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부산 해운대구 웨스턴조선부산 호텔에서 열린 2021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서 문정인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과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특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성찰하고 무엇을 혁신할 것인가?'를 주제로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
17일 ‘2021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 기조발제자로 참여한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특사는 “지난 30년간 미국의 북한 정책이 모두 실패했다”며 “실패한 역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갈루치 전 특사는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끌어냈던 주역이다. 그는 20년간 미국 정부에서 근무하며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차관보로 일했고, 미국 조지타운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이날 갈루치 전 특사와 화상 특별대담을 한 문정인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도 “30년간 미국의 대북정책은 실패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인내심을 갖고 현실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주장은 비슷했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먼저 갈루치 전 특사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북한 핵무기와 관계 정상화에 대한 북-미 간의 협상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트럼프 정부에서 기대했던 것처럼 북-미 간의 “점심식사 회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북핵 검증,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따져야”
그는 인내심과 더불어 지금까지 북-미 대화에서는 없었던 현실주의를 강조했다. 비핵화로 가는 첫 단계로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무기 개발 시설의 종류와 위치를 신고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687호에서 요구했던 것으로, 1991년 1차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부과된 조건들이었다. 이라크는 수차례에 걸쳐 “완전하고 최종적인 신고”를 했지만, 마지막 신고는 유엔의 사찰팀인 유엔특별위원회(UNSCOM)에 의해 가짜로 밝혀졌다.
그는 “미국은 아주 긴 시간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문구를 고수해왔다. 이는 눈에 확 들어오는 문구지만,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는 1991년 제1차 걸프전 이후 이라크 핵사찰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들어 “현대식 핵무기는 식탁 아래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어떤 핵 사찰도 북한의 모든 식탁 아래까지 조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문 이사장이 이에 대한 대안을 묻자 “이라크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북한이 신고한 부분만 검증할 수 있고 그 이상은 하기 힘들다. 모든 것을 다 사찰할 수 없다”며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2차 대전 때 일본 나가사키를 파괴하는 데 사용된 핵분열성 물질은 골프공 정도의 크기였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골프공이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입증할 수 있는 검증 체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또 “비핵화를 불가역적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잡혀 있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북한이 한번 만들어본 것이라면 다시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갈루치 전 특사는 “비핵화의 목표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평화가 지속되려면, 북한이 국제 공동체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문 “북 인권과 북핵 탈동조화”, 갈루치 “북-미 협상에 북 인권 포함”
이와 함께 갈루치 전 특사는 북한 인권 상황의 변화가 북-미 협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문 이사장은 “북-미 협상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북한 인권과 북핵을 탈동조화해야 한다. 북핵 문제에 앞서 인권을 거론하면 북한이 우리를 믿지 않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갈루치 전 특사는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으면 북-미 관계 정상화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이사장은 “한국과 미국의 보수 쪽에서 ‘한국도 핵을 보유해 북핵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이 핵 무장을 하면 국제 제재 대상일 수 있다. 미국 전술핵 재배치, 나토 방식 핵 공유 등도 거론된다.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며 갈루치 전 특사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갈루치 전 특사는 “한국이 그런 결론을 내리면 잘못된 것이고 위험하다. 한국과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미국이 중국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미국이 중국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한다. 중국 주변에 핵무기를 더 배치한다고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문 이사장은 “최근 중국과 미국의 군사충돌 우려가 나온다. 이 경우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갈루치 전 특사는 “한-미 동맹으로 한국이 한반도 관련 사안에만 개입할 수 있고 그 이외는 아니라고 안다”고 말했다.
문 이사장이 종전선언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적극적으로 북한을 포용·관여할 수 있는 조처는 지지한다. 종전선언이 정치적으로 좋은 생각인지 잘 모르겠으나 도움이 된다면 반대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미국의 제재 선호…전쟁 않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어서”
대북 제재에 대한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렸다. 문 이사장이 대북 제재 완화를 거론하자 갈루치 전 특사는 “미국은 제재를 좋아한다”고 털어놓았다. 전쟁도 아니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는 “제재는 제재 자체로 효과가 있는 게 아니므로 제대로 된 맥락에서 거둬들이는 게 좋다. 북한이 아무 행동도 안 하는데 제재를 거둬들이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제재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 이사장은 “북한은 유엔 제재 완화를 원한다. 구체적으로 정제유, 의류 수출 제재 완화 등을 원하는데 미국이 이를 용인할 수 있느냐”고 묻자 갈루치 전 특사는 “반대급부가 있다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문 이사장은 “북한이 변화하려면 미국도 변해야 하는데,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한 것은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갈루치 전 특사는 “대북 제재의 유연성을 보여주려면 북한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북한이 대표적 적대시 정책으로 거론하는 한-미 연합훈련 중단 여부에 대해 그는 “군사적 준비 태세를 갖추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전문가가 말해줄 것이다. 한-미 훈련이 도발적이지 않지만 북한이 좋아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부산/권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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