독의 교역을 중단시킬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격동 속에서도 동서독의 ‘민족 내부 교역’은 후퇴하지 않았다.
1989년까지 서독은 동독에 약 40억달러 정도를 지원한 것으로 평가된다. 서독 내부에서도 이를 두고 ‘퍼주기’라는 비난이 일었다. 서독의 지원이 “동독의 생존을 연장시켰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서독의 지원금이 동독의 산업을 일으킬 만한 큰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동독의 연명에 기여했다’는 식의 평가는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되레 서독과의 교역 지속이, 동독 시민으로 하여금 외부세계로 눈을 돌리게 했고, 이들이 1989년 민주화 시위에 나서는 동력이 됐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즉, 동서독의 꾸준한 교역 확대가 전쟁 등 극심한 갈등을 피하고 독일 민족이 재통합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준 셈이다.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1996년 당시 리덩후이 대만 총통이 “대륙과 대만은 특수한 국가와 국가의 관계”라고 정의하면서 ‘대만 독립’ 문제가 물 위로 떠올랐다. 이때 대륙은 미사일 발사 등 ‘독립 저지’를 위한 강경 행동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런 무력시위는 되레 대만인들의 반감을 산 성숙하지 않은 대응이라는 내부 반성이 일었다.
중국이 지난해 대만 독립 움직임에 대한 무력 개입의 근거 법령인 ‘반국가분열법’을 제정한 뒤에도 대만해협의 파고가 높아졌다. 대륙은 롄잔 당시 국민당 주석과 쑹추위 친민당 주석을 잇달아 베이징으로 초청해 양안 통상무역관계를 확대해 경제로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이후 대만 독립을 추진해온 천수이볜 총통은 궁지에 몰렸다.
이렇듯 독일과 중국의 사례는 경제협력과 통상관계의 확대가 분단국가의 평화적 재통일에 가장 중요한 물질적 기초임을 보여준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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