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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철통경계 신화, 결국 ‘경계실패 비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등록 2022-01-04 09:37수정 2022-01-14 17:34

정치BAR _ 권혁철의 안 보이는 안보
잘못된 안보정책 탓 장병 대적관 풀어져 기강해이 질타하나
22사단 최악 근무 환경 · 철통경계 · 선형방어 문제도 중요
9.19 남북 군사합의에 따른 비무장지대(DMZ) 내 시범 철수 감시초소(GP) 가운데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원형을 보존하기로 한 강원도 고성 지피 뒤로 푸른 동해가 보인다. 월북자는 이 지피 근처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사진공동취재단
9.19 남북 군사합의에 따른 비무장지대(DMZ) 내 시범 철수 감시초소(GP) 가운데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원형을 보존하기로 한 강원도 고성 지피 뒤로 푸른 동해가 보인다. 월북자는 이 지피 근처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사진공동취재단

새해 첫날 강원 동부전선 22사단 경계지역 월북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들에게 ‘경계실패’ 책임을 질책하지 않았다고 청와대가 지난 3일 설명했다. 3일 오후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경계 실패란 지적이 나오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질책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오늘 참모회의에서 질책은 없었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보수층에서는 “경계 실패란 심각한 상황인데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위기의식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 1일 밤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월북한 사람이 비무장지대 내 보존 감시초소(GP) 근처를 통과한 것으로 드러나자, 당시 지피에 경계 근무자가 있었다면 월북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보존 지피는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로 병력이 철수하고 건물만 남아 있는 곳이다.

황규환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지난 2일 월북 사건에 논평을 내고 “문재인 정권의 안이한 안보 의식이 불러온 고질병”이라며 “정권의 안보 수호 의지가 약한 마당에 언제고 같은 사건은 재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장영일 국민의힘 중앙선대위 상근부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이번 사건으로 “곪을 대로 곪은 안보 불감증과 무딜 대로 무뎌진 군 기강 해이가 드러났다”며 “문재인 정권이 자행해 온 대한민국 국방·안보 파괴의 단면”이라고 거칠게 공격했다. 장 상근부대변인은 “주적을 주적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군’이고 군사력이 아닌 대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군이지만 그래도 군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란 게 있다”고 주장했다.

9·19 남북 군사합의'에 따른 비무장지대(DMZ) 내 시범 철수 감시초소(GP) 가운데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장비와 병력을 철수했지만 원형을 보존하기로 한 강원도 고성 지피. 고성 지피는 북한 지피와의 거리가 580m밖에 되지 않는다. 고성/사진공동취재단
9·19 남북 군사합의'에 따른 비무장지대(DMZ) 내 시범 철수 감시초소(GP) 가운데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장비와 병력을 철수했지만 원형을 보존하기로 한 강원도 고성 지피. 고성 지피는 북한 지피와의 거리가 580m밖에 되지 않는다. 고성/사진공동취재단

이런 지적들이 타당한 것일까. ‘문재인 정부가 9·19 군사합의 같은 대북 유화정책으로 장병의 대적관이 풀어져 최전방 경계 태세가 해이해졌다’는 주장부터 따져보자. 요즘 보수언론들은 <국방백서>에서 주적을 삭제하는 등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안보정책이 이번 월북 사건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주장처럼 국방백서에 다시 ‘북한=주적’을 명시하고 장병 정신교육을 대폭 강화하면 ‘물샐틈없는 철통경계’가 이뤄지는 것일까. 과거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휠씬 높다.

2012년 10월 북한군이 강원도 고성 비무장지대 우리 쪽 감시초소(GP) 창문을 두드려 귀순 의사를 밝혔다. 황당했던 ‘노크 귀순’이다. 이명박 정부 때였다. 2015년 6월 북한군이 중동부 전선 비무장지대 우리 군 감시초소 인근에서 하루를 대기했다가 날이 밝자 귀순했다. 민망한 ‘대기 귀순’이다. 박근혜 정부 때였다.

2013년 8월22일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연합군사훈련 상황실을 방문해 확고한 군사대비 태세를 강조했다. 이 지시가 무색하게, 다음날 새벽 북한 주민이 바다를 헤엄쳐 강화 교동도 민가에 도착해, 잠자던 집 주인을 깨워 “북에서 왔다”고 귀순 의사를 밝혔다. 한미연합훈련 기간이고 대통령이 대비 태세를 강조한 다음 날 대북 경계망이 뚫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0~2016년 <국방백서>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고 명시했다. 장병들의 확고한 대적관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일부 부대에서는 “훈련 성과를 높이고 대적관 확립 차원에 반드시 필요하다”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무위원장 사진을 표적지로 삼아 사격 훈련을 했다. 일부 전방부대에서는 ‘김일성 3부자를 부관참시하자’,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 ‘미친Ⅹ 몽둥이가 약!약!약!’ 등의 구호를 외치고 부대 건물 벽과 울타리에 걸었다.

2011년 6월 강원도 철원군 서면 백골부대(3사단) 들머리의 펼침막(사진 위)과 담벼락에 자극적인 구호들이 보인다. 철원/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11년 6월 강원도 철원군 서면 백골부대(3사단) 들머리의 펼침막(사진 위)과 담벼락에 자극적인 구호들이 보인다. 철원/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대적관 확립과 대북 적개심을 엄청나게 강조했지만, 경계실패는 끊이지 않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군 총기사고 중 최대 사망자(12명 사망)를 낸 ‘조춘희 일병 총기 난사 및 월북 사건’이 1984년 22사단 지역에서 발생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때라 ‘북한=적’이란 대적관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도 훨씬 단단했다. 역대 사건 사고 사례를 보면, 대적관과 경계실패는 상관관계, 인과관계가 희박하다. 이번 월북 사태를 정신무장 해제가 빚은 경계실패로 단정하는 주장들을 살펴봐도 목소리만 높을 뿐 합리적 근거 제시는 없다.

일부 주장처럼 비무장지대 지피 철수가 안보를 허무는 무장해제일까. 이를 따져보기 전에 아랫글을 읽어보자.

“남북 간 GP의 상호 철수를 추진할 때가 됐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GP 철수가 시기상조이며, 군사적으로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현대전의 성격을 놓고 볼 때 GP의 군사적 기능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GP의 조기경보 기능과 상대방 동태 감시 기능은 첨단·과학화된 군 장비를 통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으며, 특히 미래전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과학화된 장비로 이전해가는 것이 옳다. 인공위성을 통해 수백 ㎞ 밖에 있는 적의 움직임을 안전하게 살필 수 있는데, 굳이 젊은 장병들에게 위험을 무릅쓰며 지켜보라고 할 이유는 없다.…논의의 핵심은 GP의 숫자가 아니다. ‘비무장지대를 비무장화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다. 이 점만 분명히 한다면 논의가 시작되는 것만으로도 남북 간 군사적 신뢰는 물론 상호군축과 평화구축의 시험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브리핑 같지만 이 글은 2005년 7월 당시 박진 한나라당 의원(국회 국방위원)의 작성했다. 박진 의원이 한 월간지에 기고한 이 글의 제목은 ‘남북한 GP 상호 철수해 비무장지대 비무장화하자’였다.

박진 의원은 왜 지피 철수를 꺼냈을까? 2005년 6월 경기 연천 28사단 지피에서 김아무개 일병의 총기 난사로 장병들이 죽고 다쳤다. 한나라당은 총기 참사의 원인으로 전방부대의 열악한 근무 여건을 꼽았다. 지피, 일반전초(GOP) 장병들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하루 종일 경계와 작업에 투입되고 고립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지피 총기 사고 재발을 막으려면 장기적으로 휴전선에 감시관측장비를 갖추고 휴전선 경계부대를 뒤로 배치하고 기동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게 박진 의원 주장이었다.

이번 월북 사건 뒤 일부에서는 철수한 군사분계선 지피를 복원하고 비무장지대 경계 병력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병력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 인력 중심의 지피 운영은 더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렵다.

이번 월북 사건의 쟁점은 기강 해이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로 봐야 하느냐다. 지난 1일 오후 6시40분 철책 경보가 울리고 약 3시간가량 해당 부대가 월북 시도 사실 자체를 모른 채 있다 약 4시간 뒤인 밤 10시40분께 월북이 벌어졌다. 경계부대의 과오가 명백하다. 군에 대한 믿음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군 안팎의 이야기를 모아 보면, 이번 사건에도 여전히 구조적 문제들이 겹쳐 있다. 먼저 ‘물 샐 틈없는 철통경계’란 신화이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군 당국은 “155마일 휴전선을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도록 철통경계하고 있다”고 홍보해왔다. 요즘 군 당국은 이런 홍보를 자제하지만 워낙 오래 강조하는 바람에 대다수 국민은 휴전선을 국군 장병들이 불철주야 24시간 철통경계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군 복무를 마친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는 병사들이 경계 근무를 이렇게 하긴 어렵다. 문제가 생기면 군 당국이 애써 만든 ‘철통경계’ 신화가 ‘경계실패 비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군 당국이 철통경계란 허세를 접고, 국민에게 경계 현실을 솔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DMZ 개념도.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DMZ 개념도.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군 당국이 휴전선에 감시관측장비를 보강하고 휴전선 경계부대를 뒤로 배치하고 기동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는데 ‘철통경계’ 신화가 걸림돌이다. 한국군은 수십 년째 휴전선에 한줄로 병사를 줄 세우는 선형방어(linear defense)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철통경계를 위해 한반도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휴전선을 따라 최전방 11개 사단병력이 늘어서는 것이다. 지피, 지오피는 선형방어의 가장 선두에 있다.

지피, 지오피의 군사적 쓰임은 대략 세 가지다. 북한군 남침 조기경보 기능, 북한군 남침 시 1차 방어, 북한군 국지도발과 간첩침투 대응 등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피 근무 병사의 육안 관측과 망원경 같은 감시장비에 의존한 조기경보 기능은 효과가 떨어졌다. 한미연합군은 군사위성, 정찰기, 통신감청 등으로 북한군의 전면 남침 조짐을 2~3일 전에 파악할 수 있다.

남침 시 1차 방어 기능도 제한적이다. 북한군은 우리 군의 지피, 지오피 위치를 알고 있고, 전쟁이 벌어지면 이곳을 집중포격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전방 밀집형의 군 배치와 지피 운용은 북한의 기습공격에 매우 취약하고 개전 초 아군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우려는 군 내부에서도 꾸준히 나왔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첫 국방장관에 지명됐다 논란 끝에 사퇴한 김병관 전 한미연합부사령관도 전쟁 발발 시 아군 피해를 우려해 휴전선을 따라 ‘병력 띠’를 형성하고 있는 방어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을 폈다. 유사시 불필요한 병력 소모와 인명 피해를 막고 한반도 지형 특성에 맞게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피는 병력 중심의 전방 밀집형 선형방어 전술에 의한 것으로, 축선(Corridor) 중심의 전쟁이 예상되는 한반도 특성에 맞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예전처럼 비무장지대를 통한 북한 무장간첩 침투, 북한군 국지도발이 빈번하지 않아 최일선에서 이 상황에 대응하는 지피의 군사적 용도가 약해졌다.

강원도 22사단 지피에서 바라본 북한 쪽 초소가 해금강을 배경으로 보인다. 북한 지피와의 거리는 불과 580m밖에 되지 않는다. 월북자는 이 지역을 통해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22사단은 전군에서 유일하게 전방 육지경계와 동해안경계를 동시에 맡고 있다. 고성/사진공동취재단
강원도 22사단 지피에서 바라본 북한 쪽 초소가 해금강을 배경으로 보인다. 북한 지피와의 거리는 불과 580m밖에 되지 않는다. 월북자는 이 지역을 통해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22사단은 전군에서 유일하게 전방 육지경계와 동해안경계를 동시에 맡고 있다. 고성/사진공동취재단

‘별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22사단의 열악한 근무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22사단은 전군에서 유일하게 전방 육지경계와 동해안경계를 동시에 맡고 있다. 육지는 험준한 산악지대다. 경계책임지역이 다른 사단의 3~4배가량인데도 병력은 다른 부대와 비슷하다. 병력은 적고 지킬 곳은 너무 넓고 험한 22사단에는 논란이 된 월북·월남 사건이 잦다. 지난해 2월에는 북한 남성 1명이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 근처 동해에서 오리발을 차고 ‘헤엄 귀순’했고, 2012년 10월에는 월남한 북한군 병사가 군 초소 문을 두드린 ‘노크 귀순’이 일어났다. 2009년에는 22사단에서 전역한 민간인이 철책을 뚫고 월북했다.

지금까지 22사단 경계지역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지휘관 문책과 재발 방지 대책 발표가 되풀이됐지만,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각종 사건 사고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문책당한 사단장이 임기를 채운 사단장보다 많아 ‘별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지난 1일 월북 사건이 일어났을 때 22사단장은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된 때라, 지휘 책임을 묻기도 어정쩡한 상황이다.

이번 월북 사건의 배경에는 경계부대 근무자의 잘못, 열악한 22사단 근무 환경, ‘철통경계’ 신화, 선형방어 전술 등이 얽혀 있다. 대적관 해체와 기강 해이를 매섭게 질타한다고 풀릴 문제는 아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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